옥천 대림선원 주지 연탁스님 인터뷰 (1)

[옥천 인물 발굴] 지켜줘야할 것 같았던 어린 누이는 세월이 총총이 지나 주변에 자랑하고 또 자랑하고 싶은 스님이 됐다. 법명이 연탁. 어린시절 절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침묵이 봄비처럼 떨어지는 가운데 저 스스로를 들여다보기 좋아했던 누이. '남들은 시집간다고 뜨개질 배우고 열두폭 병풍 준비한다는데' 어머니 한탄에도 가만히 웃던 누이였다.

16일 이른 아침께 만난 연탁스님은 그를 '윤중호씨'라고 불렀다. 스물넷 젊은 나이에 출가했고 속세의 일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벗어났기 때문일 테지만, '윤중호씨' 부르는 소리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주변 사람, 세상 사람들 아픈 마음을 제 안에 쓸어 담아내던 사람이었어요. 틈틈이 전화해서 '잘 있지?' '별 일 없지?' 물어보고 어머니한테도 '엄니, 괜찮쥬?' 연락했지요. 무슨 일 있으면 묵묵히 들어주고. 사실 경제적으로나 무엇으로나 본인도 다른 사람 못지 않게 힘들었을 텐데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요?' 묻자 "천성이지요." 하고 웃는다. 

"어린시절부터 장남이라고 일찍 철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화장품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자식 뒷바라지 열심히 해주셨지만 돈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아버지와 새어머니 아래에서도 당신이 동생들 바람막이가 돼줘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나이 들어서도 몇 푼 들고가기보다 집어주는 걸 쉽게 여겼죠. 결국 다른 사람을 안아내는 일을 제 행복으로 받아들인 건데, 그 어려운 일이 쌓여서 병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자꾸 그를 찾는 사람들이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본인이 마땅히 그리 살아야 한다 선택한 길이니까, 행복해했으니까, 그것으로 됐다, 생각한 거지요." 하고 웃는다.

왼쪽 앞에서부터 반시계방향으로 동생 광호씨와 경숙씨, 어머니 박유순씨, 윤중호씨, 외삼촌 박창희씨와 박창기씨. 

■ 출가(出家)에서 발견한 것

이 출가는 연탁스님이 아니라 윤중호 시인의 이야기다. 시인의 산문 '가출과 출가의 변'을 보면, 그는 충남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부쩍 수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6학년 서울로 처음 가출했을 때 함께 가출했던 친구 준우가 '쓸데없는 공부를 왜 하느냐?'라고 물었는데 시인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단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내심 존경을 표하며 당신은 학교를 가지 않고 보문산에 올라 빈둥거리다 '아주 큰 공부하고 오는 놈 마냥 의젓하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가출도 잦았다. 대전 아버지 집을 나오면 아버지는 으례 어머니에게 도망갔겠거니 생각했고, 어머니는 별 소식이 없으면 다행히 대전서 잘 공부하고 있구나 생각했으니까 가출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억울하고 서럽고 늘 왼편 옆구리가 허전해'서 시인은 1학년 말, '출가'일까 '가출'일까, 늘 가출에 실패했지만 '글자만 바꾸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래 출가를 빙자한 가출'을 한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있는 대전집에서 살기 어려워하니 어머니가 자취할 수 있게끔 돈도 마련해주고 많이 노력했지만, 간혹 가다 등록금처럼 큰돈은 아버지에게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윤 시인은 끝까지 안 가려고 했죠. 그럼 저는 여러번 교무실에 불려다니다 결국 아버지께 가고, 그 사실을 윤중호씨가 알면 난리가 나는 거였죠. 어머니를 돕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다른 동생들과는 크기가 달랐을 거예요. 경제적 어려움도 늘 안에 있었지요." 

'출가를 빙자한 가출'에서 당시 시인이 발견한 건 무엇이었을까.

"절에서 내가 한 것은 불경을 공부한다던지, 김성동 성님처럼 멋있게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것 같은 화두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십리 눈길을 걸어 쌀을 팔아 오는 것이나, 산나물국을 잘못 끓여서 가끔 큰스님에게 한 대씩 얻어맞는 일이나, 정량(부엌)청소 또는 나무를 해오는 일 같은 것이 내가 했던 일이었다. 큰스님의 염불소리를 들으며 괜히 서러워서 질질 울던 그해 겨울 고주배기를 찾아 산을 오르내리면서, 저물어오는 저녁 어둑어둑한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우우우 우는 소나무의 흔들림 속에서, 그리고 천지가 모두 가라앉은 듯한 어둠 속에서 나는 볼 수 있었다. 더러움과 욕심의 껍질을 깨지 못하고 초라하게 떨고 있는 나 자신을……" 산문 '가출과 출가의 변' 중 

더러움과 욕심의 껍질 안, 초라하게 떨고 있는 자신을 숨죽여 바라보는 것. 시인은 6개월 만에 어머니에게 멱살 잡혀 끌려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아들이 정말 스님이 되는 게 아닌가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어머니가 몸무게 10kg이 빠지도록 전국의 절을 돌아다녔고, 눈물로 호소하며 아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시인은 그 뒤로도 아버지한테는 죽어도 손을 벌리기 싫어했다. 이 모든 어려움에서 자유로워진 건 아주 나중의 일이다.

16일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만난 연탁스님

■ ‘째째한 중 되지 말고 큰 스님 되어’

"오빠, 전에 말했던 대로 이제 출가(出家) 합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 결정한 출가라서 망설임은 없지만, 아무래도 엄마가 걱정됩니다. 오빠에게 뒷감당을 미루는 것만 같아 죄송합니다. -경숙 합장" 산문 '오래도록 끊이지 않을 연' 중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출가는 막았지만 딸의 출가는 막지 못했다. 

"정말 신심이 돈독한 집이 아니라면 자기 집에서 스님이 나오면 좋겠다 흔연하게 여기는 집은 없을 거예요. 허락 안 하실 것을 아니까, 전라도에 절을 수소문해 그쪽으로 가서 삭발을 하고 승려복을 입고 모양을 갖췄지요. 어머니가 저를 찾아 계룡산 동학사나 청도 운문사, 수원 봉녕사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어요. 어머니를 만난 건 옥천 황룡사로 돌아와서였지요."

"5월이었다. 온갖 꽃이 만발한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셨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두고 머리 깎고 입문한 당신의 딸이 불쌍하다며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또 우셨다. 물끄러미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있는데 대법당 쪽에서 연탁이 걸어나오다 합장을 하였다. 합장을 하는 딸을 보신 어머니는 화다닥 정신이 나는지 내 등을 떠밀며 당장 끌고 가자는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우리 오누이는 그저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어머니는 세상에 오빠가 돼 가지고 여동생 하나 끌고 나오지 못한다고 다시 눈물바람으로 비틀거렸지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면서 한 마디 던졌으니, "엄니 자꾸 우시면 나두 출가헐꺼유. 그때 가서 저기, 오늘만큼 안 우시면 알아서 하셔, 잉?" "어이쿠, 내 새끼. 어째 소견이 그러누." 우시다가 잠깐 웃기도 하셨다" 산문 '오래도록 끊이지 않을 연' 중

"그때 저희가 어머니께 생떼를 부린 거지요." 

기억 난다며 연탁스님이 웃었다. 

"제가 일찍이 제 길을 간 것을 윤중호씨가 나름 뿌듯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후일 윤중호씨 장례식장에서였어요. 한 비구스님이 들어오더니 저를 보고 인사를 해오는 거예요. 윤중호씨가 저를 만나서 자기에게 동생스님이 있다고 그렇게 자랑했다구요. 그리고 영전에 따뜻하게 끓인 차를 한 잔 올렸는데, 그 분이 전라도 목포 분이였지요. 저는 또, 아이구, 그 이 참 발도 넓다, 생각했죠."

시인은 황룡사에서 만난 동생 스님에게 '엄니가 저렇게 우시는디, 다시 생각해보지 그려.' 라고 물었다. 동생이 아무 말 없자 '그려? 그럼 째째한 중 되지 말구 큰 스님 되어.' 말했다. 그게 다였다. 그의 산문 '오래도록 끊이지 않을 연'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꿈은 식구가 모두 모여 사는 것이다. 그 꿈은 그러나 담장을 치고 그 속에 우리 식구만 모여 살고 싶다는 뜻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경숙이, 아니 연탁스님도 크게 모여 사는 법을 배우고 행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 모두가 정말로 얼싸안고 모여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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