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호 숭전대 대학 동문 조기호씨 인터뷰(2)
군 제대 후 안면도 누동학원서 야학교사로
연작시로 그려낸 안면도 사람들의 삶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기획-옥천 인물발굴 윤중호(8)] “윤중호 시를 보면 눈에 띄게 재밌는 게 하나 있어요. 충청도 사투리요. 실제로 이 친구는 자기 사투리를 버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부러 더 강하게 썼거든요. 대개는 버리잖아요(서울에 와서 사투리 쓰는 동네는 경상도밖에 없을 거예요. 전라도 사람도 서울말 쓰고 충청도는 말할 것도 없고… 충청도 놈이 경상도 가잖아요. 경상도 가서 직장생활 하다가 추석 때 왔는데 경상도 말을 쓰고 앉았더라고요. 에라이, 이 빌어먹을 놈아). 주관적인 내 생각이에요. 제 처랑 천안 큰댁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 우리 누님이 갑자기 우리 아내한테 서울말을 쓰는 거예요. 자기가 자네보다 한 단계 윗사람이라고 심리적인 구별을 지은 거예요. 언어로, 서울말로. ‘우아하고, 멋있고, 얌전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윤중호는 그 반대였죠.” (조기호,64,충남 예산군 예산읍 주교리)

“내 옆방의 아저씨, 실직했다고 며칠 전 아줌니랑 대판 쌈을 벌이더니, 아줌니는 보따리 싸들고 집을 나갔는데, 어디서 성능 좋은 녹음기 하나 장만해 와서는 아침부터 간드러진 유행가 가락이 번지더니, 글쎄, 그 아저씨와 나는 대낮에도 구들장을 등에 지고 번듯이 드러누워서, 내가 벽을 쿵쿵 두드리자 그 아저씨 한물간 목소리로 “총각 왜 시끄러워서 그랴” “아뉴 볼륨좀 높여 달라구유” 어쩌구 악을 쓰며 신이 났는데 (중략)/그런데, 차암내 그게 아니었던 모양여. 유행가를 따라 부르던 아저씨의 질펀한 노래가 코맹맹이 소리로 바뀌는가 싶더니 이내 뚝 그치고 말았거든? 뭔 일인가 기웃거려봤더니 글쎄, 녹음기 혼자 뽕짜르작거리고 아저씬 눈이 벌개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더라닝께.”시 ‘본동일기·다섯’ 중 

사투리는 ‘맨들하지 못한, 서투른, 떠도는, 세련되지 못한, 간난한’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시인은 왜 자꾸 울퉁불퉁한 길에서 서성이는 걸까. 그 길에 그가 생각하는 시인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인은 이 세상의 법칙에 매달려 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중략)/우리가 별 근거 없이 ‘옳다’고 믿는 것을 아주 놓아버리고, 그래서 우리들이 목매여 살아가는 이 세상이 놓쳐버린 아름다운 삶을 찾아내는 것이 소위 시인이라는 작자들의 일인지도 모른다./행복한 시인은 그러니까 그 쓰라리고 아픈 곳에서 늘 머물며 세상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산문 ‘아름다운 생을 찾아 무작정 떠나고 싶은 시인 윤재철’ 중. 

간난함이 ‘쓰라리며 아픈 곳’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곳에 ‘이 세상이 놓쳐버린 아름다운 삶’이 있는가? 그건 오늘,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찾아내야 할 일이다.

지난달 24일 충남 예산군에서 만난 조기호(64)씨

 ■ ‘이 세상이 놓쳐버린 아름다운 삶’

“장형, 정말 왜 그런지 몰러. 술만 마시면 온동네가 시끄러워. 술만 없으면 골샌님인디. 몰러, 그 순한 눈에 갑자기 핏발서는 이유를. 동네사람들도 장형 놉 읃을 때는 한 사람 반 몫을 쳐준다고 허잖여. 안면도에선 소문난 상일꾼여, 상일꾼. 나 같은 놈은 열 명이 달라붙어도 택도 없어. 근디 왜 그런지 몰러./접때도 그려. 초저녁엔 갓 심은 모가 뿌리몸살 앓는다고 아픈 자식보듯 휘청거리고 논빼미로 다니더니, 언제 술 먹었는지 몰러. 술에 취해 느닷없이 달겨들어선 방문 다 부숴버리고 부엌문짝 다 부숴버리고 기르던 돼지새끼들 천지사방으로 다 도망가게 해놓고…… 그래도 신통허게 사람한테 해꼬지는 안 혀. 한번 신명났다 치면 “면민 여러분 신나는 사까스가 왔응께, 저녁 일찍 해잡수고, 총각은 츠녀 손 잡고, 홀애비 과부 손 잡고, 누동 날맹이로 모여주셨으면 쓰겄읍니다” 어쩌구 하는 숭내도 잘내고 허드만.” 시 ‘안면도·넷’ 중.

‘술만 없으면 골샌님’ ‘안면도서 소문난 상일꾼’ ‘갓 심은 모 아픈 자식 돌보듯 논빼미 다니는’ ‘신통허게 사람 해꼬지는 안 하는’ ‘신명나면 사까스(서커스) 숭내 잘내던’ 이가 한 명 있었다. 

“윤중호가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안면도에 있는 누동학원(야학 성격을 띤 일종의 재건학교. 학비가 없어 중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왔다)에 갔거든요. 그 친구 꿈이 원래 교사였으니까(교사가 된 저를 참 부러워했죠), 저도 몇 번 가서 봤는데 행복해 하더라고요. 급료도 없고 숙식도 곤궁한데요. 어떤 날은 며칠 동안 반찬 없이 밥, 고추장, 텃밭 상추만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래도 그 마을에 비슷한 연배의 청년들, 그 동네 사람들이랑 굉장히 친하게 지내면서 즐거워하고 또 마음 아파하고… 안면도 연작시에도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오죠.” 

“(이어) 장형이 죽었어. 농약 마시구선 돼지막 옆에서 버둥대다가 죽었대능겨. 주녀리콩만헌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지. 원래 간질기가 있었다는디 그걸 비관해서 죽었다는둥, 농투산이헌티 시집오겠다는 색시가 없어 그랬다는둥(사실 몇 년 전에 여자 잡으려고 서울 구로동 어디서 근 일 년 공장일 하다가 내려왔다능겨), 아니고 승언리 젊은 과부랑 그렇구 그런 사이였는디 그 과부가 다른 사내랑 눈맞아 도망갔다는둥, 빚을 얻어 돼지를 샀는디 돼지값이 갑자기 지랄스럽게 되는 통에 빚 걱정 때문에 그랬다는둥, 여튼 소문은 엄청 많었지./근디 이름 밝히길 거부허지 않는, 정통한 소식통인 근영이헌티 들은 말은 그게 아니대. 장형이 하루는 이것저것 골치 아프니께 이놈의 동네를 뜨자구, 어디 가면 이만큼 못 살겠느냐구 그래서 엄니두 좋다구 해서, 논 두 마지기 팔구 밭 팔구 집은 사겠다는 사람이 읎어서 그냥 놔두구, 몇 푼 쥐구 도시로 나가기루 합의가 됐다능겨. 그런디 도시로 뜨기 하루 전날 그렇게 갑자기 죽은겨. 왜 그런지 몰러. 사실 몰를 것두 없지먼 꼭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정말.” 시 ‘안면도·넷’

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농투산이로 돼지도 키우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했던 장형은 왜 돼지막에서 버둥대다 죽었을까. 시인이 멈추지 않고 안면도 사람들을 계속해서 불러낸다.

“申哥야,/지게 하나 삼태기 하나로/산,자갈밭을 일구어/싹이 나지 않아도 자꾸/씨만 뿌려대더니/申哥 니놈, 속이 탈 땐 땅을 판다든가./늙은 엄니의 해소기침 소리도,/저녁바다 부르는/과년한 누이의 유행가 가락도/탁배기 뚝심으로/옹골차게 파제끼더니/申哥야 申哥야/녹두꽃이 폈어야.” 시 ‘안면도·여섯―申哥야 녹두꽃이 폈어야’ 중. 

녹두꽃의 꽃말은 ‘강인함’이다. 싹이 나지 않는데 계속 씨를 뿌려‘대’는, 속이 탈 땐 땅을 판‘다든’가, 늙은 엄니 과년한 누이 두고 탁배기 뚝심으로 옹골차게 파‘제끼끼’기나 한다며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시인의 마지막 부름은 ‘申哥야 申哥야/녹두꽃이 폈어야’이다. ‘뚝심으로 끝내 일어나라’는 부추김이다. 흙에 뿌리를 두고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에 대한 고개 숙임이고 불러냄이다. 이는 이후 그가 서울에서 밥벌이를 하며 우연이 알게된 ‘고급 공무원 경상도 할아버지’를 표현하는 모습과 사뭇 다른, 존경이다.

“진즉, 고급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셨다는 경상도 할아버지./입성 멀쩡한 고급 공무원 출신답게 아들 딸 모두 먹고살 만허게 여의살이 시켰고,/있는 재산 모두 쓰고 갈라나, 걱정이라면 그게 걱정이라는 그 냥반은, 태어나서 생전 츰 씨를 뿌려본다며, 텃밭 얻구 달포는 거진 매일 새벽마다 오시더니,/(중략)/하루는 나오셔서, 생각해보니 텃밭 빌린 값도 안 나오겠다고 더운디 무슨 재미로 나오겠냐구, 솎아준 열무 새끼들이 모두 버렸더라며, 애호박 하나 따 들고 담배만 피다 가시데,/고급 공무원 출신 경상도 할아버지는……” 시 ‘텃밭에서2’

1979년 11월 군 만기 제대 후 찍은 사진. 시인은 대학 복학을 미루고 1980년 3월부터 8월까지 안면도 소재 누동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사진제공=홍경화씨)

■ 무엇과도 호환될 수 없는 ‘인간성’ 

“윤 시인 마지막 시집을 보면 ‘영목에서’라는 시가 있어요. 영목이란 데가 어디냐면, 안면도의 맨 아래쪽에 있는 작은 항구에요. 거기서 조금 올라오면 누동학원이거든요. 그 친구가 생전에 여행을 떠났고, 거기가 안면도였고, 누동학원이 있었던 터라는 거겠죠. 그곳에 앉아 시를 썼다는 거겠죠. 제가 이 친구 세상 떠나고 나서 이 시를 읽었어요. 수업 마치고 쉬는 시간이었는데, 고개를 처박고 울었어요. 윤중호에게 돈으로 절대 호환되지 않고 호환돼서도 안 될 게 하나 있었어요. 사람, 흙, 그 소박한 인간성이요.”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돌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닿지 않을, 언 듯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릴운 노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시 ‘영목에서’

숭전대 대학시절 윤중호 시인과 친구들. 문학동아리 '삶의 문학' 선배였던 정인우 선배 결혼식에서 함진아비가 되었던 날이다. 왼쪽에서 두번째로 보이는 인물(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고 있는)이 윤중호 시인이다. (사진제공=조기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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