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대림선원 주지 연탁스님 인터뷰 (2)
췌장암 선고 받고 요양하기 위해 찾아온 옥천
옥천읍 삼청리 대림선원 내 한 낡은 집에서 한 달여 머물러
"7월 여름 잘 버티면 다 괜찮아질 거 같다 했는데 보름을 넘기지 못했어요"

16일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만난 연탁스님

[기획-옥천 인물발굴 윤중호(6)] "윤 시인은 주변에 사람이 많아 항상 번잡했지만 사람 자체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어요. 췌장암 진단을 받아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마땅히 조용히 정리할 곳이 필요했을 텐데, 그게 아랫녘이었죠. 영동 심천은 태어난 곳이지만 떠난 지 오래됐고 또 자리 정리(집 처분)가 이미 다 된 상태였을 테고... 옥천이지요. 그 이가 금강과 이원 구장터를 참 좋아했어요. 매년 여름휴가 때면 꼭 옥천을 찾아 내려왔는데, 요양차 내려와야 했던 그때도 한여름이었지요." (연탁스님)

"외할아버지 진작 돌아가셨구, 장녀인 우리 엄니 밑으루 한 다리 건너 졸라니 사연 많던 네 이모님들 각자 점지허신 서방님네루 떠나시구, 그 아래루 작은오삼춘 막내오삼춘은 일 쫓아서 춘천에서 대전에서 살림 차리구,/(중략)그래도 지금은 외할머니 땜에 그 터에 살지먼, 국민핵교 교장 정년이 이 념 남았다는 큰오삼춘, 외할머니만 돌아가시면 여기저기 농삿거리 모두 구미 이모부께 맽기구선 知己가 많다는 대전으루 떠서 아파트에 사실 작정이라니, 정붙일 데는 못 맨들구 정붙일 데는 자꾸 사라지구." 시 '구장터 외갓집'

정 붙이고 터 잡을 곳이 모두 사라질까 걱정하고 또 아쉬워했지만 옥천에 누이가 있었다. 어머니가 있는 이원과 가까웠고, 동생이었고 이제는 마음 가까운 스님이 계시는 곳, 돌아올 곳이 있었다. 옥천읍 삼청리 대림선원이었다.

옥천읍 삼청리에 위치한 대림선원. 윤중호 시인이 머물렀던 절 내 작은 집은 허물어지고 이제 빈 터로 남아 있다.

■ 어머니에게도 숨긴 병명

당시 연탁스님은 대림선원 살림을 맡고 있던 총무스님이었다. 어른스님 허락을 맡고 아내 홍경화씨와 상의해 윤 시인을 절 내 작은 빈집에 머무르게끔 했다. 
  
윤 시인은 대림선원에 와 있으면서도 두레와 결이 두 아이들은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이원 근처까지 왔건만 막상 어머니는 보지 않았다. 병명을 알리지도 않았다. 

"20년 전, 말없이 출가한 딸을 찾으려고 낯선 이곳을 찾아온 늙은 에미가 있었다./지독한 차멀미를 해가며, 허방 짚듯, 겨우겨우 구름 문턱을 넘었지만, 그 전날 밤 꿈에서 에미를 미리 본 딸은 행장을 꾸려, 빈 절간 새벽바람처럼 떠났다고 했다./온 삭신이 무너내린 그 늙은 에미가, 몇 달 새 말라버린 눈물이 다시 터진 것은 대웅전 앞에 핀 불두화를 보고 나서였다.//지금, 울밭에서 잎 푸른 채소를 가꾸는/어린 비구니들,/불두화 피었다." 시 '불두화―雲門寺에서'

출가한 딸을 찾으러 갔다가 '온 삭신이 무너내린' 나이 든 어머니, '허방 짚듯' 절 문턱에 들어서서 어떻게 수척해진 아들의 얼굴을 보게 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완전히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윤 시인이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고 홍경화씨에게 연락이 왔어요. 살이 빠지니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거겠거니 했는데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던 거죠. 일산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입원이 길어지니까 어머니도 한번 병원에 들렸어요. 그때 몰라보게 살이 빠진 걸 보셨죠. 그런데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더라고요. 어머니께는 윤 시인 떠나고 나중에 들었어요. 병원에서 아들 얼굴을 보고 당신 느낌에 '아, 이거 무슨 일이 있구나, 뭐가 잘못 됐구나' 생각이 들었다고요. 그런데 자식들이 묵묵히 있으니, '너네가 나한테 말 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하면 그래, 하지 말아라' 하신 거지요. 자식도 부모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冬安居 중인 겨울 산길에 헛디뎌 미끄러지며/스님딸이 머무는 절집을 떠나/마을로 내려가는 일흔 살 노인, 우리 어머니." 시 '겨울비'

어머니가 대림선원을 찾아온 건 아주 나중의 일이다. 아들이 머무는 낡은 집 툇마루에 멀찌감치 앉아 그 야윈 얼굴만 멀찍이서 바라보고 갔다. 아내 홍경화씨는 '나였다면 진작에 끌어안고 울었을 텐데요. 그냥 가시더라고요. 보기만 해도 아들의 마음을 안 거지요. 마음 아픈 것은 제 안에 끌어안고, 그 아들에 그 어머니에요, 정말'이라고 말했다. 

"윤 시인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매일 달력을 보고 날짜를 세고 있던 게 기억이 나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더운 여름만 넘기면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7월 한달만 넘기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요. 그런데 7월 보름을 넘기지 못했죠."

7월 보름 큰 기도회가 있던 때였다. 기도하고 있는데 홍경화씨에게 전화가 왔다. 옥천성모병원에 복수를 빼러 왔는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거였다. 성모병원에 잠깐 입원했다가 다시 일산병원으로 옮겨졌다. 홍경화씨와 함께 응급차를 타고 일산병원에 갔다. 하루를 있었고, 절을 오래 비울 수 없어 다시 옥천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다. 윤중호씨가 스님과 통화하고 싶어한다고 홍경화씨가 말했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윤 시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오남?"  

"절에 일 보고, 어서 올라갈게요." 

다음날 새벽 바로 쇼크가 왔다. 부랴부랴 올라가보니 가족들이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화왔을 때 바로 올라갔으면 좋았을 걸요. 그건 지금도 후회해요. 의식 있었을 때 보고 싶어할 때 옆에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을요..." 

15년 전 윤 시인이 있었을 당시와 달라지지 않은 것은 절 입구에 있는 탱자나무 한 그루다.

■ 시인이 남기고 간 것들

"이야기가 너무 쓸쓸해졌네요. 그런데 마냥 슬픈 기억이 아녜요. 이번 추석 때도 홍경화씨랑 두레와 결이가 대림선원에 찾아왔어요. 대전에 있는 막내 광호네도 도의랑 제원이를 데리고 함께 왔죠. 두레와 결이, 도의랑 제원이가 나이가 엇비슷한데 여기 오면 넷이 꼭 '일번!' '이번!' '삼번!' '사번!' 하고 차례로 덥썩 안겨와요. 스님이라고 부르라 해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꼭 고모라고 부르죠. 그리고 둘러앉아 윤 시인 이야기를 하고 두런두런 나누고 웃고 떠드는 거예요. '그때 큰아빠가...' '그때 아빠가...' 하면서요(웃음). 추석마다 시끌시끌해요."  

가족을 두고 떠났던 시인의 아버지를 기억하시는지. 시인의 어린시절에 아버지는 부재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인 또한 그의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부재'를 되물림 했으니 '그 팔자 참 사납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모두 같지 않다. 시인은 당신의 결핍을 사람을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메웠다. 그 물결이 넘치고 흘러 그의 아이들에게도 닿았다. 다음 이야기는 윤 시인의 생전에 첫째 아들인 두레가 윤 시인에게 전한 이야기다.

""우리 아빠 팔자 참 조오타." "뭐가 좋아?" "아빠 팔자가요." "팔자가 뭔데?" "에이, 아빠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럼," "팔자는요, 인생이예요, 인생." "인생? 인생은 또 뭔데?" "그러니까 팔자는요, 인생이 아니라, 저기,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재미있게 사느냐 못사느냐 타고난 것이예요." "누가 그런 게 팔자라고 그러디?" "텔레비전에 나오잖아요. 저 사람은 무슨 팔자를 타고 나서 잘 사느니, 내 팔자도 남부럽지 않다고 하고, 또 팔자 고친다고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거 보고 네가 생각한 거냐?" "그럼요." "그런데 아빠 팔자가 왜 좋아?" "양손에 자식들 팔베개하고서 옛날 얘기 해주니까 얼마나 팔자가 좋아요." "그럼 아빠 팔자가 좋은 거야?" "그럼요. 아마 한성아파트에서 제일 좋을 거예요."" 동화 '두레는 지각대장/두레의 '팔자' 이야기' 중

두레 유치원 요리교실이 열렸을 때 학부모로 참석한 윤중호 시인의 모습. 가슴에는 '윤두레 아버지'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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