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문학관, 책마을해리… 시인 로컬리티 정신 살려낸 사례들
이원에서도 소규모 도시재생사업 통해 구현해볼 만하다

 

고창 해리면 책마을해리에 있는 시인의 책들. ‘감꽃마을 아이들’은 감나무가 있는 시골마을의 일년살이를 그려낸 시인의 그림 동화책이다.

기획-옥천 인물발굴 윤중호(13)]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나면 어머니가 계시는 이원에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작게 텃밭을 가꾸고, 주민들과 어울려 흥 넘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윤중호 시인은 종종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인이 작고한 이제 그가 옥천에 돌아올 방법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의 삶과 작품은 여전히 지역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옥천신문이 제안하는 시인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임우기 문학평론가는 윤중호 시인을 백석·김수영·신동엽·김구용과 같은 시인들에 비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윤중호 시인과 이 시인들의 공통점은 어떤 유명 문학 이론이나 책이 아닌 ‘자기 안’에서 시를 발견했다는 겁니다. 평생에 그리워한 고향 풍경과 그가 나고 자란 곳의 사람 이야기, 당연하게도 체화된 사투리가 시인의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시집 제목이 ‘고향 길’이고, 대표작이라고 꼽히는 시가 이원면에 계시는 어머니를 묘사한 ‘시(詩)’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줍니다.

시인이 가진 자산의 핵심이 그가 뿌리를 내린 곳, ‘로컬리티(지역성)’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인의 작품은 물론 시인의 정신까지 지역이 시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충청도여도 좋고 전라도여도 좋았습니다. 시인의 정신에 동의한 사람들은 ‘지역’으로 돌아갔습니다. 윤 시인의 절친한 지인이었던 양문규 시인은 고향 영동에서 지역 문인들과 군과 오랜 기간 논의해 영동 출신 문인들을 기리는 ‘영동문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제자였던 이대건 출판기획자는 고향 전북 고창에 돌아가 폐교를 이용, 3천평 부지에 ‘책마을해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역사와 주민들의 삶을 책으로 만들어 기록합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로컬리티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옥천은 어떤가요. 영동처럼 시인의 작품을 모아볼까요, 고창처럼 지역주민과 한바탕 놀아볼까요. 옥천은 시인의 작품과 정신 모두 활용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취재과정에서 두 가지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시인을 기릴 만한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고창 책마을해리에 있는 시인의 유품을 옥천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고(시인의 유품은 충청도, 특히 옥천에 있을 때 의미가 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실제로 최근 이원면에서 ‘소규모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면서 시인과 관련한 공간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진행해볼 수 있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 영동문학관 ‘문학으로 지역 정신을 기록·전시하다’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영동문학관. 기존에 있던 향토민속자료전시관 건물을 이용해 만들었다. 리모델링 및 문학관에 들어갈 영동 문인들을 선정하는 과정에 있다. (사진제공:영동문학관 운영위원회)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영동문학관. 기존에 있던 향토민속자료전시관 건물을 이용해 만들었다. 리모델링 및 문학관에 들어갈 영동 문인들을 선정하는 과정에 있다.  (사진제공:영동문학관 운영위원회)

양문규 시인을 비롯해 영동지역 문인들이 ‘영동문학관’의 필요성을 처음 이야기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부지를 어디에 마련하며 건물 짓는 데 예산을 얼마나 투입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논의는 멈추지 않았다. 영동군은 지난해 10월 ‘영동문학관 설치 및 운영 조례’를 제정했다.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을 영동문학관으로 바꿔 재개관하기로 결정했다. 건축면적 163평·연면적 450평 3층 규모 건물을 리모델링한다. 이전 ‘영동문학관 추진위원회’는 ‘영동문학관 운영위원회’가 되어 영동 출신 문인을 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할 예정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논의 진척이 쉽지 않지만 윤중호 시인을 비롯해 고 원·김석환·박용삼·권구현·구석봉·이영순·박명용 등 대표 문인 8명가량을 발굴했다. 내년 세미나를 열어 각 문인들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하고 기념할 문인들을 선정할 예정이다.

영동문학관 논의의 핵심은 ‘언제가 지역이 통폐합 되더라도 지역의 이야기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식에 있다. 사회 경제적 부가 중앙으로 쏠리는 상황에서 농민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농촌 인구에는 빨간불이 들어왔고 이는 곧 통폐합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지역의 이야기’는 뺏어갈 수 있는 있는 개념의 것이 아니잖아요. 문학관이 만들어진다면 지역 역사와 문화를 저장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되어줄 겁니다.  윤중호 시인이 그랬듯 의미를 잃지 않고 끌어모으는 거예요.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저도 조사하면서 ‘아, 영동에 이런 좋은 작가도 있었구나, 영동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작품)가 있구나’ 싶은 것들이 있어요.” (영동문학관 운영위원회 양문규 위원장)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논의는 지역사를 이어가는 씨앗이 되려고 하고 있다. 추후 문학관에서 수집하는 자료는 선정 문인들의 원고나 유품뿐 아니다. 영동과 관련한 소설·에세이·시·노래·그림 등 문학이 토대가 되어 만들어진 작품들이 모두 모일 예정이다. 

■ 고창 책마을해리 ‘자라나는 세대와 함께 지역 역사·문화를 기록하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 책마을해리 전경. 폐교한 나성분교를 도서관 및 지역문화복합공간으로 으로 개조했다. 용지만 3천평이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 책마을해리 전경. 폐교한 나성분교를 도서관 및 지역문화복합공간으로 으로 개조했다. 용지만 3천평이다.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 책마을해리 전경. 폐교한 나성분교를 도서관 및 지역문화복합공간으로 으로 개조했다. 용지만 3천평이다. 사진은 책마을해리 버들눈도서관. 책마을해리의 시작이기도 한 공간.
책마을해리를 운영하는 이대건 촌장과 이영남 관장 부부
책마을해리 이대건 촌장

 

영동문학관이 기존 작품을 통해 지역문학사를 정립하려는 작업이라면 고창 책마을해리는 주민들과 함께 지역문학을 생산한다. 

서울에서 출판기획자로 20여년 일했던 이대건씨는 고향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고창군 해리면 소재 나성분교)가 폐교된다는 소식에 3천평 학교 부지를 매입해 2012년 ‘책마을해리’를 만들었다. 버들눈작은도서관·누리책공방·책방해리·한지활자공방·책숲시간의숲·야외공연장 등으로 이뤄진 책마을해리는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도서관이고, 청소년과 지역 어른이 만나 어울려 각종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책을 만드는 공간이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정기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마을주민들은 작가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소규모 지역공동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방법을 몰랐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윤중호 선생님이 있었던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알았어요. 내가 지닌 지역성을 감추지 않고, 계속 고스란히 품고서도 뭔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요.” (책마을해리 이대건 촌장)

책마을해리는 세 개 출판사를 운영한다. △인문학도서를 만드는 도서출판 기역 △어린이청소년 책을 펴내는 나무늘보 △그림책 펴내는 책마을해리다. 청소년과 지역 어르신들과 함께 어울려 수백권의 책을 펴냈는데, 그 중에서도 눈여겨볼 기록은 ‘청소년 자서전 함께 쓰기’ 출판캠프다. 청소년들이 자기 지역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자서전을 써주는 것인데, 기획과 인터뷰·정리·교정교열까지 캠프는 1년간 진행된다. 고창뿐 아니라 평택, 군산 지역학교 학생들도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다음은 지난해 군산 회현중학교 학생이 쓴 군산 사는 77세 라영자 어르신의 이야기다. 

“어렸을 때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았어.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비가 많이 왔는데 할아버지가 비 온다고 나를 중앙 초등학교까지 업어다 주시더라고. 그때 일곱 살이니까 찌깐했지. ‘내가 업어다줄게, 영자야. 학교 가자’ 내가 우산을 받쳐 들고 우리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가시는데, 파란 비닐우산 받고 따라서 갔지. (중략) 우리는 한 시간 수업 따악 끝나지? 나가서 팔방도 하고 돌맞히기 이것도 하고, 고무줄넘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잘했는디. 우리끼리 오자미 만들어 갖고 던지고 놀았지! 주머닐 이만하게 만들어갖고 여기에다가 저 모래나 곡식 같은 거 넣어갖고……. 지금 니들은 공 갖고 하지?” 라영자 자서전 ‘내가 업어다 줄게 학교 가자’ 중

조부모, 혹은 지역 어르신들의 이야기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점차 지역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관계망을 형성한다.

“처음 할머니를 인터뷰할 때가 생각이 난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자주 보던 우리 할머니인데 나는 왜 할머니께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았을까. (중략)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서전은 정말 중요하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그걸 기억하고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산 회현중2 조은수, ‘안부자 자서전-글을 쓰고 난 후’ 중

물론 프로그램이 단발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핵심은 지역에 청소년과 어르신들이 끊임없이 소통하고 나아가 기록생산자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데 있다. 

“흩어져 있는 지역의 가치를 연결시키고 보관하는 거예요. 서울에 기록문화센터를 만드는 데 수천억이 든다면 지역은 3~4억원이면 충분합니다. 지역에서 자라나는 세대들이 직접 듣고 경험을 공유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윤중호 선생님의 로컬리티 정신을 이어간다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책마을해리 이대건 촌장)

책마을해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과 지역주민들의 모습 (사진제공:책마을해리)
책마을해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과 지역주민들의 모습 (사진제공:책마을해리)
책마을해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소년들과 지역주민들의 모습 (사진제공:책마을해리)

■ 이원면 소규모 도시재생사업 ‘시인 기억하고 이어나갈 공간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원면에 국토부 주관 소규모 도시재생 사업이 시작된다. 사진은 이원역 전경. (옥천신문 자료사진)

옥천에서는 시인의 어머니 박유순(85,이원면 신흥리)씨가 있는 이원에 시인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마침 지난 4월 옥천군이 최대 국비 2억원이 지원되는 국토교통부 소관 소규모 도시재생 사업에 선정됐고, 옥천 사회적기업 고래실이 이원 주민들과 논의해 이원역 주변에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 마을신문·팟캐스트 등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을 꾸리고 있기 때문. 공동체 공간 일부를 이용해 시인의 작품과 유품을 전시하고 이와 관련한 주민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사회적기업 고래실을 비롯해 이원면주민발전위원회 등 주민들은 시인을 위한 공간 마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커뮤니티센터가 만들어지면 15평 규모 5개실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에 ‘윤중호 관’을 만들고 주민들과 다양한 문화프로그램들을 진행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앞으로 주민들이 센터를 운영해나갈 텐데 주민들이 협의해 이야기를 진행해볼 만합니다” (사회적기업 고래실 이범석 대표)  

“시인에 대해서는 전에 몰랐지만, 이번에 만들어지는 공간이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인 만큼 좋은 제안이 될 거 같습니다. 전문가를 초청해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활동해볼 수 있을지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원면주민발전위원회 박영웅 위원장)

“이원에 고향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지역발전협의회와 주민들과 함께 논의해보겠습니다.” (이원면 김연철 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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