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잡지 '세상의 꿈' 창간했을 당시 함께 일해
윤중호 시인 제자 이대건씨 인터뷰

전북 고창군 해리면 '책마을해리'에서 만난 이대건씨. 지난해 9월2일 촬영.
책마을해리 전경

[기획-옥천 인물발굴 윤중호(11)]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마을에 가면 초등학교를 도서관으로 개조한 '책마을해리'가 있다. 용지만 3천평인 이곳을 만든 사람은 윤중호(1956.2.5~2004.9.3) 시인의 제자 '이대건'씨다. 책마을해리를 가만 보면 시인의 흔적이 보인다. 

이대건씨가 문 닫은 폐교를 인수해 도서관으로 개조하던 시기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대건씨는 시인의 아내 홍경화씨로부터 시인이 가지고 있던 책 수백권을 전달받았다. 그는 시인의 책을 도서관 한켠에 꽂아두지 않았다. 책을 그대로 전시할 수 있는 집 한 채를 지었고, '시인의 집'이라 이름 붙였다. 시인의 집 근처에 시인의 시를 쓴 작은 시비도 만들어 2016년 여름에는 시비 제막식도 열었다.

지금 이 시기, 윤중호 시인을 기억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이대건씨가 윤 시인을 처음 만난 건 그가 서울시립대 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94년도 늦가을이다. 윤 시인은 당시 서울 합정동에 자기 사무실을 차리고 청소년잡지 '세상의 꿈' 창간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년시절 안면도에 있는 재건학교 누동학원에서 학생 이야기를 모아 학보를 내고, 나중에는 한샘출판사 청소년잡지 '우리시대'에서 일했다가, 이제는 본인이 직접 청소년잡지를 창간하려던 차였다. 마침 출판에 대해 배우고 싶었던 이대건씨가 선배의 소개로 시인의 사무실에 합류했다.

'어떻게, 일을 많이 배우셨어요?'물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대학 3~4학년 동안 사무실을 나갔는데요. 이 시기에 학교를 거의 못 나갔어요. 아주 혹사당했거든요'말하는데, 어쩐지 입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재밌었어요. 재밌었으니까 계속 있었죠'하고 웃는다. 

"당시 선생님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작가회의 회보를 만들고 이곳저곳 글을 많이 기고했어요. 청소년 잡지를 만드는 일은 돈 버는 일이 아니라 돈 드는 일이었거든요.

근데 선생님 성품상 일을 제때제때 하신 적이 없어요(웃음). 원체 느긋한 편이라... 또 사무실에 사람이 불쑥불쑥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바로 따라 나가셨거든요. 오전이고 점심 때고. 고민상담을 해주신 거예요. 저희가 하는 일은 사무실에 전화가 오면 '지금 윤 선생님 안 계신데요...' 라고 말하는 일이었어요(웃음). 저녁 6시 퇴근하고 나면 선생님 계신 술집에 찾아가 그 옆에서, 전국에서 찾아온 지인들의 걱정거리를 같이 듣고, 결국 마감 앞두고 작업하기 일쑤였죠..." 

'세상의 꿈'을 내는 일도, 사람 이야기 들어주는 일도 돈 되는 일이 아니었어요. 반대로 돈 벌어 여기에 쓰죠. 술 사고, 임금 주고 발품 팔아 글 얻어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꾸로 가는 사람이었어요, 선생님이."

책마을해리에 있는 '시인의 집'. 윤중호 시인이 생전 소장하고 있던 책을 이곳에 모아뒀다.
책마을해리에 지어진 '시인의 집' 내부 모습. 시인이 생전에 소장하고 있던 책을 모아 이곳에 전시했다.

 ■ 윤중호의 꿈, 청소년잡지 '세상의 꿈' 창간

"우리가 김종철 슨상님께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쫑코'만을 먹은 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밥자리에서 그리고 강의실에서 우리는 사람살이의 맥과 글의 맥이 다르지 않음을 배웠고 그래서 유명하진 않지만 자신과 전체가 처한 환경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숱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보는 법을, 그렇게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법을 배웠다."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 중

청소년 시기 시인은 '선생'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다. 어린시절 좋은 선생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 배움으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거나 겸손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알았다. 1980년 안면도 누동학원에서 학생들을 위한 학보를 내고 1985년 한샘출판사에서 낸 청소년잡지 '우리시대'의 편집장을 지내고 1996년 10여년이 훌쩍 지난 후에는 기어이 직접 청소년잡지를 창간까지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집에서 처자식 굶기는 놈이 술추렴하면 일등으로 손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꿈>이란 잡지를 내겠다고 마음 먹은 제가 꼭 그 꼴입니다. (중략) 어느 선배님이 '그래도 하필 네가 내려고 그러냐' 그러시길래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거든요' 그랬더니 한숨을 푹 쉬셨습니다. 말하자면 잡지를 배워서 꼭 청소년잡지를 내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그 고질병이 도진 것이지요. 사정이 되면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원래 사정 그 사정, 백날이 가도 노상 그 사정이어서 더 늦기 전에 일을 저질렀습니다." 청소년잡지 '세상의 꿈' 창간호, '처음 책을 펴내며' 중

안 되려고 하면 안 될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막상 하겠다 마음 먹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이유는 없다.

"그런데 지금 잡지를 다시 봐보면 '세상의 꿈'은 '윤중호의 꿈'이 아니었나...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거든요. 말콤X나, 진보지식인들이 쓴 교육에 대한 단상, 대안학교를 취재하는 등...(웃음)" 

창간호에 실린 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우병과 폭력의 논리(김종철) △문허진 城터(김성동) △우리의 모습을 찾아-장승(윤평·한상균) △진정한 영웅(막심 고리끼 자서전 中) △몽고군을 물리치고 지배계층의 폭압에 분연히 일어섰던 승려 우본(변동명·문병성) △정과 한의 시인 송강 정철(신경림)!

물론 심각한 글만 있었던 게 아니다. 잘 찾아보면 제법 재밌는 글도 많다. 다음 글의 제목은 윤재철 시인의 "'그냥 새'에 대한 몇가지 생각"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호반새를 가리키며 호반새예요 하고는 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래. 음, 그냥 새래. 나는 또 뭐라구. 그러면서 그들은 바로 지나쳐 가기도 하고 또 한 둘은 잠깐이지만 함께 호반새를 지켜보다가 그 새 참 이쁘네 하고는 싱겁다는 듯이 가버렸다. 그렇게 몇 사람이 기웃거리다가 가고 이윽고 호반새도 날아 갔다. 그 동안에 나는 괜히 쑥스러워져서 나도 그 자리를 떠날까 했지만 그 광경이 놓치기 아까워 계속 지켜 서 있었다. (중략) 호반새라고 일러 주었으면 호반새라고 부르면 어때서 '그냥 새'라고 굳이 바꾸어 부를 건 뭐람. 내심 섭섭했지만 그 이름을 외우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산을 찾는 것조차 건강을 앞세우고 자신에게 소용이 없으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에 허투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야박한 인심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지 않는가. (중략)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에게 가치가 있건 없건 사람이 알건 모르건 그 모두가 제 나름의 몫으로 제 나름의 구실을 다해가며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따는 것이고 그러한 실감이 내게는 소중한 것이다."

학생들이 직접 쓴 글이나 또 교사가 쓴 글도 있다. 한 글의 제목은 '우리 남자애들은 기가 팍 죽고 말았다 -평마 남고생들 성빈여사 여고생들과 역사적인 미팅-'이었다. 평마(평화의 마을)과 성빈여사는 각각 대전과 광주에 있는 아동복지시설이다. 애틋하기도 하고 독자들 입가에 웃음이 비죽비죽 나올 법한 글들을 찾아 꼼꼼히 실었다.

하지만 '세상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격월간으로 창간됐다가 그마저도 드문드문 나오다 결국 7호에서 출간이 중지됐다. 1997년 12월이었다.

"나름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합정동에 한 건물 2층 사무실에서 3층에 있는 좀 더 큰 사무실로, 땅값이 제법 비싸던 종로로 이전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 IMF가 터진거예요. 결국 폐간했지요. 사무실도 합정동 반지하로 옮겨갔고요." 

■ 개인·자본의 시대에 만난 '책마을해리'

이대건씨는 2001년 폐교한 나성초등학교를 마을도서관으로 바꿔놨다. 책마을해리는 크게 △도서관 △공방 △북스테이로 나뉜다. 소장한 책은 15만권을 웃돌고, 마을사람들이 언제든 이용할 수 있게끔 개방돼 있다. 마을 어르신의 삶을 책으로 엮어내고, 청소년들과 함께 다양한 책자를 기획하기도 한다.

"제게도 여러 스승이 있다면 윤중호 시인도 그 중 한 명이에요. 선생님한테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약자·주변부의 것들 따뜻하게, 겸손하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어요." 

공동체보다는 개인, 금권만능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 윤중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의 꿈' 제6호에 시인이 쓴 '책머리에 드리는 글'을 여기 싣는다.

"우리 사회에 믿고 따를 큰 스승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큰 스승이 되십시오. (중략) 앞으로 여러분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청소년들이 또 그런 상황에서 살게 하지 않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그런 추악한 이 사회의 뻔뻔스런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하여, 여러분들은 풀 한포기의 생명도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요즘 청소년들이 '건강하다'고 하든지 아니면 '끝났다'고 하든지, 그건 단순히 어른들의 평일 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보기에 어떻습니까? 건강한 생명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습니까?" (1997년 7월25일 발행)

'버들눈도서관'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책마을해리 전경
책마을해리의 핵심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버들눈도서관'의 내부 모습. 어린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다.
윤중호 시인의 동화 '감꽃마을 아이들'
윤중호 시인의 시비. 시비는 히말라야시다 나무로 만들었다. 시비에는 시인의 시 '시레기'가 쓰였다.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찬바람 물기 죄다 지우고/배배 말라 가면서/그저, 한겨울/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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