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는 어머니의 고향 이원
아버지와의 갈등 속,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다

옥천이 꼭 기억해야 할 시인 한 명을 소개한다. 윤중호(1956.2.5~2004.9.3) 시인이다. 윤중호 시인의 스승이자 녹색평론을 발행한 김종철 발행인은 그의 시집을 두고 '한국 현대시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드물게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크게 보면 백석의 <사슴>이나 신경림의 <농무>'에 비할 수 있고 '어떤 점에서는 그 시집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옥천 문학사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시인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는 옥천과 어떤 인연이 있을까.  윤중호 시인이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은 영동군 심천면 심천리다. 그런데 당시 대학(충남대)까지 나오고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윤희만)가 대전에 새 살림을 차리면서 어머니 박유순씨는 큰 상처를 받았다.  맏아들 중호 등 세 남매를 데리고 대전서 잠시 살다가 첫째와 둘째를 아버지 집에 두고,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막내(윤광호)만 데리고 당신의 고향인 이원(이원면 현리)으로 돌아간다. 옥천은 시인에게 그가 사랑하고, 연민하는 어머니의 풍경으로 오롯이 스며든다. 가족 중 누구도 남지 않은 영동과 도저히 마음을 붙일 수 없었던 대전에 비해, 이원은 시인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후 모든 학업을 마치고 서울에서 직장을 찾기 전까지 그의 정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마음의 고향'이 된다. 어머니는 곧 고향 그 자체였다. 

윤중호 시인의 시와 그의 일기, 또 13일 실제로 그의 어머니인 박유순씨를 만나 윤중호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도 그의 족적을 찾아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볼 예정이다. 오늘은 어머니 박유순(85,이원면 신흥리)씨의 이야기로 그의 고향길을 자박자박 걸어가보자.

생전 환하게 웃는 윤중호 시인. <사진제공=인터넷 다음카페 '윤중호를 사랑하는 모임'>

■ '사람을 뿌리까지 미워할 순 없겠구나'

“20년 전, 무서운 아버지를 피해/저녁차를 타고, 외가에 사시던 엄니한테/도망쳤던 날 밤/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며/엄니는 우셨다./외할머님이 쫓아나와 말렸지만, 엄니는/맨손으로 땅바닥을 치며 우셨다./별이 아득하게 보이던 밤을 뜬눈으로 지새고, 나는/다음날 새벽기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공부해서 성공해야 한다고/눈물바램으로 쥐어주시던 천 원은/오랫동안 내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채 있었다.” 시 ‘새벽기차를 타며’ 중

중학교 때였다. 중호씨는 ‘장남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공부를 마치겠다. 공부를 모두 마칠 때까지 어머니에게 도망가지 않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결국 어겼다. 자신의 생일날 집에서 있었던 다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새벽기차를 타고 이원으로 갔다.

"중호가 좀 고지식한 편이었어요. 도통 아버지나 그 여자에게나 정을 못 붙였어요. 반발하고, 결국 이원 집으로 왔죠. 그 아이를 꼭 품에 안고 동네 학교에 보내 곁에 두고 싶은 맘이 저한테도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그 때는 큰 도시에서 공부해야 대학도 갈 수 있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회초리 때리며 쫓아내듯 다시 기차 태워 보냈지요." (박유순씨)

13일 이원면 신흥리 집에서 윤중호씨의 어머니 박유순씨를 만났다. 아들 중호씨와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박유순씨.

당시 아버지와 중호씨의 갈등은 심각했다. 어머니 박유순씨와 중호씨, 그리고 두 동생이 막 대전에 정착했을 때 아버지는 그 집에 찾아와 난장판을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가출은 당연히 도달하게 된 수순이었다. 차라리 서울에 가서 중국집 배달원 노릇이나 하자고 생각하면서 목재소집 아들 준우라는 친구와 의기투합해 가출을 한다. 하지만 얼마가 가지 못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눈빛이 안 좋아 보이는 청년들에게 약간 챙겨 나온 돈을 모두 뺏겼다.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아저씨를 따라갔는데 아무래도 그 아저씨는 한패거리였던 것 같다. 중국집에 묶였고, 두 손이 퉁퉁 붓도록 설거지를 해야 했다. 결국 눈치를 보다 도망쳤다. 친구와 서로에게 들키지 않도록 훌쩍이며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중호씨는 대전역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예상하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의 첫 가출은 끝났다. 무모하고 황당하게 이루어졌던 첫가출에서 배운 것은 “서울은 엔간해서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 그것은 대전역에 내리자마자 무작위로 얻어맞을 줄 알았던 내가 대전역 앞에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저녁의 노을빛에 반사되어 잠시 반짝이던 아버지의 눈물 한방울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있어서 소중하고 기이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 어쨌든 아버지의 그 눈물은 누구도 미워할 수는 있지만 뿌리째 저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준 것 같다.” 일기 '가출과 출가의 변' 중.

극에 달했던 아버지와의 갈등이 조금은 잠잠해졌을까. 하지만 중호씨의 삶에서 풀어질래야 풀어질 수 없는 서글픈 모습은, 이원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13일 이원면 신흥리 집에서 윤중호씨의 어머니 박유순씨를 만났다. 아들 중호씨의 책 '돌그물'을 안고 있는 박유순씨.

“외갓집이 있는 구 장터에서 오 리쯤 떨어진 九美집 행랑채에서 어린 아우와 접방살이를 하시던 엄니가, 아플 틈도 없이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이 다 해지게 걸어다녔다는 그 막막한 행상길./입술이 바짝 탄 하루가 터덜터덜 돌아와 잠드는 낮은 집 지붕에는 어정스럽게도 수세미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강 안개 뒹구는 이른 봄 새벽부터, 그림자도 길도 얼어버린 겨울 그믐 밤까지, 끝없이 내빼는 신작로를, 무슨 신명으로 질수심이 걸어서, 이제는 겨울바람에, 홀로 센 머리를 날리는 우리 엄니의 모진 세월.//덧없어, 참 덧없어서 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친 행상길.” 시 ‘시(詩)’ 

‘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친’ 행상길을 여든다섯 어머니도 기억한다. 막내 광호를 그의 손으로 키워야 했고 이원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중호에게 돈 몇 푼이라도 손에 쥐어주고 싶었으니까, 박유순씨는 밥벌이로 아모레 화장품 외판원을 선택했다. 삼십년을 매일같이 개심리와 의평리, 수묵리까지 안 간 곳이 없다. 버스를 타고서도 가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걸어서도 다녔다.

“이원에 2~300곳도 넘는 집을 다녔을 거예요. 잠깐 앉아 이런 저런 집안 이야기도 나누고. 어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정말 열심히 쏘다녔어요.” (박유순씨)

해가 발갛게 떨어지는 저녁마다, 이제나 저제나 우리 어머니가 집에 잘 들어가셨을까. 이원의 풍경이 윤중호 시인에게 곧 어머니였고, 어쩔 수 없는 서글픔이었고, 마음의 고향이었다.

박유순씨가 가지고 있는 아들과의 사진. 광호씨의 졸업식날 윤중호 시인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윤중호 시인이 세상을 뜬 지 15년, 사진에는 이제 먼지가 앉아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