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이백리에 3년 전 귀촌한 김채운 씨
지난해 10월 네 번째 시집 ‘고(告)’ 펴내
세월호 추모제 등 현장 발언 시집에 묶어
서정시 쓰다 현장시에 침잠한 까닭

우연한 만남이었다. 지난해 6월쯤이었나.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 열린 김성장 시인의 손글씨전 개막 행사 때였다. 짙은 파란색 원피스에 밀짚모자. 단정한 복장에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온화한 인상. 방문객들 사이에 그는 조용히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소곳해 보였다. 옥천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김성장 시인을 보러 타지서 온 지인으로 짐작했다. 당시 현장 분위기를 담아내고자 인터뷰 차 말을 붙였다.

10여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행사 때 김성장 시인과 인연이 닿아 전시장에 왔다고 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자기 생각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게 남들과 좀 달랐다.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이력이 독특했다. 대전작가회의 소속 문예창작위원장 직을 맡았다. 그런데 사는 데는 옥천이다. 군북면 이백리 주소 옆에 괄호 열고 ‘하얀집’이라 적혀 있었다.

신문에 김성장 시인의 전시 소개하는 기사가 올라왔다고 그에게 문자로 알렸다. 당시 폭우가 내리던 나날이었다. 날이 밝아지면 인사하겠다고 말을 건넨 뒤 그를 잠시 잊고 살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무더운 여름이 지나 가을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일터에 소포가 날아왔다. 포장을 뜯어보니 웬 시집이 보였다. 지난해 10월 김채운(55, 군북면 이백리) 시인이 펴낸 현장시집 <고(告)>였다. 내 명함에 나온 주소로 보낸 것이었다.

김채운 시인이 쓴 네 권의 시집. 출시일 순으로 (오른쪽부터) 시집 '활어' '너머' '채운' '고(告)'.
김채운 시인이 쓴 네 권의 시집. 출시일 순으로 (오른쪽부터) 시집 '활어' '너머' '채운' '고(告)'.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시인은 불행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신의 시세계에만 골몰한다면 무기력한 겁쟁이 작가일 수밖에 없다. 여하튼 시인은 언어로써 자기를 대변하는 족속이다. 그것은 속말이 아니라 외침이며 다소 거칠지라도 부끄러움을 걷어낼 살아 있는 말이어야 한다. 기실 현장시의 미덕은 시어가 시인의 입을 벗어나는 순간 홀연히 대기 속으로 흩어져 가뭇없이 사라지는 데 있다. 허나 바람과 갈대는 외칠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생기는 다 잃어 거죽만 남은 말들, 그들을 한사코 붙들어 집 한 채 지어 준다.’

시집 맨 앞장에 있는 ‘시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용은 기실 시(詩)보다 산문이 더 가까웠다. 산문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어떤 다짐 내지는 투쟁 구호였다. 세상과 불화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평화를 되찾겠다는 시인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세월호 참사 추모제, 이태원 참사 추모제, 촛불집회, 대우조선 희망버스, 건설노조 양회동 열사 추모제, 금속노조 한광호 열사 추모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민중승리 신년하례회,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후원의밤... 선뜻 찾아가기 어려운 집회 현장에서 자기 언어로 사람들을 위무한 흔적들이었다.

■ 미사여구 덜어 현장으로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채운 이전에 사람 김채운이 궁금했다. 군북면 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차를 대놓고 그가 사는 마을로 향했다. 몇 분 걸었더니 동네 한구석에 하얀 단독주택이 보였다. 다다르자 마당에 풀어놓은 검은색 큰 강아지 두 마리가 신나게 짖어댔다. 닭장 안에는 청계와 백봉오골계 여덟 마리가 울어댄다. 너른 집 마당 벤치에 앉아 대학 강의 ‘독서와 의사소통’ 시험지를 채점하던 그가 강아지 둘을 잠시 다른 데 묶어놓고 반갑게 맞이했다.

김채운 시인이 10·29 이태원참사 100만 서명운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김채운 시인이 10·29 이태원참사 100만 서명운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군북면 이백리에 정착한 지 3년이 넘었다고 했다. 연년생 딸 둘을 독립시키고, 대전 아파트 생활을 뒤로한 채 남편과 함께 귀촌했다. 마당에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게 로망이었던 애기 아빠의 바람, 도시생활 속 층간소음의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김채운 씨의 바람이 만난 결정이었다. 여름엔 모기와 각종 벌레와 사투를 벌여야 하고, 겨울엔 집이 바람골에 자리해 추위가 보통이 아니지만 옥천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의 생애를 잠깐 들여다봤다.

“예전 시집은 안 그랬어요. 저도 잘 몰랐죠. 이렇게 저항적이고 투사적인지 모른 채 고요하게 살았는데요. 한 번 나서니까 안에 분노 같은 게 오르면서 시가 막 써지더라고요. 요즘은 현장시를 잘 안 쓰기도 하고, 90년대처럼 시의 효능감이 있던 시절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버리기는 아까워서 집회에서 발언한 말을 시집으로 묶었죠. 노동자들 앞에 미사여구 동원하고 서정적으로 읊으면 하나도 와 닿지 않아요. 현장 분위기에 맞게 그분들과 마음을 같이 하다 보니 글이 거칠어요. 진술처럼 길죠. 어떻게 보면 제가 활동할 영역이 생긴 거 같아요.”

■ 억척 어머니, 글 잘 쓰던 둘째 언니

수몰지구가 된 보은군 회남면 판장리에서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큰오빠 밑에 딸만 내리 다섯이다. 딸 중에 서열로 세 번째. 착하고 눈물 많던 아이 김혜경. 엄마가 늘 걱정하던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어렵고, 후미지고, 약한 존재들이 눈에 밟혔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시절,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옥천으로 이사했다. 어렴풋하지만 죽향초등학교에 처음 왔을 때 친구들이 신기하다는 듯 우르르 몰려왔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군북면 이백리에 귀촌한 김채운 씨가 지난해 10월에 낸 시집 '고(告)'를 들고 있다. 고(告)는 사회적 참사 뒤에 남겨진 이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시대와 세상을 향한 바람을 그의 언어로 남겼다.
군북면 이백리에 귀촌한 김채운 씨가 지난해 10월에 낸 시집 '고(告)'를 들고 있다. 고(告)는 사회적 참사 뒤에 남겨진 이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시대와 세상을 향한 바람을 그의 언어로 남겼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식구만 여덟인 가족 형편에서는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오빠는 고모댁으로, 공부 잘하던 둘째 언니는 신협 이사장이 살던 부잣집으로 입주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넷이 남는다. 엄마, 아빠까지 하면 식구가 여섯이다. 결국 엄마가 결단을 내렸다. 대출받고 집을 짓기 시작해 옥천에 2년 살고 대전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억척스럽고 강인했다. 육남매를 똑같이 학교 보내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그렇게 육남매를 다 키워냈다.

둘째 언니는 못 하는 게 없었다. 뭐든 잘했다. 언니는 육영수 여사 추모 글짓기 대회에 나가 장원을 했다. 옥천에서 1등. 언니가 상을 받아오면 아버지가 벽에 상장들을 도배하다시피 하며 자랑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언제는 백일장 대회에서 3등, 언니는 1등을 했다.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문예부에 들어갔다. 글 쓰는 건 좋았지만 남들 앞에 드러내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때 만난 선생님이 첫 스승이었다.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글을 써도 되겠구나.

“집회 현장에서 읊은 거예요. 세월호 참사 추모제 7~9주기 땐 같이 참여했고요. 예전엔 용기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나는 심약하고, 조용하고, 서정시인으로 갈 거라는 생각만 있었는데 아니었어요. 현장에 계신 분들과 함께하고 연대하니까 나한테 이런 당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내 시 세계에만 안주하는 모습이 비겁해 보였고요. 우연히 대전작가회의에서 활동하는 김희정 시인이 한번 해보라고 저를 쓱 밀어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김채운 시인이 세월호 참사 9주기 순직교사·소방관·의사자 기억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김채운 시인이 세월호 참사 9주기 순직교사·소방관·의사자 기억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 ‘아이에게 척력이 작용하고 있어’

집안에서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편한 사범대에 가길 원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 소녀 감수성이 예민한 중3 때였을 거다. 언제는 육영수 추모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했던 둘째 언니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에게 시 두 편을 가져가 보여줬다, 동생이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카시아향이 그윽한 산길을 헤쳐 가는 꽃상여 그 위에...’ 지금 생각하면 어른 시를 흉내 낸 티가 나지만 나름대로 완결성이 있었는지 인정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엔 고등학교 때 썼던 시 25편을 모아 <새벽 강가에서>라는 비공식 첫 시집도 냈다. 언니가 일일이 타자를 쳐서 대학교 제본소에 맡겨 출판했다.

그런데 대학은 유아교육과를 나왔다.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다. 방황했다. 학교생활이 엉망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대전에 천양원이라는 시설에서 보육사로 일했지만 적응하기 어려웠다. 언제는 아이를 호되게 혼낸 게 사달이 났다. 시말서까지 썼다. 2년이 최대치였다. 안 되겠다 싶어 편입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지인 소개로 만난 남편 도움이 컸다. 사윗감으로 아니라는 부모님을 설득해 만난 지 넉 달 만에 결혼한 남편 덕이었다.

혼자 연년생 두 딸을 키웠다. 독박 육아의 시작이었다. 작은아이는 밤에 잠 안 자고, 큰아이는 낮에 잠 안 잤다. 산후우울증도 겹쳤다. 계속 우는 아이를 어찌할 줄 몰랐다. 남편은 도로 공사한다고 떠돌이 생활을 오래 했다. 늘 아이에게 메여 있던 나와 달랐다. 남편은 주말마다 스킨스쿠버하고, 단체 모임에서 술 마시고, 성게 따서 가져오고. 화가 났다. 화가 나 있었다. 애기 기저귀 갈아주고, 놀아주고, 업어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점점 시들어갔다.

자택 내 작업실에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김채운 시인.
자택 내 작업실에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김채운 시인.

■ ‘사탕이 하나밖에 있어요’

‘공부 한번 해볼래?’ 지쳐있던 생활에 남편이 돌파구를 찾아줬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하겠다고 했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몰라도 정말 열심히 했다. 학자금 융자 받고 월급을 꼴아 넣으면서 모험하듯 공부했다. 석사과정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공부했다. 2년 반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두 딸과 가정에 몰입했다.

“처음엔 그랬어요. 내가 뭘 안다고. 온전히 그네들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라고 보듬어주는 느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으면 그분들은 위안을 받으시는 거예요.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도 못 치르고 저녁에 작게 판을 펼쳐놓고 추모제를 하고 계셨어요. 33일째였나. 노동자분들 만나 뵙고 시낭송을 했어요. 저녁을 챙겨 먹기 힘든 여건인데 저를 챙겨주시더라고요. 마음에 그런 게 있어요. 등한시하지 말아야겠다. 예전에 자그마하게 보이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눈이 뜨인 거겠죠.”

김채운 시인이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 공동행동에 참여해 '건설노조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김채운 시인이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 공동행동에 참여해 '건설노조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김채운 시인이 양회동 열사 추모 대전 촛불집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김채운 시인이 양회동 열사 추모 대전 촛불집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한 번 터진 둑은 걷잡을 수 없었다. 2003년부터 <큰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써 내려갔다. 2010년 계간 <시에>로 문단에 데뷔했다. 대전작가회의에 가입하고 이듬해 첫 시집 <활어>를 냈다. 쉬가 마려워 사색이 된 아이를 들쳐 안고 버스에 내려 그늘에서 해우시키던 장면(오후 두 시), 큰딸 섬진이가 주먹손을 펼쳐 ‘사탕이 하나밖에 있어요’라고 말하던 소소한 일상(하나밖에, 있어요)이 시가 됐다.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이름도 바꿨다. 아버지가 주신 이름 ‘혜경’에서 ‘채운(彩雲)’으로. 공부는 끝이 없다. 2015년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도 현대시를 공부했다. 첫 시집을 넘어서고 싶었다. 강을 건너면 타고 온 배를 태워버려야 한다. 올라간 계단도 부숴야 한다. 끊임없이 전복하고 나를 뒤집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 치열함 없이 편하게 가면 무던해진다. 나만의 색깔을 내고 싶었다. 단숨에 써 내려가는 시는 많지 않다. 끄적끄적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사전을 뒤적거렸다.

김채운 시인이 자신의 시집 앞장에 싸인을 하고 있다.
김채운 시인이 자신의 시집 앞장에 싸인을 하고 있다.

■ 어둡고 소외된 자리에 함께

시어는 시어여야 한다. 입 안에 넣고 오랫동안 녹여 먹는 사탕처럼 시맛을 살려야 한다. 남들과 다른 언어, 일상어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어를 찾아다녔다. 소외된 존재에 마음으로 다가가는 작업이었다. 시상을 잡는 데 6개월도 걸리고, 잊어버렸다가 다시 쓰기도 했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19년 두 번째 시집 <너머>를 냈다. 조금 달라지고 성장했다고 느낀 게 <너머>였다. 옥천에 오고 2021년 세 번째 시집 <채운>, 지난해에 낸 네 번째 시집 <고(告)>에 이르렀다.

“아니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내 삶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지점으로 가고 있어요. 첫 시집이 앳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른으로서 당당함이 있잖아요. 현장시는 떠오르는 대로 쓰니까 감정이 격하죠. 글을 다듬고 할 시간이 의미가 있을까요. 서정시가 그네들의 가슴에 와닿을까 싶거든요. 그럼에도 책을 내니까 부끄럽긴 해요. 시답잖은 시가 된 느낌이에요. 이제는 다른 형식의 서정시가 될 거 같아요. 현장시 안에 서정을 담고 싶어요.”

김채운 시인이 '채운詩공방' 팻말이 있는 자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채운 시인이 '채운詩공방' 팻말이 있는 자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둡고, 소외되고, 후미진 자리에 시인은 머물렀다. 단일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어느 누구와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호명했다. 그리고 기억했다. 분노와 저항의 노래, 민족·민주·노동열사의 노래, 애도와 추모의 노래, 화해와 통일 염원의 노래는 이어진다. 머지않은 봄이다.

“마음에 그런 게 있어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관심을 두고 옥천에서 시를 찾으려 해요. 옆에 이지당도 그렇고, 부소담악이나 지역적인 명소를 살려 제 언어로 풀어가는 방식으로 옥천을 새로 구성하고 싶어요. 짚어주고 싶은 점들이 있어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시 소재를 찾아 새롭게 부각하는 방식으로 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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