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동이면 석화리에 ‘서각미술관’ 개장
서각미술의 대가 현산 강민, 후학 양성에 주력
학생들이 서각미술 접하는 공간에 지원과 관심 필요

도시 사람은 농촌 글씨 못 쓴다. 농촌 사람은 도시 글 쓸 수 없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살아보니 그렇다. 매일 매일 글을 쓴다. 새벽 2~3시에 일어난다. 네이버 밴드,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그리움이었다. 여태 쓴 글들은 죄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어느 애독자는 그간 쓴 여러 시를 출력해 두꺼운 책자로 만들어 유에스비(usb)와 함께 선물로 줬다. 그가 쓴 자작시 ‘인생’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인생은 / 하얀 종이에 / 점을 하나 / 찍는 것이며 // 고요한 / 강물 위에 / 조약돌을 / 던지는 거다’

짧은 글에 삶의 통찰을 담았다. 글을 하나 쓰면 백 번 넘게 읽고 고치기를 반복한다. 언어를 조탁하고 가다듬는 지난한 과정이 스며있다. 고요한 강물 위에 조약돌을 던진다는 이 말. 도시 사람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조약돌을 던져보지 못 한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다. 강물 위에 던진 조약돌은 얼마나 나가냐, 누가 멀리 가냐, 짧게 가냐.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언젠가 강 밑으로 떨어진다. 강에 떨어지면 그 돌은 사라진다. 어려운 사자성어 다 필요 없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조약돌 하나면 충분하다.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그것도 옥천에 돌아온 게 엊그제만 같다.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염없는 그리움으로 고향 옥천에 돌아왔다. 이원면 이원리 출신, 칠남매 중 다섯째, 현산 강민(68, 동이면 석화리). 검을 현(玄), 뫼 산(山). 멀리서 보면 거뭇거뭇한 큰 산이 보일 듯 말 듯 하다는 뜻으로 호를 현산이라 지었다. 별명이 노형이, 노랭이, 오만가지 별명이 붙어 객지 생활하면서 강민이라는 이름을 썼다. 본명은 강노형이다.

이원중학교 졸업 뒤 극장통에서 일하고 상업미술에 뛰어들며 예술인의 길을 걸었던 현산 강민. 대전, 부산, 마산을 거쳐 서각미술을 창시한 그는 그리웠던 고향 옥천에 5년 전 돌아왔고, 이번에 후학 양성을 꿈꾸며 옥천 서각미술관을 개장했다.
이원중학교 졸업 뒤 극장통에서 일하고 상업미술에 뛰어들며 그림을 그려왔던 현산 강민. 대전, 부산, 마산을 거쳐 서각미술을 창시한 그는 그리웠던 고향 옥천에 5년 전 돌아왔고, 이번에 후학 양성을 꿈꾸며 옥천 서각미술관을 개장했다.

■ 고향 옥천을 예술의 고장으로 만들고 싶어

글 쓰는 걸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그는 천상 예술인이다. 옥천에서 대전, 부산, 마산, 대전, 돌고 돌아 옥천에 왔을 때 그는 서각미술 대가가 되어 돌아왔다. 서각미술, 글씨만으로도 어려운 작업을 그림까지 나무에 양각을 한다. 시를 쓰는 것도, 서각미술을 하는 것도 한통속이다. 예술로 통한다. 다 같은 예술이다. 동이면 세산리에 나무조경을 하는 일도 예술, 그래서 농장 이름이 ‘예술조경’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 대학 나온 사람이 할 수 있을까. 대학 물 먹었으면 못 했을 거다.

현산 강민, 그가 옥천 서각미술관을 지난달 15일부터 개장했다. 장소는 동이면 세산4길 11-38. 서각, 그림각, 입각, 공예각, 실용미술, 벽화, 서양화, 손글씨 등에 관심 있는 수강생이면 누구든 환영이다. 무엇이든 성심껏 알려줄 요량이다. 수업과 작업은 어느 시간이든 좋다. 재료비는 수강생이 구입해야 하지만, 수강료는 옥천군민이면 따로 받지 않는다. 고향이니까, 옥천이니까. 자세한 교수 약력은 다음카페 ‘서각미술대학(cafe.daum.net/kangmin556)’을 참조하면 된다.

지난달 15일 동이면 석화리에 개장한 서각미술체험관 전경. 벽화도 그가 직접 그렸다.
지난달 15일 동이면 석화리에 개장한 서각미술체험관 전경. 벽화도 그가 직접 그렸다.
서각미술관 내부 모습. (사진제공: 현산 강민)
서각미술관 내부 모습. (사진제공: 현산 강민)

실은 미술관을 번듯하게 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찮았다. 현재 있는 서각미술체험관은 동이면 석화리 마을 창고를 빌린 곳이라 여러 조건상 여건이 넉넉지 않았다. 바로 옆에 거주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고 싶은 바람으로 개장했다.

시설 지원이나 지역문화예술 차원에 아쉬운 점도 많고, 바라는 점도 많던 그였다. 이원묘목축제가 열리면 단골 초대 손님으로 전시회를 열어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점도 많은데, 돌아오는 보답이 적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고생고생해서 잡초처럼 커 온 노년의 예술가가 가진 마음 한구석의 한(恨) 때문일까.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일이다.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자식처럼 아끼는 작품들을 옥천에 기증하고 싶은 마음, 서각미술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마음, 옥천을 우리나라 예술의 고장으로 만들고 싶은 그의 용광로처럼 뜨거운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점이다.

2014년 3월 옥천묘목축제 때 그가 서각미술전을 열어 기념촬영을 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3월 옥천묘목축제 때 그가 서각미술전을 열어 기념촬영을 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부산 마산 대전 그리고 옥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길 좋아했다. 소질이 있었다. 이원초, 이원중 졸업하고 바로 극장판에 뛰어들었다. 집안에서는 엄청난 반대를 했다. 할아버지는 밥 빌어먹을 환쟁이 한다는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들 손자 앞길을 막을 수 있을까. 고등학교 안 가고 이 길로 쭉 걸어 들어갔다.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극장 미술부 세계에 빠졌다. 대전 극장통으로 갔다. 신도극장에서 1년, 대전시민회관에서 2년, 중앙극장에서 1년, 그렇게 꼬박 4년을 바닥에서 배우며 극장 간판을 뚝딱 만들었다. 이소룡이면 이소룡, 찰턴 헤스턴이면 찰턴 헤스턴, 못 그리는 게 없었다.

대전에서 부산으로 거취를 옮겨 부산 남포동 제일극장에서도 일했다. 그러다가 사업을 시작했다. 돈을 벌 수 있는 상업미술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어디 관공서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기록화도 그리고, 벽화도 그리고, 물불 안 가리고 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를 보는데 경상남도 중심지 마산이 보였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마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서 장장 35년을 살았다. 마산에 있으면서도 고향 옥천에 오고 싶은 마음은 옛날부터 있었다. 고향 하나만을 생각해 인맥부터 시작해 모든 걸 내려놓고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제공: 현산 강민)
그가 작업실에서 그림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제공: 현산 강민)

■ ‘전업이든 취미든 배움은 행복한 일’

35년을 살았던 마산에서 말 그대로 난다 긴다 했다. 1999년 경남서각회 발족 초대 회장을 맡아 도 단위 최초 서각전을 열 만큼 이 분야에 잔뼈가 굵던 그였다. 첫 회 개인전도 1998년 경남 마산에서 열었다. 2010년 마산에서 대전으로 거취를 옮긴 뒤 대전 용두동에 현산서각미술관도 운영했다. 2015년 그의 마지막 열 번째 개인전이 대전근현대사박물관에서 열렸다. 그 이후로 작품 활동은 이어오지 않고 있다.

그가 창시한 서각미술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지난달 차선책으로 개장한 석화리 서각미술관이 어떤 활로를 뚫을 계기가 될까. 그가 만든 서각미술교본에 ‘서각의 시작과 뿌리’라는 목차가 눈에 띈다. 그 안에는 서각미술에 관해 ‘글씨나 그림을 나무판자나 어떠한 재료에 쓰고 그려서 창칼과 끌칼로 직접 새기고, 그 위에 색을 칠하며 깨끗하게 다듬어 완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서각미술에 관심 있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보였다.

현재 있는 서각미술관을 개인 작업실로 썼을 당시 우리고장 학생들을 초대해 수업을 진행했다. (사진제공: 현산 강민)
현재 있는 서각미술관을 개인 작업실로 썼을 당시 우리고장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사진제공: 현산 강민)

‘서각미술을 배우는 문하생들 중에는 전업 작가로 가고 싶은 사람도 계실 거고, 평생을 직장에 계시다가 퇴임하여 취미로 배우시는 문하생들도 계실 것이다. 전업이든 취미든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 일생에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인생이란 평생 배우는 것이며, 배우는 것은 나를 발전시키고 나를 위해 배우는 것이기에. 인생이란 배우는 그때부터가 인생의 시작이다.’

오래전부터 우리고장 학생들이 와서 서각미술을 접하는 공간을 꿈꿨던 그였다. 내일모레 일흔이라는 나이가 되지만 고향 이원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번듯한 미술관을 짓고 싶은 꿈은 지금도 유효하다.

주소: 동이면 세산4길 11-38 (횡단보도에서 국도 직진 10m 우측)

문의 : 010-5048-0202 (현산 강민(강노형))

현산 강민 서각미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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