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낳은 사형제의 갈림길

 

유년시절 형님들과 뛰어놀던 고향마을은 그대로지만 우리 형제들의 인생은 너무나 달랐다. 모두 전쟁이 낳은 아픔이었다. 전쟁으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생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이제 형님들은 돌아가시고 나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가까이 있는 대천리 고향마을을 편히 드나들기도 어려운 몸의 형편이다. 하지만 나 혼자만이라도 고향을 지킬 수 있어 먼저 가신 형님들께 마음의 빚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유년시절 형님들과 뛰어놀던 고향마을은 그대로지만 우리 형제들의 인생은 너무나 달랐다.

■ 생이별한 형제들 
옥천읍 대천리가 고향이다. 30살까지 대천리에서 포도(캠벨) 농사와 복숭아 농사를 지었다. 5년 전 사고 나기 전까지는 몸이 성해 고향 마을을 드나들며 농사를 돌보곤 했다. 이젠 경운기 사고로 몸의 형편이 어려워져 걷기가 불편한 지경이다. 
장형은 6.25 전쟁 중에 이북으로 가셔서 소식이 없다. 둘째형님인 광규 형님은 일제 시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셨다. 남규 형님은 6.25때 전사하셔서 우리는 유공자 가족이 되었다. 이렇게 사 형제가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일본 징용 끌려갔던 형님은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오려는데 짐 보따리를 동무가 갖고 도망가면서 할 수 없이 일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쟁 후라 물자 수급이 쉽지 않았던 때 고물을 모아 팔아서 돈을 많이 모으셨다. 
우리가족은 징용 간 광규 형님이 연락이 안 되서 가슴 아팠지만 형님을 잊고 있었다. 징용으로 끌려간 형님이 살아서 고향 마을을 돌아온다는 건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잊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그 일이 일어났다. 마음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내려놓았던 형님으로부터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다. 식구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온 양 기뻐했다. 형님은 일본에 살고 있었다. 혼자 일본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 가족은 형님의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게 되었다. 형님은 재일교포로 활동하면서 살고 있었다. 형님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지만 일본에서 자리 잡은 형님이 대단했다. 징용 끌려간 후에 겨우 살아남아서 일본에 갔던 형님이다. 형님은 전쟁후의 어수선한 여건에서 고물 업을 하면서 돈을 벌게 되셨다. 형님은 꿈에도 고향을 잊지 못하셨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떠올리며 형님의 애끓었던 심정을 다시 회억해본다.

■ 정지용 / 향 수(鄕 愁) 중에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옓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돝아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형님은 고향 옥천에 호텔을 지으셨다. 옥천의 명소였던 브릴리앙스 호텔이 바로 형님이 지으신 호텔이다. 예전에는 기차로 옥천을 지나거나 옥천 초입에 들어서면 브릴리앙스 호텔이 옥천을 찾는 사람들을 반겨주었다. 지금은 옥천 관광호텔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나도 호텔 운영에 참여 하던 시절이 있었다. 형님이 칠순 잔치를 브릴리앙스 호텔에서 하면서 우리는 형님의 성공을 같이 축하했다. 

■ 이젠 하루하루가 덤이다  

53년 전 대천리에서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왔다. 대천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읍내로 이사를 나왔다. 당시에도 옥천약국이 있었고 우리 집은 양조장 있던 술도가 자리였다. 2층집 계단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젊을 땐 껑충껑충 뛰어다니던 계단을 지금은 아슬아슬한 곡예 하듯이 다닌다. 봉을 잡지 않으면 다리가 후들거려 한발도 뗄 수 없다. 
처음 이 자리로 이사 왔을 땐 동네에 2층집이 없었다. 계단을 올리고 2층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 가파른 계단이 내 인생을 대변한다. 
5년 전 경운기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천운으로 살았고 이젠 하루하루가 다 덤이다. 명절이면 6남매의 후손들이 모여 방마다 꽉 꽉 들어차 있다. 큰 딸이 60이 넘었고 시집 올 때 너무 예뻤던 아내 정 여사도 할머니가 됐으니 우리 부부도 이렇게 옛사람이 되고 있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못 되었지만 이렇게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할 때 옆에서 나를 챙겨주니 정말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다. 젊을 때 호기 부리며 아내 속도 썩혔지만 나이드니 미안한 마음만 남는다. 나이 들어야 알게 되니 그래서 옛 어른들이 남자는 늦게 철든다고 말씀하신 모양이다. 동신철물 오 영감의 철물점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장기 두던 재미를 이제는 맛 볼 수 없다. 오 영감이 작년에 이 세상 떠나는 거 보며 이제 내 차례구나 싶었다. 이젠 간간이 형님이 지으셨던 그 호텔을 보면서 형님 생각을 한다. 유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으로 생이별한 형님들을 꿈에서나 볼 수 있다면 운 좋은 날이 될 것이다.

작가 김경희
작가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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