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파란만장했지, 사는 게 전쟁이라고 푸념도 하면서 말이야!

 

■ 한국동란이란 이름의 빛바랜 사진들. 
전쟁 난리 통 천막 친 교실, 꼬질꼬질한 단발머리 소녀들이 바로 우리 유년의 모습이다. 
지금 아이들이 보면 아마 딴 세상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거다. 즈그들 할미라고 생각도 못할것이다. 젊어 보인다. 곱다는 말을 종종 듣는 지금이 오히려 더 예쁠 때다. 
부산 무주 옥천 서울 다시 옥천, 천리를 마다않고 다녔다. 내 인생의 파란만장한 행보는 거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부산태생인 나는 5학년 때였던가? 6.25가 발발해서 학교 교실 안이 순식간에 부상병으로 가득 찬 난생처음 처참한 장면을 목격했다. 부상병들이 다리에 칭칭 감은 붕대는 이미 피로 얼룩졌고 여기저기 신음소리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전쟁 통에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선생님들이 우리 학생들을 야산기슭이나 바닷가로 데리고 다니면서 바닥에 앉혀놓고 수업을 해 주셨다. 공부가 될 리 만무하지만 학교는 안 빠졌다. 그건 바로 우리가 그 시절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낸 정신이었다. 그 난리 통에 학교는 유야무야했지만 졸업장은 간신히 받았다. 

■ 저마다의 몸부림
부산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피난민들이 모두 부산으로 몰려들어 오히려 본토박이들은 피난민 등쌀에 운신이 부자유스러웠다. 개천이나 다리 밑 어디에나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끼니때가 되면 눈치를 보다가 집집마다 들어와 얻어먹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 토박이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새벽 일찍 밥을 해 먹곤 했다. 그래도 어떻게 아는지 어김없이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니 나눠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난민들도 어떻게든지 살아야 하니 그렇게 억척같이 학교도 보내고 장사도 했다. 본토박이들은 이리저리 치여 그러잖아도 힘든 살림이 더 쪼그라들게 되었다. 한 핏줄이었지만 전쟁이라는 비극 앞에서 살아내기 위한 저마다의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도 우리 삶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20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피난민으로 부산에 내려와 잠시 지내던 남편을 중매를 통해 만나보니 29살의 옥천 안남사람이었다. 우리 또래들이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인생은 그렇게 외부의 비극과는 상관없이 시간을 따라 흘러가게 된다. 남편은 피난 열차를 타고 와서 나를 만나 인생 열차 중 결혼이라는 칸에 다시 오르게 됐다. 피난 와서 나를 만났으니 참말로 천생연분은 맞다. 
 
■ 내 유년시절은 고요하지 않았다. 
아수라장의 전쟁 통을 잘 견뎌낸 건 내가 일찍이 경험했던 여섯 살의 기억 때문이다. 굽이굽이 골짜기 무주구천동 이별의 아픔을 처음 경험한 그때다. 대여섯 살밖에 안된 어린 계집아이는 엄마와 오빠를 따라 무주구천동 골짜기로 찾아 들었다. 일제 강점기 때 먹고 살길이 막막해 부모님은 나와 작은 오빠를 무주구천동 시골로 피난을 보냈다. 부산에서 무주까지 신작로가 뚫린 지금도 먼 거리지만 그 때 그 험한 발걸음은 장정이라도 힘든 거리였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저 엄마 손을 잡고 기차에 오르락내리락 걷고 또 걸었다. 진을 다 빼고 도착한 작은 집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다들 힘든 시절 서로 돕고 살아야 하니 몇 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엄마가 그리울 때 밤하늘의 별을 세어 보았다. 얼마나 깜깜하고 별이 많은지 부산의 하늘과는 사뭇 달랐다. 해방된 후 집으로 다시 돌아갔으니 유년 시절부터 험한 꼴을 많이 보았다. 부산에서 사는 것도 참 빡빡했다. 

해방은 우리한테 생명 같은 것이었다. 1주년 기념행사를 거하게 했다. 그때 처음으로 화려한 꽃전차를 구경했다. 우리도 기뻐서 꽃전차 뒤를 따르며 난 12살 늦은 나이에 국민학생이 되었다. 동생들과 공부하는 게 싫었던 차에 월반시험이 있어 통과를 하고 5학년이 되었다. 제 나이를 찾은 거 같아 좋았고 공부할 맛도 낫다. 문제는 수학. 시험도 엉망으로 보고 아버지는 역정을 내시며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오빠가 아버지의 마음을 다독여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다.
피난열차를 타고 온 남편을 만나 결혼 후에 시댁이라고 와보니 참 기가 막혔다. 시부모님과 시동생들과 같이 사는데 어찌나 가난한지 밥 그릇 하나 제대로 없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해서 우리는 큰 아들을 낳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때가 1959년이었다. 돌파구를 찾으려던 서울살이는 더 고단했다. 돈도 없고 기술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사과궤짝 하나 사고 구루마를 구해서 청계천 길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말이 장사지 낱개 담배 하나씩 사탕도 하나씩 새벽 일찍부터 우시장 가는 소장사들에게 팔았다. 밑천이 없으니 낱개 담배가 다 팔리면 가서 담배 한 갑 사와서 풀어서 팔고 사탕도 그렇게 팔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판잣집이 몇 번이나 철거를 당해 험한 꼴도 많이 보고 참 고생 많이 했다. 왕십리에서 장사를 하다가 철거를 당해 남대문으로 가서 장사를 했다. 그 가난의 터널을 우리만 지나야 한다면 지치고 힘들어서 아마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짐이었기에 딛고 일어섰다. 그건 인생의 짐이었다. 
억척같이 모아 판잣집 가게를 얻어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는 날 나는 너무 기뻐서 춤을 추었다. 아 그날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25년을 서울에서 슈퍼를 하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화장실 다녀오기도 바빴다. 간간이 굶기도 하고 그 땐 고생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가족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 인생은 ‘다 지나 가는 것’이다. 
우리는 배울 기회가 없어 어렵게 살았지만 자식들은 잘 가르치고 싶었다. 아이들이 공부 보다는 직업전선에 뛰어들 땐 아쉬움이 많았다.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는 우리 집이나 남의 집이나 똑같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아이들도 그들만의 선택을 잘했다. 잘 살고 있어서 오래전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우리 두 내외는 93년도에 고향마을 옥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남편이 떠난 지 15년이나 되었다. 영감한테 미안하지만 외로울 틈이 없이 동무들 형님들 동생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딸이 사준 예쁜 블라우스를 학교 학교 동생에게 선물했다. 동생이 “언니야 너무 예쁘다” 며 좋아라 하는 모습에 언니 노릇 한 거 같아 작은 기쁨이었다. 옥천 사람이지만 아직 부산 사투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그 천막 친 교실에서 곱하기 나누기 배우던 무명옷 입은 단발머리 권병애! 지금 옥천 안남리에서 노인이라고 대접받으며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다 지나 가는 것’이다.

박승자 작가
박승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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