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하나로마트 옆 ‘손풍금’ 운영하는 안효숙 대표
6년 전 가게 인수해 몸빼옷, 속옷, 부인복 등 판매
오일장 장돌뱅이로 화장품 판매했던 시절 만난 사람들
소설 집필 위해 3년째 문학 글쓰기 공부 모임 참여

정겨운 장날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시골의 오일장을 떠돌며 화장품을 팔았을 그가 떠오른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눈이 내리는 날씨에도, 그는 매일 새벽에 나왔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어느 귀퉁이 골목에 앉아 물건을 펼쳐놓고 손님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타고나길 상인의 기질과는 멀었다. 성정이 쾌활하지는 못한 탓에 악착같이 손님들을 붙잡지도 못했던 그 사람, 어떻게 길에서 ‘장돌뱅이’로 13년이라는 세월을 버텨냈을까.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올려다봤다. 죽고 싶을 만큼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아이엠에프(IMF)가 터져 고향 청주에서 하던 사업이 무너졌고, 거의 야반도주하다시피 대전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또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교차로를 알아보던 중 옥각리에 1년 100만원 짜리 집을 보고 그 길 따라 옥천에 들어왔다. 어느덧 20여년 전 일이 됐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있던 반지 하나 팔아 리어카를 사서 호떡 장사도 잠깐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정이 오고 가는 시끌벅적한 시골 장터 분위기 속에 그는 조용히 책을 꺼내 들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좋아하는 시집을 읽었고, 글을 썼다. 장날의 모습이 마치 풍경처럼 다가왔다고. 조그마한 수첩에 그날그날 일상을 메모했고, 인터넷에 ‘손풍금’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올렸다. 깎아달라며 큰소리로 흥정이 이뤄지는 사람 냄새 나는 장터에서 온몸으로 느낀 일상을 글로 토해냈다. 출판사 제의로 2003년 <나도 자꾸만 살고 싶다>는 첫 책을 냈다.

읍내 농협 하나로마트 옆에 자리한 속옷전문점 '손풍금'이 간판과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최근 새 단장했다.
읍내 농협 하나로마트 옆에 자리한 속옷전문점 '손풍금'이 간판과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최근 새 단장했다.

이름이 ‘손풍금’이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안효숙(62, 읍 문정리), 그는 농협 하나로마트 입구에서 좌판을 벌여놓는 떠돌이 장수였다. 오늘날 풍경처럼 파라솔을 피고 길에서 장사하는 노점상인들 사이에 그가 있었다. 장날이면 영동도 가고, 금산도 가고, 신탄진도 가고, 무주에도 갔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옥천장에도 나온 ‘장꾼’이었다. 당시 책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TV, 라디오에 출연했고 주변에서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끝 모를 장돌뱅이 생활은 6년 전에 마무리했다. 그 해에 농협 하나로마트 옆에 있는 ‘21세기 트라이 속옷할인점’을 인수했다. 가뜩이나 불경기인데 왜 가게를 차리냐며 주변에서 걱정 섞인 말들이 오고 갔지만 그때가 아니면 언제 상가를 차릴지 요원한 일이었다. 바로 앞에 노점을 했었기에 단골손님들이 그대로 오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인수하고 나서 정말이지 죽자 살자 일했다. 일요일도 안 쉬고 3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나왔다.

■ 언니 같고 엄마 같은 사람들

지난 4월 상가가 한동안 불이 꺼진 적이 있었다. 힘에 부쳐 문을 닫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옥천군 소상공인 점포환경개선사업 지원을 받아 간판과 인테리어 보수 작업이 이뤄졌다. 안에서 그는 쌓여있는 옷들 틈 사이를 분주하게 지나며 일일이 옷들을 제 자리에 진열하고 있었다. ‘속옷전문점 손풍금 부인복’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출력된 분홍색 간판이 눈에 띄었다. 상가를 열었을 때 자기보다 더 좋아했다는 손님들의 환한 미소가 괜스레 떠오른다.

속옷전문점 '손풍금'을 운영하는 안효숙 대표가 매장 안에 있는 물건들을 진열하고 있다.
속옷전문점 '손풍금'을 운영하는 안효숙 대표가 매장 안에 있는 물건들을 진열하고 있다.

“여기서 장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빚도 많고, 어려워서 살다 죽겠거니 했는데 제가 이 건물에 들어와서 장사를 한다는 건 저한테 엄청 특별한 일이에요. 초창기에 어려운 사람이 글 썼다고 TV에 조금 나왔는데요. 저희 손님들이 대개 나이 드신 분들이거든요. 누가 젊은 사람이 길에 있는 화장품 안 사잖아요. 나이 드신 분들이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많이 사가셨어요. 그래서 쉽게 일어났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알아봐 주시고, 함부로 안 해주시고요.”

도시에서 장사했으면 못 만났을 인연이었다. 언니 같고, 엄마 같은 사람들. 손님 비위도 못 맞추고 ‘맘에 드는 거 있나 함 보세요’라고 무뚝뚝하게 한 마디 툭 건네는 게 전부다. 평생 고생만 해서 그런가, 에너지가 없어서 그런가, 친절이라는 옷이 몸에 잘 안 맞았다. 오히려 불친절하다는 소리를 안 들으면 다행일지도. 비싼 옷도 아니고, 멋쟁이 옷도 안 파니 수더분한 성향의 분들이 찾아온다. 그런 분들을 손님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힘을 받곤 한다.

속옷도 팔고, 화장품도 팔고, 부인복도 팔고, 남성속옷도 팔고, 갖가지 옷이 다 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입기 편한 5천원짜리 몸빼옷(일복)도 가져온다. 마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박리다매로 운영한다. 싸게 파는데 나까지 낮출 필요가 있을까. ‘아니, 이 집은 입어보라고도 안 해.’ 가끔 따가운 말도 듣는다. 옆에 있던 손님이 ‘이 집은 원래 그래, 우리가 골라 입어야 해, 주인이 원래 그려’ 대신 설명해준다. 여기에 한 마디는 덤이다. ‘속은 안 그랴.’

안효숙 대표가 매장에 찾아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효숙 대표가 매장에 찾아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첫 에세이집을 계약한 그 건물

길거리서 화장품을 팔 때 만난 분들은 많이 돌아가셨다. 어려울 때 잘해주셨던 분들인데 물어물어 알아보면 요양원에 가셨거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다. 화장품을 노상에서 사는 일이 어디 흔할까. 화장품 판매한 지 5~6년 지났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식들이 못 사게 했다고 들었다. 화장품이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이상 있을까 봐. 그런데도 팔아주고 그랬다. 2만원, 3만원 팔던 게 몇 년 지나니 70~80만원씩 팔렸다. 고마운 분들이다, 믿어줬으니까.

많이는 못 팔아줘도 매일 지켜봤다는 사람, 오며 가며 고생 많다고 격려해 주는 사람. 다들 ‘내가 다 고맙다’는 반응이었다. ‘아이고, 요 앞에서 조그마하게 했더니 부자 됐네’ 하는 분들도 계셨다. 이 상가 건물은 장사 외적으로도 의미가 큰 곳이다. 2층에 ‘하이델베르그’라는 경양식집이 있었다. 인터넷에 한창 글 올릴 때 이 앞에서 화장품을 팔던 중 출판사에서 찾아왔다. 출판업계에서는 이런 일이 흔치 않은데 글 몇 편을 보고 바로 선지급하고 계약했다.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책을 계약하기로 했던 장소가 바로 이 건물이었다.

“실은 이 일이 좋아서 장사하지는 않아요.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거든요. 너무 아무것도 없고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는 빚을 청산하려고 장사를 했던 거죠. 이게 좋아서 하진 않아요. 적성에도 안 맞고요. 제가 여기서 버틸 수 있는 건 혼자 글 쓰고, 배우고... 그게 끈이에요, 끈.”

■ 옷장사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내 의지가 아닌 것처럼 시작한 장사 이야기에 공감한 사람들에게 위로받았다. 지금 당장 생계를 지탱하는 힘이 장사에서 나온다면, 하루하루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 나가는 힘은 글쓰기에서 나왔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2020년에 발간한 에세이집 <나도 가끔은 행복할 때가 있다>까지 이제껏 책 다섯 권을 냈는데 글의 주제는 평범한 일상이다. 아무도 모르는 객지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나날들이 글을 쓸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이제 에세이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원래 쓰고 싶은 책이 소설이었다. 3년 전 글 쓰는 친구가 소설을 잘 가르쳐주는 선생님을 소개해 소설 공부하는 모임에 들어갔다. 매장을 비우고 서울에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온라인 줌 화상회의로 만나는 친구들과 같이 공부한다. 일주일에 한 번, 장사가 끝난 여덟 시부터 열 시까지 나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준말)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졸리고 힘들어도 진지하게 몰두하며 들으면 행복하다.

젊은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니 현대적인 감성을 요구할 때가 있다.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요즘 소설 시류에 따라가야 하나 싶을 때가 있는데 솔직히 재미는 없다. 오히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옛날 책이 더 와 닿는다. 소설을 쓰면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쓰게 된다. 소설을 써봤다는 사람 눈에는 금방 보이나 보다. 선생님이 그런다. 일단 다 쏟아내라고.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일지 몰라도 장돌뱅이 십몇 년 하던 걸 회상하며 쓴다. 글 쓰는 게 제일 큰 기쁨이다.

20여년 전 고향 청주에서 대전을 거쳐 옥천에 오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은 안효숙 대표. 그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상가 바로 앞 길바닥에서 장돌뱅이 생활을 오랜 기간 하며 화장품을 판매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20여년 전 고향 청주에서 대전을 거쳐 옥천에 오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은 안효숙 대표. 그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상가 바로 앞 길바닥에서 장돌뱅이 생활을 오랜 기간 하며 화장품을 판매했던 일, 오일장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현재 소설 공부에 매진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 받은 사랑만큼 사회에 나누고 싶어요

“정말 쓰고 싶은 건 소설이에요. 뒤늦게 왜 힘들게 하느냐 그러지만 저는 대학도 안 나왔고 배운 게 짧잖아요. 내가 터질지 안 터질지는 해봐야 아는 거잖아요. 하다가 끝이 안 나올 수 있겠죠. 그렇지만 기억이 흐려지지 않는 한 공부는 계속할 생각이에요.”

새벽 6~7시에 일어나 글을 쓰는 사람, 안효숙. 내년쯤 소설 공모전에 나간다는 생각으로 모임에서 권장하는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과 외국 소설 등을 읽으며 생각과 글을 다듬어가고 있다. 중간중간 과제가 힘들어서 또는 잘 돼서 모임에 나간 사람도 꽤 되지만 그는 우직하게 소설 공부에 매진한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그의 필명이자 가게 상호인 손풍금. 손에 몸의 기운을 넣어야 음이 울리는 악기(아코디언)로서 ‘마음을 전달하자’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손풍금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송구한 마음을 같이 전했다.

“이번에 새단장 했으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해야죠. 단골손님들에게 더 잘 해주고 싶고요. 이렇게 점포환경을 바꿀 기회를 준 옥천군에도 고맙죠. 제가 옷 장사를 하면서 손님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손님들께 보다 친절하게 못 해서 그 점은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옥천에 왔을 때 너무 어려워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있었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제일 큰 도움이었어요. 아이 둘 혼자 키우고, 빚도 많고, 월세도 못 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애들도 다 성장했거든요. 제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어려웠을 때 받은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요.”

주소: 옥천읍 삼금로 23
전화: 731-7977
영업시간: 오전8시30분~오후7시
매주 일요일 휴무 (장날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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