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설시장에서 23년째 쌀튀밥 만드는 정진기 대표
30년 전 보은서 튀밥 하는 노부부 만나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6·25 겪으며 피란 생활한 유년시절
대전서 노트공장, 인쇄소 거쳐 옥천에 돌아오기까지

옥천공설시장 이전에 재래시장을 창립할 때부터 총무를 봤어. 그때가 15년 됐지. 초창기에는 여기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네 동 있었어. 칸막이 없이 열려있는 공간이었거든. 여기 들어와서 H-빔으로다가 두 동을 지은 거야. 당시에 중소기업청에서 재래시장을 전통시장으로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상인회 조직하고 승인을 받았지. 초대 회장은 강종호 씨가 맡았고, 내가 총무를 맡았어. 지금은 내려놨지만 공설시장상인회 회장으로 5년을 했어.

공설시장에서 전통과자를 한 건 23년 됐을 거여. 건물 지어지기 전부터 해서 2002년 월드컵 할 무렵부터 서서히 자리를 잡았어. 1993년 추석 무렵에 보은으로다가 쌀 튀밥을 튀러 간 적이 있어. 집이 안내니까 보은에 10분이면 가잖아. 보은에 갔더니만 노인 부부가 뻥튀기 기계를 4대 놓고 하더라고. 가만 보는데 그거 하면 괜찮겠다 싶었어. 그걸 보고서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안 가르쳐줘. 그래서 대구까지 가서 기계를 사다가 맨땅에서 시작한 거야.

그때 1톤 화물차가 있었으니까 대전 골목골목 장사할 데를 찾았어. 대전은 골목마다 아파트 단지에 장사꾼들이 들어오잖아. 하루 종일 싣고서 장터를 댕겼지. 나는 옥천보다도 대전에 아는 사람이 더 많아. 생애를 돌아보면 대전서 성장을 했기 때문에 그렇지. 어렸을 때 일제강점기도 겪고, 6·25도 겪고, 말하자면 피란 생활을 하다가 옥천까지 왔거든. 한도 끝도 없어.

옥천공설시장 '전통과자'는 튀밥 아저씨로 유명한 정진기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정 대표는 공설시장 상인회 창립 당시 총무를 맡았고, 상인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그는 오일장만 되면 변함 없이 튀밥을 만든다.
옥천공설시장 '전통과자'는 튀밥 아저씨로 유명한 정진기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정 대표는 공설시장 상인회 창립 당시 총무를 맡았고, 상인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그는 오일장만 되면 변함 없이 튀밥을 만든다.

■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고향이 연기군 부강이야. 연기군이 지금 세종시로 되어 있지. 거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땐 일제강점기 시대였거든. 우리 아버지가 일본 사람 밑에서 우체국에 일했는데 하루는 부강면사무소 직원이 ‘자네 형님이 호적을 이북으로 떼어갔다’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 형제간 우애가 있어서 그런가 거길 갔다 오신 거야. 그땐 38선이 막혀있지 않았으니까. 내 나이가 3살쯤 됐을 거야. 그렇게 큰아버지가 사는 함경남도 원산에 갔어.

그때 누님, 형님, 나, 남동생 이렇게 넷을 데리고서 공무원을 뿌리치고 갔지. 원산에 갈마반도라고 있어. 어선들이 막 들어와. 가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을 버리면 주워 오고 그랬거든. 그러다가 아버지가 어떻게 또 함경북도 해령에 있는 우체국에 들어간 거야. 이사를 간 거지.

나도 성장하고 일곱 살 되니까 철이 조금씩 들잖아. 하루는 일본 군대들이 총을 메고 행진해서 국도 따라 두만강에 가는 거야. 만주 있는 데로. 그 이튿날 되니까 소련제 지프차가 내려오더라고. 그때부터 소련 군대들이 막 내려오는 거야. 소련 사람들이 와서 하는 행동이 조선 사람은 이쪽, 일본 사람은 이쪽, 편을 딱 갈라놓는 거야. 그땐 공무원, 자본주의자, 부자, 지식인들,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그냥 다 죽였어.

아버지가 공직에 있었으니 그때부터 그냥 다 버리고 해령에서 열차 타고 청진이라는 데를 갔어. 큰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거기서 배가 언제 떠나나 기다리는데 파도가 그날 너무 셌어. 청진에서 이틀을 여관에서 지내다가 연락선을 타고 원산에 온 거야. 그때부터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어. 한탄강을 건너는데 말도 못 하지. 열차 타니까 미군들이 DDT를 몸에 뿌리는 거야. 전염병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열차 타고 용산역에 온 거야.

옥천공설시장에서 23년째 뻥튀기 장사를 하는 정진기 대표가 어렸을 때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쳤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옥천공설시장에서 23년째 뻥튀기 장사를 하는 정진기 대표가 어렸을 때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쳤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6·25 이후 친척이 사는 동대리로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부강에 있는 집도 다 팔고 북에 갔으니까. 우리 외갓집이 천안이여. 외갓집이 그때 잘 살았어. 외할아버지가 한약을 하셨거든. 천안에 와서 우리한테 논 주고 집까지 지어줘서 거기서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아버지가 이사를 하는 거야. 이제는 고향으로, 부강으로. 아버지는 가서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행정과에서 일했어. 그땐 소사라고 불렀지. 관리자지. 그렇게 부강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어.

초등학교는 천안에서 3학년까지 다니고 졸업은 부강에서 한 거야. 그런데 6·25가 터졌어. 그러면서 아버지가 또 어디로 가려고 했냐면 안내면에 친척이 있으니까 여기로 온 거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안내면 동대리. 여기 오니까 산골 아니여. 지게 지고 나무하러 댕겨, 일해, 그런 걸 하더라고. 먹는 것도 그렇고, 땅이 있어 뭐가 있어.

그래서 나는 대전에 나가고, 형님은 서울로 갔지. 대전 대흥동에 ‘동방 제책사’라는 노트공장에 들어갔어. 그때가 아마 15~16살 됐을 거야. 가니까 여공들이라고 하지. 여공이 150명 되고, 남자가 50명 되고, 그렇게 큰 공장이여. 동방 제책사에서 만든 노트가 전라도 광주, 경북 김천, 서울, 천안 쪽으로 어지간한 데는 다 보냈어. 아주 컸지. 대전에서 숙식하면서 인쇄기술을 배운 거여.

■ 노트공장, 인쇄소 그리고 일식집

나는 어디 가도 사교성이 있어서 인사를 참 잘 했어. 어디서 누가 오든 우렁차게 꾸벅꾸벅 인사 잘 했어. 거기 사장 누님의 아들이 나하고 한 동갑짜리가 있는데 그 사람을 공장장 시켜야 하잖아. 나를 공장장 시킨 거야. 그 정도로 신임을 받았어. 거기서 공장장을 하다가 나이 30에 결혼한 거여. 아는 사람이 육촌동생을 중매로 소개해줘서. 선화동침례교회에서 결혼식하고 우리 집 식구를 만나면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지.

결혼하자마자 공장을 그만두고 인쇄소를 차렸어. 대전 원동사거리에 있는 ‘예광인쇄소’를 차렸어. 대전서 인쇄소할 때만 해도 인쇄소가 많지 않았거든. 그때 직원 10명 데리고 일했으니까 잘 풀렸지. 충남에 기생충 박멸협회가 생기면서 기생충 변봉투도 보급하고, 주로 관청 쪽 일을 많이 했지. 그러다가 컬러인쇄니 뭐니 이것저것 인쇄업을 너무 벌리는 바람에 대전에서는 실패하고 말았어.

성남에 올라간 이유도 그거야. 형님이 사는 서울로 나간 거지. 숭실대 앞으로. 한진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주간한국’을 샀어. 보니까 대전만 한 도시가 경기도 광주에 생긴다는 거야. 신도시가 생기니까 얼마나 좋아. 옳지, 요거다. 이사도 안 하고서 거기에 갔어. 가서 ‘숭문당 인쇄소’라는 간판을 걸고 관청에 들어가, 학교에 들어가, 인쇄소를 열었어. 경기도 광주 대단지에서.

숭문당 인쇄소라고 하면 알아줬지. 학교에서 하는 인쇄물이 상장, 졸업장, 학급일지. 신학기 때 한 학교에 40~50만원이면 당시 엄청난 거야. 교육계획서니 뭐니 일을 못 해가지고 서울 을지로에 하청을 맡겼을 정도였어. 하루도 못 쉬었지. 동사무소 생기니까 인감증명서, 뭐 말도 못해. 그때 인쇄소만 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일식집을 또 했어. 자꾸 유혹이 들어오더라고. 내가 거기서 1년 만에 다 까먹은 거야. 일식집과 병행한 인쇄소가 있어 다행이었지.

■ 인생 역경을 버티게 한 신앙심

인쇄소 일이 관청을 상대하는 일이라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는 상대 못 할 일이었지. 카바레 같은 데 가면 술값 대줘야 하고. 우리 집 식구는 6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에 갔지만 신앙심이 대단한 사람이야. 그 사람 때문에 버틴 거거든. 그래서 아차, 성남에서는 더 이상 있지 않겠다. 내가 타락을 하겄더라고. 서울 친구들 인연 끊는다고 하고 고향에 왔어. 여기 와서 교회 생활만 잘 하겠다 해서 뭐를 했냐면 ‘동대리 수양관 기도원’이라고 세운 거여. 자본을 많이 가지고 왔으면 제대로 지었을 텐데 그러지 못 해 아쉽지.

튀밥 튀기는 거 못 봤지? 전에 옥천시니어클럽 있던 데 개울가에 천막 하나 있잖아. 이제는 장날만 해. 전에는 매일 하다시피 했는데 오일장만 해. 대전서 손님 말도 못 햐. 옥천에 튀밥 잘한다고 소문났지. ‘그 튀밥 튀기는 아저씨 어때요?’ 물어보면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알겨. 한 방을 튀더라도 영동까지 배달해주고 그랬어. 대전까지도 배달해줘. 그날 바로는 못 가지만 그 이튿날에는 가. 언제는 원동리 두 방을 튀겨서 배달하다가 과속해서 카메라에 찍혔어.

돈 보고 하는 것보다는 운동 겸 하는 거야. 손님이라는 게 그렇거든. 내가 손해 본다고 하고서 해줘야 해. 그냥도 해줘야 해. 뭐를 하다가 버렸잖아. 그 사람 곡물을 갖다가 튀밥을 튀겼는데 버리면 새것으로 튀겨줘야 해. 영동 심천 이런 데서도 오거든. 어지간하면 그 이튿날 배달하면 기름값이 얼마여. 한 달에 80만원 들더라고.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기도 하니까 그 정도 나오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언제 튀밥 튀길 때 놀러 오셔.

정진기 대표가 상가 안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진기 대표가 상가 안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소: 옥천읍 삼금로5길 5-14 공설시장 내 118호
전화: 732-9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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