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순씨는 평생 일하며 살았다,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누에를 기르고, 가마니를 짜 살림을 꾸렸다. 살림을 꾸려온 그의 일은 세상을 아우르는 넓고 푸른 몸짓이었다.

살림이란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을 말한다. 사람들은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해야 하는 빨래, 밥 짓기, 청소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안남면 청정리에 사는 이갑순(85)씨는 한 집안을 꾸리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 주름살 배긴 이마, 정성스레 봉숭아 물 들인 손톱, 안남면 어머니학교 화백으로 불릴 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이갑순씨는 그렇게 85년을 살았다. 이갑순씨의 일은 ‘집안일’이라는 작은 그릇 안에 담기에는 너무나 넓고 푸르르다. 출렁, 하고 넘쳐 마음을 메우는 이야기 보따리가 하나씩 풀린다.

■ 전쟁, 떠나간 사람에 대한 기억

이갑순씨는 군서면 동평리 굴말에서 태어나 자랐다. 길지 않은 시간 군서국민학교애 다니며 배웠던 일본어를 아직도 기억한다. 요즘 ‘기역 니은 디귿 리을’을 배우듯 ‘가기구계고’를 입으로 되뇌었다. ‘이찌니 산시 고로크 시찌 하지 큐쥬’ 일본어로 숫자를 세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우리나라 다 뺏기고, 자기네 말만 쓰라고 했지. 먹을 것도 안 남기고 다 뺏어갔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고, 먹고 살려구 쌀 숨겨놓기라도 하면 쇠꼬챙이로 막 찔러 가지고 조사 해서 다 가져가. 들키면 벌금도 때리고 사람도 때리고 그랬지. 왜놈들이 총탄 만든다고 숟갈을 다 가져가서 밥도 못 먹었어.

유관순 같은 사람이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면서 해방됐던 게 12살 때였어. 그때 이제 일본말 공부할 필요 없다고 학교를 안 댕겼어. 한국말은 안 배워도 되니까. 애들이 학교에 안 가니께 나도 안가고 집에서 심부름만 했지. 어른들 밭 매러 가면 집에서 나와도비(고무줄놀이), 자치기, 숨바꼭질 같은 거 하면서 놀고. 지금은 컴퓨터 한다고 다 모를 걸? 그땐 정말 재밌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갑순씨에게 전쟁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사남매 중 막내라고 말하다 무언가 생각난듯 말끝을 흐리는 이갑순씨는 7살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세상을 떠난 남동생을 가슴속에 묻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받았던 이상한 느낌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민군들이 아버지 땅굴 파라고 저 먼데 데려갔었어. 어덴가는 몰러. 아버지는 안 돌아가셨는데 7살 먹은 동생 하나는 죽어버렸지. 앵-하고 날아다니면서 폭격하는 비행기 소리에 놀라서 뒤져버렸어. 우리는 몰랐지. 밖에서 놀다 놀랜 걸 어떻게 알아. 놀랜 아가 말도 못 하고 그냥 숨만 빨따닥, 빨따닥 쉬는디 내가 의원을 데려왔어. 밑에 동네 가서 주전자에 막걸리 받아다 의원을 대접했지. 근데 아무리 해도 약이 들어먹어? 놀랜 약을 바로 썼으면 괜찮았을 텐데 우리는 것도 몰랐지. 폭격기가 뺑-하니까 까무라친 거여. 그래서 그냥 죽어버렸지 뭐. 일곱 살이면 컸어. 남자앤데 똑똑하고 영리했어.”

한국 전쟁 당시, 큰언니는 서울에서 아이를 낳아 살고 있었고 큰오빠는 경찰지서에 근무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오빠가 잠든 이갑순씨를 깨웠다. 느낌이 이상했다.

“전쟁 났을 때 나는 쪼만했었지. 그때 뭐를 알어. 집에서 자는데 생전 안 그러던 큰오빠가 엄마, 아빠한테 가재. 쪼만했는데도 이상해. 내 예감에. 엄마, 아빠한테 가서는 인사를 하더라고. 그때 인민군이 옥천을 지나서 내려가던 중이었거든. 인민군이 큰오빠를 데려갔던 거지. 그렇게 데려간 뒤로 소식을 몰랐어. 나중에 팔공산에서 전사했다고 유골이 왔더라고. 집 뒤에 있는 종산에 장례를 모시고 그냥 살았어. 올케는 과부가 돼 버렸으니 우리집 왔다 갔다 하다가 가버리고. 나는 작은 올케랑 살았지.”

■  스물한 살 새댁의 시집살이

스물한 살이 되니 이갑순씨 주변 여자들은 대부분 시집을 갔다. 하나둘 떠나던 즈음 이갑순씨도 중매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할 줄 아는 것 없는 어린 새댁의 시집살이는 고되었다. 

“밥 먹고 일만 했지. 집에서 좀 배워 왔으면 이겨내는데 그것도 못해서 허덕였어. 아침밥 하고 나면 샛밥(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음식)하고, 점심밥하고 나면 샛밥하고, 저녁밥하고 하루 다섯 끼 만드는 걸 매일 했지. 그것 뿐이야? 모 심을 때는 미역국 끓이고, 저녁 때는 감자 삶아주고, 풀 베어다 작두로 썰어서 이만치 큰 솥에 소죽 끓여주고 그랬지. 쌀도 많이 없어서 솥 가운데 동그랗게 뿌리고 다른 잡곡으로 채워서 밥했어. 다 처음 해보는 거니까 힘들었지. 집에서 밥을 해봤어, 빨래를 해봤어. 그때는 엄하고 무서웠어. 마실도 제대로 못 가게 하고, 베 짜고 밭 매고 밤에는 또 옷을 기워야 했어. 지금은 옷이 엄청 많잖아, 그때는 안 그랬거든. 호롱불 켜놓고 이런 소매들 다 꿰맸지.

그렇게 3년 동안 시어머니, 형제들, 동서, 시아주버이, 조카 둘 데리고 한집에서 살다가 따로 살림을 차려 살았어, 어른 밑에서 살림을 나오는겨. 그래도 호강스럽게 컸어. 집 사주고 땅도 주고 장가 간 날 낳았다는 소도 한 마리 주더라고. 그거 가지고 농사지어 벌어 먹고 살았지.”

모든 일이 처음이었던 스물한 살의 이갑순씨에게 시집살이는 말 그대로 중노동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배우고, 다른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이갑순씨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는다.

“자궁이 시원찮은가, 5개나 내뻐렸어(내다 버렸어). 그래서 무당도 찾아가고, 삼신 굿도 하고, 왜 그렇게 애가 죽는가 하고 빌었어. 옛날에는 샘이나 우물에 가서 물을 퍼와야 했는데, 남부끄러워 새벽에 물 길어다 놓고 그랬지. 삽작거리(대문 밖 가까운 길거리)도 못 나왔어.”

그렇게 긴 시간을 고개 들지 못하고 지냈다. 지금이야 여섯 남개를 길러낸 엄마가 되었으나 당시 첫 아이를 길렀을 때는 가만히 자는 모습에도 죽었나 싶어 귀를 대보았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그렇게 키워낸 아이들은 잘 자라 손녀, 손자를 안겨주었다. 이갑순씨는 손녀, 손자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제는 다 키웠지. 손녀딸이 소방서에 있고 막냇손자가 대전 유성에 있는데 맨날 1등을 한디야. 근데 너무 1등하고 잘해도 따돌림 받는디 말이야. 걱정이여”
 
■ 이갑순이 해온 일 

이갑순씨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베를 짜는 일, 가마니 짜는 일을 해 저녁 장을 보고 아이를 가르쳤다. 일을 모두 해내려면 잠을 잘 시간도 부족했다. 매일 밥을 줘야 하는 누에는 나흘을 내내 먹는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실로 자신을 감싸는 고치를 만든다. 누에는 고치 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남은 고치는 면에서 나가 판다. ‘가마니 친다’라고도 말하는 가마니는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담을 때 쓰는 포대를 말한다. 이갑순씨는 남편과 함께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서 마찬가지로 면에 나가 팔았다. 이갑순씨가 직접 할 줄은 몰랐지만, 함께 살았던 올케나 동서는 베를 짰다. 목화솜을 따다 물레방아를 돌리면 실이 나왔다. 그럼 그 실에 풀을 먹여 말린 다음 도토마리에 감았다. 도토마리란 베를 짜기 위해 날실을 감아놓는 틀을 말한다. 실이 걸리면 이갑순씨의 동서는 요롱요롱 소리와 함께 베를 짰다. 

“이런 걸 다 하자니 얼마나 바빠. 잠도 못 자. 또 여름이면 밥하느라 집이 더워져서 방에서 못 자거든. 그럼 마당에 멍석이랑 가마니 깔아놓고 누워 잤지. 그럼 밤하늘에 쫑쫑쫑 하고 떠 있는 별이 반짝반짝한 게 정말 예뻤어. 하늘에서 물 내려가듯 은하수도 보이고, 북두칠성도 보이고, 높고 파란 하늘에 바람이 불어오는 게 시원했지. 지금은 그런 하늘이 안 뵈네.”

■ 50년간 놓았던 연필을 잡다

85살 이갑순씨는 매주 화요일, 금요일 오전 안남어머니학교로 향한다. 17년을 어머니학교에 다닌 이갑순씨는 읽고, 쓰고, 알아가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다.

“처음에 어머니학교 뽑았을 때는 안 들어갔어. 근데 며느리가 어머니학교 가을 소풍에 나를 데려간 거야. 핵교도 안 나가는데 따라다니기 뭐해서 그때부터 학교를 다녔지. 예전에 야학 하러 다녔었거든. 그래서 한글을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 민망해서 한번만 가고 안 가려고 했어. 근데 학교에서 연필이랑 가방을 주네? 또 할아버지가 집에서 일하니까 가면 점심도 못 해주고 미안했는데 그냥 가라더라고. 그 뒤로 학교에 다녔어.”

어머니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갑순씨는 50년 만에 연필을 잡았다. 시집 가며 쓸 일 없었던 글씨를 다시 쓰려니 작대기 하나만 그어도 손이 떨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쓰고 싶었다. 어머니학교 수업을 마친 이갑순씨는 안남 배바우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 가서 낮잠도 자고, 책도 읽고, 글도 쓰시라’ 했단 선생님 말씀 때문이다. 그림책을 하나 골라 천천히 읽고, 마음에 드는 그림은 가지고 다니는 스케치북에 그려 넣는다. 이갑순씨의 글과 그림에는 평생 한 집안을 꾸리며 일궈온 이야기가 녹아있다. 그의 웃음만큼이나 맑고 푸르른 그림이 자꾸 더 궁금해진다. 


 내 삶도 역사의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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