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고지도에 표기된 관아건물
옥천군 고지도에 표기된 관아건물

구읍은 문화재를 비롯한 고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며 고려 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관청이 있던 곳이라 따지고 보면 한발자국 건너 한곳씩 관광보유자원이 풍부한데 지금 우리는 기존에 있는 것조차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향청리(상계리, 하계리)에 표기된 관아 건물명과 마성산 옆에 표기된 사직단, 여단, 사장록(활터) 등이 나타나 있다.

다행히 사직단은 복원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여단과 활터인 사장록도 발굴 복원하여 관광자원화 하여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사직단은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여 올리는 제사를 지내는 단을 말하며, 여단은 예전에 나라에 역병이 돌아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인 여귀에게 제를 올리는 단을 말한다.

필자는 구읍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19년도에 추노의 고을 구읍골목 해설집을 발간한 바도 있지만 관광활성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역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는 것은 더욱 돋보이게 하고 미처 발굴하지 못한 것은 새롭게 찾아내어 옥천향교와 옥주사마소 등 많은 문화재가 있는 구읍일대를 좀 더 양반(선비)의 고을로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필자가 발간한 책의 내용을 소개드리면 옥천(구읍)의 역사, 정지용생가, 육영수생가, 옥천향교, 정광제 효자문, 교동리 느티나무보호수, 교동리 비석군, 옥주사마소, 문향헌(춘추민속관),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옥천 죽향사지 3층석탑, 조선시대 옥천군 관아터 및 옥천장터(저잣거리), 구 옥천여중 교무실, 아리랑, 정구영 거주지, 옛 동성교회, 옛 군수관사, 죽향리 느티나무보호수, 일제강점기 변전실, 2005년경 도난당한 죽향리 돌사자, 옥천을 그리워했던 가수 김현식, 옥천 전통문화체험관, 옥천 구읍 벚꽃 길, 조선시대 과거제도 등을 소개한 바 있다.

지금의 상계리, 하계리는 고려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관아건물이 있던 자리임을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이 사라진 지 오래된지라 이 일대 전체가 관아건물 터였던 것을 알고 있는 옥천주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1872년(고종 9년) 발간된 고지도에 표기된 관아 건물명과 내용을 설명 드려보면
○서역청(書役廳): 관아에서 문서를 다루는 기관/세금을 부과하던 곳 ○동헌(東軒): 고을 사또, 수사 병사가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대청이나 집 ○군사(郡司): 조선시대 각 고을에 있는 호장(戶長 향리직의 우두머리)의 사무소를 이르는 말 ○외삼문(外三門): 관아 입구에 있는 3개의 문으로 보통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아래층은 문으로 사용하고 2층은 루로 되어 있다. 옥천관아의 외삼문은 관성문루이다.

○내삼문(內三門): 옥천관아 안쪽 동헌 앞에 있던 세 개의 문 ○객사(客舍): 중앙이나 지방에서 공무로 온 관리들이 숙식하던 집이며, 객사에는 전패와 궐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향망궐배) ○군고(軍庫): 관아 병사의 무기고 ○책실(冊室): 조선시대 고을의 원에 의해 사사로이 임명되어 비서 일을 맡아서 보던 사람 ○장청(將廳): 옥천관아에 딸린 장교가 직무를 처리하던 건물 ○사우(祀宇): 신주(선현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 ○내아(內衙):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내동헌(內東軒) ○읍시(邑市): 고을 관아 밖의 저잣거리 ○홍문(紅門): 홍살문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라 하며 지방 수령을 자문하던 기구 ○상창(常倉), 대동창(大同倉): 옥천 관아에 항상 보관하던 쌀 창고 ○작청(作廳): 군아에서 아전들이 일을 보는 곳 ○관고(官庫): 관아의 곳간 ○연신재(燕申齋): 잔치를 펼치던 곳 ○포수청(砲手廳): 예전에 총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머물던 곳 ○향교(鄕校): 옥천군 국립교육기관(중고등학교)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 등이 있다 ○하마비(下馬碑):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비로 문묘, 종묘, 궐문, 향교나 충신문 등의 앞에 세워 놓은 비석이다. 비문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각자되어 있다. ○사장록(射場蔍): 조선시대 활을 쏘던 장소 등이 표기되어 있다. 가까이 고지도 등고선에는 사직단, 여단이 있으며 저 멀리 증약찰방역 관아가 보이고 있기에 전통문화체험관이나 상하계리 주변에 관아건물 등이 나오는 대형 고지도판을 설치하여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에게 이곳이 과거에 관아가 있던 곳이며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옥천고을임을 홍보해 나가 역사성이 있는 고풍스러운 구읍과 주변 관광지를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미처 소개하지 못한 교동리 섯바탱이에 있는 백회가마터도 우리나라에 몇 군데 없는 아주 특이한 백회가마터이기에 주변 정비를 한 후 기존관광지 등과 연계하여 홍보해 나간다면 큰돈 들이지 않고 관광자원이 발굴되리라 보며, 또한 충청북도에서 가장먼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읍사거리 근방 만세운동 벽보를 붙였던 곳에 상징조형물을 설치하였으면 한다. 구읍사거리에 상징조형물 설치하기가 곤란하면 지용생가 앞 실개천 건너 주차장 공간을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지역 내 인적 역량 활용방안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주민들에게 우리고장의 자랑거리인 역사문화를 가르쳐 주민들을 마을홍보대사로 양성하여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끝으로 옥천군, 옥천문화원, 옥천향토사연구회, 구읍번영회 등과 협의 계획을 세워 옥천전통문화체험관 등에서 옥천의 역사에 대한 프로그램을 개설 운영하였으면 한다.

옥천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이며 관산성 전투로 백제 성왕 전사, 관산성을 비롯한 옥천읍 중심의 산성 분포도 설명,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주요교통로였기에 증약찰방역에서 대전, 보은, 영동까지 관할했던 역과 원의 위치설명, 조선시대에 들어 국난극복에 앞장선 중봉 조헌선생의 후율정사와 각신서당(이지당)에서 인재양성과 무예를 연마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차령전투 승리와 청주성 탈환 공적을 비롯한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아들 조완기, 영규대사 등이 순절한 내용, 대유학자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선생, 단종 복위운동 도모를 한 김문기선생, 근대기에 접어들어 옥천 청산 청성 증약 등지에서의 동학유적지, 정순철선생의 생애, 독립운동가 김규흥, 조동호, 전좌한 선생 생애 등과 이원장터 만세운동 비롯한 우리군의 독립만세운동 전개 상황을 다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대학교수 등 전문강사를 초빙하여 옥천군의 전반적인 향토사에 대한 폭넓은 교육을 실시하여 이야기 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알리게 되면 구읍 일원과 주변관광지가 인기 만점의 관광지로 부각되어 지역경제 발전에 시너지 효과가 창출되리라 본다. 지역주민들이 지역학(옥천학)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관광자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