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출신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 대표
우리고장 자동차 보험업계 경력 40년 이상 베테랑
고객 한 명 한 명 유치하고 보상 책임지며 신뢰 다져
인정이 살아있는 옥천서 힘닿는 데까지 현역으로 남고파

한때 자동차 소유가 꿈인 시절이 있었다. 일명 ‘마이 카(My car)’ 바람이 불어온 건 불과 몇 십년이 채 되지 않는다.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자동차 대중 소비는 급증했고, 오늘날 인구 2명 당 1명 꼴로 자가용을 보유한 모습에서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시내 도로를 활보하는 자동차 풍경이 익숙하다. 그런데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40년 전 우리고장에 자동차가 딱 아홉 대가 있던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고 자동차가 아홉 대라니!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소위 있는 집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74) 대표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보험업계에서만 40년 넘게 일한 그는 우리고장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은 최고참에 속하는 옥천사람이다. 운전자 상해보험, 화재보험, 대상책임 등 자동차 보험에 있어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 대표가 2004년 옥천신문에 실린 자신의 기사스크랩을 펼쳐 보이고 있다.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 대표가 2004년 옥천신문에 실린 자신의 기사스크랩을 펼쳐 보이고 있다.

조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차보험을 했던 ‘한국자동차보험’에서 일을 시작했다. 독점 형태로 국가에서 운영하던 한국자동차보험은 1978년 지금의 동부(DB)그룹에 팔리면서 다원화가 이뤄졌다. 당시 조 대표는 삼성화재 전신인 안국화재로 이직해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 ‘사고 없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

경주에서 일하다 안국화재 옥천대리점 개인사업체를 내고 고향에 온 게 1982년이다. 그때가 서른 중반 접어들 때다. 고향에서 일하고 싶어 돌아왔지만 사무실을 구하는 것부터 큰 숙제였다. 읍내 중앙주유소 옆 오토바이센터에서 대리점을 낸 걸 시작으로 현재 있는 사무실까지 다다랐다.

읍내 옥천농협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는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은 파란만장한 40년 역사를 거쳐 많은 이들에게 보험 혜택을 제공했다. 
읍내 옥천농협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는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은 파란만장한 40년 역사를 거쳐 많은 이들에게 보험 혜택을 제공했다. 

고향에 돌아온 해 우리나라는 9월1일부터 의무적으로 자동차, 오토바이 책임보험을 등록하게 유도했다. 그때 2년치 보험료는 9천120원. 수중에 떨어지는 수수료는 한 대당 1천원 꼴이었다. 그게 모이고 모여 한 달 월급이 초창기에 1만1천원이었다.

지금도 만나는 고객들은 최소 20년이 넘었다. 그 정도로 고객과 신뢰가 두텁다고 자부한다. 옥천교회 장로로서 출근하고 퇴근할 적에 항상 기도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고객이 오늘 기쁘고 든든한 하루 보내게 해주시고 사고 없는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보험 한 건도 없더라도 건강을 지켜주십시오.’

옥천에서 자동차보험업계에 일하는 사람이 현재 100여명이 넘는다. 처음 대리점을 열 때만 해도 옥천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사고가 나더라도 보상을 못 받던 일이 허다했다. 갖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억울한 피해가 없도록 돕고 싶었다. 뺑소니 차로 불의의 사고를 겪은 가족에게 연락이 오면 보상할 방법을 찾았다. 서류 준비부터 통장에 입금되는 날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조동천 대표가 사무실에서 보험 관련 전화를 받고 있다. 40년이 넘는 경력 때문인지 고객 목소리만 듣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안다고 그는 말한다.
조동천 대표가 사무실에서 보험 관련 전화를 받고 있다. 40년이 넘는 경력 때문인지 고객 목소리만 듣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안다고 그는 말한다.

고객 한 명 유치하려고 온몸으로 성의를 보였다. 옥천에 현대자동차만 있고, 영동에 기아자동차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기아자동차 한 대가 판매되면 영동에서 출고증을 갖고 경기도 시흥, 울산을 거쳐 청주까지 차를 끌고 가 보험 등록 절차를 밟았다. 종합보험 하나 가입시키기 위한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 몇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 공과 사 지켜

삼양초 17회, 옥천중 14회, 옥천실고 17회 졸업한 옥천 토박이다. 보험 일을 하면서 고향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커다란 보람을 얻었다. 어떨 때는 가을이 되면 쌀 한 말 갖고 사무실에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분은 강가에서 잉어 큰 거 하나 잡았다고 두고 가기도 했다. 시골은 그런 인심이 살아있다.

조 대표는 1987년 12월1일 주민의 억울하고 어려운 고정을 상담 해결했다는 공을 인정 받아 충북도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조 대표는 1987년 12월1일 주민의 억울하고 어려운 고정을 상담 해결했다는 공을 인정 받아 충북도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사무실 안에 그가 받은 각종 감사패와 공로패가 진열돼 있다.
사무실 안에 그가 받은 각종 감사패와 공로패가 진열돼 있다.

읍내 혜성식당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거기서 6년 동안 삼양초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 아버지 고향이자 할아버지 집이 있는 안내면 장계리로 이사했다. 장계리에서 자전거 타고 새벽 5~6시에 출발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등교했다. 수업 시작 1분 전 또는 10~20분 조금 늦게 도착했어도 학창시절 6년을 꼬박 개근했다.

지금은 수몰된 안내면 장계리 주막말에서 나고자랐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닌 사람이 마을마다 1~2명 뿐이었다. 못한 예로 주막마을에서 부잣집 손자였다. 할아버지 집이 기와집이라 기와집 손자라고 불렸다.

집안에서는 보험업계에 일하는 걸 반대했다. 이 업계에 있으면서 사이 좋던 친구들 몇몇은 관계가 소원해져 금세 실감했다. 어디 동창회나 모임에 가면 쌍소리를 듣곤 했다. ‘내가 너한테 보험을 들어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항시 공과 사를 지키려 노력했다. 다니는 교회에서도 보험 한다는 소리 일절 하지 않았다.

조동천 대표는 보험업계에 종사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믿고 맡겨준 고객 덕분에 지금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다.
조동천 대표는 보험업계에 종사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믿고 맡겨준 고객 덕분에 지금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다.

■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돌아온 보답은 컸다

보험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겼다. 자기 아들이 보험을 하는데도 아버지 되는 사람은 ‘너한테 보험 안 넣고 여기다 넣는다’며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아들보다 더 믿는다고 하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보통 자동차보험을 가입하고 이달 말 만기가 되면 보름 전 연락을 준다.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안부 차 연락을 드리면 간혹 안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연락이 닿으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어디 요양원에 가 계시거나, 아니면 돌아가시거나. 세월이 벌써 흘렀다는 허탈감을 느낀다.

옥천은 여전히 인정이 살아있다. 가을에 농사지어서 어떤 사람은 누런 호박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은 쌀을 찧어서 갖고 오고, 배추도 갖고 오고, 복숭아 한 박스를 가져온다. 그럴 때 깨닫는다. 아, 재산이라는 게 돈이나 물질이 다가 아니구나.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편하게 점심도 먹고 대화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청산 가면 생선국수 같이 먹자고 할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을 사귀는 게 진정한 재산이구나.

지나고 보면 정말이지 생고생을 다 했다. 보험 가입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고객 한 명, 딱 한 명 보려고 무작정 청산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청산에 자동차 한 대가 있다는 정보만 보고 달려갔다. 가서 보험 가입하라는 소리도 안 했다. 이러이러한 혜택이 있다는 설명만 하고 돌아왔다.

2004년 옥천신문에 실릴 당시에도 그는 옥천에서 삼성화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2004년 옥천신문에 실릴 당시에도 그는 옥천에서 삼성화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조 대표가 옥천서 보험 대리점을 운영했던 초기에 몰고 다녔던 자동차 '브리샤'.
조 대표가 옥천서 보험 대리점을 운영했던 초기에 몰고 다녔던 자동차 '브리샤'.
국궁을 내려놓은 지 6~7년이 지났지만 도민체전 옥천 대표로 나갔을 만큼 국궁에 몰두했다. 조 대표는 군서면 월전리 국궁장 창설요원이기도 했다. 사진은 2001년 3월10일 국궁장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 
국궁을 내려놓은 지 6~7년이 지났지만 도민체전 옥천 대표로 나갔을 만큼 국궁에 몰두했다. 그는 군서면 월전리 국궁장 창설요원이기도 했다. 사진은 2001년 3월10일 국궁장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 

■ 고생한 세월, 그럼에도 감사할 따름

항상 일주일 계획을 짰다. 월요일 오전에는 청산, 오후에는 청성, 화요일은 안내·안남, 그 다음 날은 이원·동이, 그리고 군서·군북에 다녀왔다. 한겨울 가풍리에 가는데 하도 추워 얼굴이 얼얼했다.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추위를 녹였던 세월을 버티고 버텨 여까지 왔다. 생각해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고생한 일도 많았다.

지금까지 현역으로 뛴다는 점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인들과 편하게 커피 한잔하며 대화도 나누고, 어디 가서 굽신굽신 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내 직장이 있어 자랑스럽다.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사업장을 이끌고 싶다.

“옥천신문에서 이렇게 10년 주기마다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옥천군민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험혜택 못 받은 사람에게, 제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 혜택을 줬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특별히 한 일도 없고, 군민으로서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여나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 저와 상의하면 좋은 방향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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