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기 선생 손녀 허옥년 씨를 비롯한 독립유공자 후손 8명에게 격려품 전달
허옥년 씨 “허상기 선생 코에 물을 넣는 등의 끔찍한 고문 당해”
우리나라를 지켜낸 순국열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가져야

13일 김재종 군수가 허상기 선생의 손녀 허옥년(93, 군북면 사정리)씨를 만나 격려품을 전달했다.
13일 김재종 군수가 허상기 선생의 손녀 허옥년(93, 군북면 사정리)씨를 만나 격려품을 전달했다.

최근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백색국가 제외와 수출 규제 조치를 행하면서 전세계에서 한일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한일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일본이 다시금 한국을 침략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 만세운동을 진행했고, 오늘날 우리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숨쉬고 있다. 우리 고장에선 옥천면 구읍, 청산 청산장터, 이원 대흥리 장터, 군서 하동리 만세봉 등 4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발생했다. 우리군은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후손들을 찾아갔다.

13일 김재종 군수는 허옥년(93, 군북면 사정리)씨를 포함한 독립유공자 후손 8명을 찾아가 격려의 말을 건넸다. 또한 한우세트, 쌀 10kg 2포대, 이불 등의 격려품을 전달했다. 이날 김재종 군수, 여영우 주민복지과장, 사정리 주민, 허옥년 씨 딸과 사위 등 10여명이 참여했다. 허옥년 씨는 이원만세운동을 주도한 허상기(1871-1946) 선생의 손녀다.

김재종 군수는 허옥년 씨의 손을 감싸며 "우리나라를 지켜준 독립유공자들에게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군에서 자주 찾아뵙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물품을 전달받은 독립유공자 후손자 명단. 임해준 선생 증손 임분순 양재동 선생 손 양해승 이호영 선생 아들 이신무 이기영 선생 손 이종란 김진성 선생 손 김옥향 이경수 선생 아들 이태구 공재익 선생 손 정진원 허상기 선생 손 허옥년

허옥년(93, 군북면 사정리)씨가 허상기 선생에 대해 얘기하려는 모습이다. 잠시 허상기 선생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허옥년(93, 군북면 사정리)씨가 허상기 선생에 대해 얘기하려는 모습이다. 잠시 허상기 선생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다.

손녀 허옥년 씨가 얘기하는 허상기 선생

1919년 3월 27일, 허상기는 동생인 허상구 및 4명과 함께 이원면 대흥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구읍만세시위와 더불어 거센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해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허옥년 씨가 어릴 적 허상기 선생이 타계해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위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집터를 알아봐주는 등 유별나게 친절하기도 했다고. 덩치가 크고 얼굴이 작아 인물도 좋았다고 한다.

허상기 선생은 만세운동을 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느껴야만 했다. 허옥년 씨가 말하길, 일본인이 선생을 노리고 총을 쏜 적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목 뒤를 스쳐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헌병주재소의 헌병이 출동해 만세운동 해산을 명령했으나 거부하자 연행됐다. 그는 형제인 허상회, 허상구 등과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겪기도 했다. 선생은 코에 물을 넣는 등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독립을 외쳤다.

허옥년 씨가 말하길,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손톱 끝이 파랗게 변하고 수척한 몰골이었다고 한다. 허옥년 씨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우리 할머니랑 엄마랑 엄청 고생했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선생이 앓아누운 후 그의 부인과 딸이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을 견디다 1958년 타계했다. 후손들을 위해 죽음과 독립을 맞바꾼 것이다.

해방을 맞은 이원면 주민들은 허상기를 포함한 이원만세운동가 9명을 기리기 위해 1958년 4월 1일 공적비를 세웠다. 또한 1990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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