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제2회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 추모제
한국전쟁 민간인 희쟁자 유가족회
"미신고자 지속적 발굴하고 합당한 보상 있어야"

17일 다목적회관 대회의실에서 '제2회 한국전쟁 민간인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옥천군 한국전쟁 민간인 합동추모제'가 제2회를 맞이했다. 옥천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이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는 지역 내 미신고자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국가로부터 보상받지 못한 유가족을 위해 일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17일 오후 2시 다목적회관 대회의실에서는 '제2회 한국전쟁 민간인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옥천에서는 1년이 넘는 기간 준비과정을 거쳐 한국전쟁 이후 68년 만인 지난해 첫 추모제를 가졌고, 올해 두번째 추모제를 맞이했다. 

이번 추모제에는 지난해보다 8명 희생자를 더 확인해 모두 87명의 희생자가 영현 제위에 올랐다. 지난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결정인원에 따른 △경찰에 의해 동이면 평산리, 군서면 월전리, 용머리, 오동리에서 사살된 옥천국민보도연맹원 54명 △1950년 10월1일 수복 후 부역 혐의로 고문 받고 사망하거나 사살된 7명 △청산 노루목재에서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 7명 △보도 연맹 사건 미신고 사례 13명에서, 보도 연맹 사건 미신고 사례 5명과 청산 노루목재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 3명이 추가로 확인된 것. 결정 인원 외 희생 추정자는 550여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화를 헌화하는 유족들의 모습

추모제는 전통제례와 추모사, 헌화 및 분양 순으로 진행됐다. 유족회와 김재종 옥천군수, 김외식 옥천군의회 등 관계자 8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금기홍 유족회장은 잘못된 과거를 만들어낸 당사자들의 반성과 사과가 조속히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금기홍 유족회장은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유족은 물론 희생된 영령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불명예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 앓아오셨을 미신고 유족을 발굴하고 이분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있을 수 있도록 유가족회가 노력하겠다.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도 재차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재종 군수는 "과거에 대한 진실된 반성 없이 나아가는 미래는 사상 누각에 불과할 것"이라며 "오늘 추모제는 유족의 아픔을 함께하는 것은 물론 옥천군이 잘못된 과거에 대해 진실되게 반성해 성장해나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날 합동 추모제에는 초헌관으로 옥천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금기홍 유족회장이, 아헌관으로 김재종 군수가, 종헌관으로 김외식 군의회 의장이 나섰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가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군 예산 300만원이 지원됐다. 이밖에 희생자 추모비 건립 등에 대해서는 군은 아직 공식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없다고 밝혔다. 자치행정과 행정팀 이훈명 담당자는 "현재 추모제 지원과 유족회를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것 밖에 추모비 건립 등 문제는 아직 공식적으로 이야기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고장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는 표지는 현재 2008년에 세워진 군서면 월전리 군립묘지 안내표지판과 말무덤재 안내표지판 두 곳이 있다(옥천신문 2008년 9월18일 자 945호 "보도연맹사건 안내판 만든다" 참고).

이날 합동 추모제에는 초헌관으로 옥천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금기홍 유족회장이, 아헌관으로 김재종 군수가, 종헌관으로 김외식 군의회 의장이 나섰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 추모제에서 만난 유족들의 한마디를 들어봤습니다. 들은 이야기를 갈무리해 다시 전합니다.

 '노루목재 비행기 폭격... 14살 어린 딸 두고 먼길 떠난 우리 아버지'

여든 둘 박봉희(서울시 강남구)씨는 '여든이 넘어서야 열네살 때 잃은 아버지를 기리게 됐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청산면 인정리에 살다 청산 노루목재 미군 폭격으로 죽은 박정하씨,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서로 가족들을 떠올리며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 유족들의 모습. 오른쪽 가운데 앉은 사람이 박봉희씨다. 

"50년 9월쯤이었을 거야. 수복도 됐겠다, 면에서 무슨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구 동네 사람들을 불렀어. 그래서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이랑 노루목재에 갔지. 아직도 기억나. 나도 봤어. 항상 높이 날던 비행기가 밭을 나즈막하게 날았어.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 비행기가 낮게 날면 비행기가 날아오는 쪽 반대로 달리라구.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달렸나봐. 가만히 있었으면 살았을 텐데. 살고 싶어서 뛴 거였을 텐데, 거기에 폭탄이 떨어졌어. 미군놈들은 왜 폭격을 했을까? 그때 아직 도망 안 간 인민군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놈들은 무전으로 이미 공격 소식을 들어서 구석구석 숨었고, 소식 모르는 우리 동네 사람들만 죽었지.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도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돌아오셨어. 아버지가 어떻게 뛰었구나, 그때 들은 이야기야. 그리구 3일 만에 돌아가셨어. 기구한 삶이야. 아버지도 나도. 아버지 없이 집에서 어머니도 나도, 동생들도 많이 배가 고팠어."

예순 여섯 이은경(청산면 효목리)씨도 청산 노루목재 폭격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건정(청산면 효목리)씨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야. 그러니까, 나도 고모님한테 들은 이야기지. 할아버지가 6.25때 미군 폭격으로 다리를 맞아서 한두달쯤 앓다가 돌아가셨다구. 오른발 뒤꿈치였던 거 같아. 그때는 다치면 이렇다 치료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혼자 끙끙 앓다가 돌아가신 거지. 이야기해주던 고모님 얼굴이 지금도 선해. 한 가지 마음이 답답한 건, 작년에 추모제에 왔던 동네 사람 한 명이 이제 자기는 추모제에 안 간다는 거야. 무슨 돈을 받았다구. 당신은 안 받았냐구. 내가 '그게 뭐예요'라고 물으니까 이거 보상금이라구. 우리 가족은 알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시골에 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억울한 마음만 품고 살아야 하나, 그래서 오늘도 영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아."

일흔 일곱 오선영(동이면 세산리)씨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오노성(동이면 세산리)씨를 떠올렸다. 

"한 저녁이었어. 어머니가 칼국수를 끓여주셨는데 그때가 모내기랑 김매기를 하느라 한창 덥고 바쁜 때였단 말야. 아버지가 칼국수가 지금 너무 뜨겁다구, 밖에 무슨 회의가 있는데 그거 다녀와서 먹겠다구 하구 나가셨어. 그 길로 못 돌아오셨지. 아직도 그 못 드시고 간 칼국수가 맘에 걸려. 나중에 우리도 피난을 갔는데, 얼마 뒤에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를 찾았어. 어디 구덩이에 아버지를 묻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어. 아직도 기억 나. 뭔 줄에 묶인 손이 하나 나와 있었는데 그거 하나 잡아 당기니까 사람이 굴비처럼 줄줄이 딸려 나와.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없었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지금도 아버지를 못 찾았어. 바라는 거? 이 나이 먹고 바라는 게 뭐가 있겠어. 아버지 시신이나 찾았으면 좋겠어, 시신이나."

유족들은 국가가 희생자가 된 가족을 제대로 기억하고 보상해주길, 기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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