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교육봉사 하던 안 선생님, 세종학당 교원이 되다
코로나19로 현지생활은 짧게 겪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도전할 날을 기다리고 있어

가화리에 사는 안상남(61)씨는 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는다. 저녁 9시부터 자정이 넘은 늦은 밤까지 화상회의 프로그램 Zoom으로 강의를 한다. 평범하지 않은 시간에 강의를 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경주쯤 되는 이란의 고도(古都) 이스파한. 안씨는 그곳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국어 교원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민들레 홀씨 퍼트리듯, 옥천에 잠시 뿌리내린 채 이곳저곳에서 꿈을 펼치는 안씨를 만났다.

지난달 29일 옥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상남(61, 옥천읍 가화리)씨
지난달 29일 옥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상남(61, 옥천읍 가화리)씨

■ 어쩌다 찾아온 옥천은 기회의 땅이 됐다

사실 안씨는 서울 토박이다. 어렸을 적부터 서울에 살았고 졸업한 대학 소재지도, 졸업 후 영어 교사로 교편을 잡은 곳도 서울이다. 10년간의 교직생활, 문제가 하나 생겼다. 군 장교인 남편이 타지역으로 발령받으며 떨어져 살게 된 것이다. “2년 정도 따로 살면서 가족이란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어요. 쉬고 싶은 주말에만 만나 뭔가를 하려니 갈등도 생겼고.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안씨는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남편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왔다.

“제가 결심이 서면 과감하게 결정하나 봐요.” 남편이 은퇴하자 안씨 부부는 전원생활을 하려 전국을 물색했다. ‘왜 시골을 가느냐’는 주변의 타박도 안씨를 막을 순 없었다. 안내면 도이리에 한옥을 조금 손본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2015년, 옥천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지금은 가화리에 집을 구했다. 여유로움이 좋아서 왔지만 교통 등 불편한 점이 많아 조금 옮겨왔다고 한다.

귀촌했다고 해서 아예 사회적 관계를 끊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안씨는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찾아가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하는 건 싫더라고요. 당당하게 ‘제가 이런 걸 배웠고 할 수 있는데 돕고 싶습니다’라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전철을 기다리는데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죠. 모 사이버대학 한국어과 광고였어요. 시골에 가면 결혼이주여성이 있잖아요. 도움 줄 수 있겠다, 이거다 싶었죠.” 안씨와 한국어교육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교편은 진작 내려놨지만 교육자로서의 길은 계속 걷게 됐다. 안씨는 한국어교육을 공부하며 옥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곧 일주일에 두 번씩 이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어만 가르친 것은 아니다. “학교 수업을 듣는데 다문화사회전문가 과정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좋은 기회라기에 그것도 공부를 했습니다. 덕분에 졸업이 3개월 늦어졌죠.” 안씨는 2017년 한국어 교원과 다문화사회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옥천에서는 다문화사회 전문가로도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안씨는 이주민들에게 한국의 제도와 사회를 알리고, 동시에 옥천군 내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돌아다니며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강사로 지낸 옥천에서의 시간은 안씨가 세종학당 교원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국어 교육 이수자가 늘며 세종학당 취업 자체가 어려워졌다. 취업하려면 교육 경험을 쌓아놓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학사만으론 취직이 힘드니 웬만하면 석사도 따더라고요. 서울 같은 경우 교육 기회는 한정돼 있는데 사람이 몰리니 힘들기도 하죠. 옥천에 내려왔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요.” 어쩌다 옥천에 내려왔고, 지역에 봉사하며 경험을 얻는 win-win 상황을 겪은 안씨. 그렇게 어쩌다 보니, 안씨에게 옥천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산 지역이 됐다.

■ 꿈 펼치러 건너간 이란, 짧고도 쉽지 않은 시간

학교 동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얼핏 들었던 세종학당은 결국 안상남 씨의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코이카 해외 봉사도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옥천에 있는 이주 주민을 넘어, 바다 건너 더 다양한 이들을 가르쳐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결국 안상남씨는 ‘바늘구멍’이라는 세종학당 교원 모집을 통과해 2020년 초 이란에 파견됐다. 적지 않은 나이에 머나먼 타국에서 살게 되는 일은 사뭇 두려운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안씨에겐 가슴 뛰는 도전이었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해보다가 그대로 인생이 끝나는 건 싫었어요. 같이 공부하던, 먼저 테헤란에 간 동료에게도 물어봤더니 별로 걱정할 일 없고 평화롭다고 하더라고요. 힘이 많이 됐어요.”

문제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작년 3월 들어 이란에서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했다. 안씨가 이스파한 대학교에서 한국어 시범 강의를 딱 한 번 하고나니 휴교령이 내려졌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스파한엔 세종학당 관계자 외에 다른 한국인이 없었고 코로나가 중국에서 퍼진 만큼 중국인으로 오해받으며 수군거림을 듣기도 했다. 5천달러 이상 가지고 출국할 수 없다는 이란의 방침도 안씨를 힘들게 했다. ‘벌어서 쓰겠다’는 요량으로 생활비도 최소한만 가지고 온 상황이었다.

“대사관에서 차와 증서를 보낼 테니 혹여 봉쇄령이 내려진다면 증서를 보여주고 통과하라고 했었죠.” 안씨의 설명에 따르면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교민 수송작전이 펼쳐졌다. 안씨는 무사히 국내에 복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연합뉴스와 인터뷰도 하고, 이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직원에게 잠시 신세 진 일을 계기로 외교부 ‘국민귀국 수기집’에 올라갈 수기도 썼다. 14일간의 자가격리까지 마친 안씨는 다시금 옥천으로 돌아왔다. 짧고도 힘든 기억이지만 이스파한에서 만난 이란 학생들은 좋은 인연으로 남았다. 영상으로만 만나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안씨의 온라인수업 화면. 이란 학생들이 3일(현지시각) 스승의 날을 맞아 감사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 안상남)
안씨의 온라인수업 화면. 이란 학생들이 3일(현지시각) 스승의 날을 맞아 감사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 안상남)
안씨가 늦은 시각 온라인으로 이란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고 있다. (사진제공: 안상남)
안씨가 늦은 시각 온라인으로 이란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고 있다. (사진제공: 안상남)

■ 학생들의 놀라운 한국사랑…“앞으로도 열심히 가르치고, 또 도전해야죠”

한국어를 배우러 세종학당을 찾고 컴퓨터 앞으로 모여드는 이란 학생들은 한국과 사랑에 빠진 이들이다. 그만큼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음악만 해도 그렇다.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등 유명한 아이돌은 당연하고 이문세나 전인권을 알고, 하다못해 트로트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이란은 유튜브 같은 콘텐츠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그러니 수업이 끝나고 신청곡을 받아 하나씩 들려주곤 하죠.” 안씨가 들려주는 한국 음악은 이란 학생들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한 여학생이 수업 중에 늦게 들어왔어요. 아무래도 여성 인권이 낮고, 억압받고 이런 게 있나 봐요. 4~5년 전부터 우울하다고, 오늘도 기분이 나빠서 늦게 들어왔다고 했어요. 그래서 노래를 틀어줬죠. ‘넌 잘하고 있어’ 이런 노래가 있더라고요.” 교육은 단지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닌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게 안씨의 교육관이다.

학생들이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덕에, 안상남 씨는 문화를 소개하는데도 열심이다. 전통문화도 경험해봐야 더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옥천전통문화체험관도 종종 찾았다. “전통문화나 음식도 궁금해하고 좋아하더라고요. 인터넷으로 조리법을 보고 김치를 만들어 먹는 친구도 있었어요. 또 이란에 가면 한복을 하나씩 입혀주려고 준비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러지를 못하고 있네요.” 현재 안씨는 SNS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한식과 한복, 옥천에서의 생활을 올리면 학생들은 새해인사나 안부를 한국어로 말하는 영상편지를 종종 보내온다.

“이란 학생들 굉장히 열정적이에요. 다른 나라 이야길 들어도 이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숙제 내줘도 한 명도 안 빠지고 해오고. 그래서 ‘너희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너희들 만나 행운이다’란 말을 많이 했죠.” 덕분에 안상남씨도 다시 이란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돌아가겠다고 학생들과 약속을 했다고. 한국어교원으로 활동하다 느낀 일종의 ‘사명’도 있다. 안씨는 학생들에게 입학추천서를 써주는 등 한국 유학길을 열어주고 돕는 방법을 고민한다. 학생들이 가까운 미래에 한국과 이란 양국을 위해 일하는 인재로 성장하는 것이 안씨의 바람이다.

안씨는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도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세종학당 파견이 끝나면 남아메리카 쪽 세종학당에도 가볼까 고민 중이다. 나이 제한이 없어 미뤄뒀던 코이카 해외봉사단도 고려하고 있다. 젊음의 기준은 신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혹자의 말대로라면, 누구보다도 젊게 살고 있는 셈이다. 

“주변에선 저를 응원하기도 하고, 딸은 ‘왜 이리 걱정시키냐’고 질색도 해요. 그래도 아들딸한테도 항상 ‘꿈을 위해 살라’고 말해왔거든요. 저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살려고요.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이거 끝나고 나도 또 꿈이 있어요. 그러니 딸아, 나는 죽을 때까지 도전할 테니 설득은 포기해.(웃음)”

지난달 29일 옥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상남(61, 옥천읍 가화리)씨
지난달 29일 옥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상남(61, 옥천읍 가화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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