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숙(1946생 75세~)

1월이 엊그제인데 세상에 벌써 내일이 5월이다. 내가 69살에 서울에서 와장창 까먹고 이원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수래 공수거라 모든 것을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 나갔다. 내 것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소중하게 남은 것일까? 바로 나의 오늘, 소중한 하루하루이다. 이 나이에 지나간 과거를 곶감 빼먹듯이 꺼내서 시간을 죽이거나,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돌리듯이 곱씹으며 원망이나 쌓아놓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흘러가는 시간들은 시속 80키로를 달려간다.

나는 월화수목금 9시에서 12시까지 “청소를 하는” 정기적인 일거리를 가진 취업 할머니이다. 조금 벌고 조금 쓰며 즐겁게 살면서 내 생활을 즐기는 것이 더 현명하다. 이런저런 생활 패턴에 적응이 되면 난타 수업을 들어볼까 생각 중이다. 지금은 내가 나이도 있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지만 생계보다 취미삼아 일하고 있으니 그 순간은 아픔을 잊고 있다. 일할 때는 일할 욕심에 통증을 잊는 거다. 일시에 모은 재산이 한 번에 날아가면서 받은 정신적 쇼크를 받아서 신경성 약을 먹고 있지만 차차 좋아지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저승 아니면 이승이니 야홋!! 선물 받은 오늘 하루 폼나게 살자.

내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주어진 일 열심히 하다 보면 하루가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다. 여기 복지관에 노인일자리사업에 응모해서 청소일을 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몸 혼자뿐이니 내 몸만 건사하면 된다. 2019년도에 취업했지만 그냥저냥 지나갔고, 2000년도에는 일을 충실하게 잘해서 인정상까지 받았다. 한 번도 안 빠지고 청소를 열심히 했는데, 잔꾀 안 부리고 내 일처럼, 남의 일도 내 일처럼 하지 절대 건성건성 안 했다. 

우리는 서울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해봤는데 나중에 건축폐기물 사업을 하게 되었다. 사업도 기복이 있었지만 순조로왔고 5남매 자식도 다 여우였다. 50억을 벌었는데 사기꾼에게 걸려서 땅 투자라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날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하니 남은 것은 내 몸과 가방 두 개만 끌고 고향으로 나 혼자 내려왔다.

■ 주어진 숙명대로 각자도생

꽃다운 18살에 소정리 사는 27살 총각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 결혼이 사실 사연이 있는 것이 친정 당숙모와 시집 당숙모가 한동네 짝짜꿍으로 병약한 총각과 팔등신 미녀인 나를 한데 엮었다. 신랑은 서울에 서라벌예고를 다니면서 탤런트(연예인)가 되려고 했는데 그 꿈이 무산된 것도 있고, 예술가 기질을 가진 남편은 현실성이 강한 나를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폐가 약한 남편을 위해 결혼하자마자 폐에 좋다는 온갖 약을 다 달여서 뒷바라지했다. 10년 정도 소정리에서 시골살이를 하고 우리는 서울로 이사를 단행했다. 

나는 남들이 보면 무언가 대단한 한 자리 차지할 것 같이 생겼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지만 사실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 그래도 내 머리로 세상살이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헤쳐나왔다. 내가 구건리 밀티 8남매 중 5번째인데 엄마 대신 동생 셋을 키웠다. 엄마는 부처님 신자로 돌아다니다 후에 법당도 만들어서 운영했다. 언니들은 진작에 시집을 다 가 버렸고 오빠들은 물심부름도 안 시킬 정도로 위했기 때문에 내가 집안 살림과 동생 뒷바라지를 책임졌다. 그때의 불심이 내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친정 식구로 여자형제 셋과 남자형제 둘 해서 다 같이 옥천에 살고 있다. 왕래도 자주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라도 자주 만나지 못 하고 있다. 그저 가끔 전화로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이다. 모두 다 나이를 먹었고 각자 주어진 숙명대로 인생 지도를 잘 그려가며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제 각자도생이라고 한다.

혼자 사니 뭣을 달랄 사람도 줄 사람도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홀로 살아도 마음은 젊은이 못지않게 청춘이다. 봄날 우리 옥천 주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했을 때 복지관 동기들 몇 명이 기분전환으로 드라이브 나가기도 했다. 내가 여기 복지관에 식구처럼 드나들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나와 연배가 같거나 아래거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내가 보기에 인상이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 같으면 툭 터놓고 전화번호 달라고 해서 교류를 하고 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할 필요가 없이 적극적으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사귀어 볼 생각이다. 이왕 태어난 인생이니 즐겁게 살아야 한다. 뒷방 늙은이로 물러서서 하루 대부분을 슬픈 생각으로 도배하거나 텔레비전 혼자 왕왕거리게 떠들게 두고 우두커니 앉아서 시간을 떼우며 살고 싶지 않다. 

동생 셋 키우느라 공부를 못했지만 나는 여장부처럼 살고 있다. 경매로 넘어가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나는 활발한 성격이라 다 잊었다. 마음에 붙들어 놓으면 근심 걱정과 분함이 뭉쳐서 암이 된다고 들었다. 웃을 때 껄껄 크게 웃고, 집에서도 흥얼흥얼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자가치유방법이다. 

툭툭 털어버리고 살아 보니까 혼자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서 몇 개월 있어보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고 마치 징역사는 것 같았다. 이러다 정신줄 놓을 것 같아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안면들이 있으니 나도 슬슬 움직여 볼까? 전동차를 먼저 사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내가 전동차를 애용한 지 만 3년 차인데 장애4급으로 보조금을 받아서 구입했다. 60세에 허리디스크로 무릎 수술을 해서 등급을 받았던 것이고, 올봄에 무릎 재수술을 했으나 다 좋다.

■ 그것이 자비라 한다

자식들을 많이 못 가르친 것이 항시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제 몫을 다하고 사니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다. 제일 바라는 소망은 현재 아들딸들은 제 밥벌이 든든하고 야무지게 하면서 잘살고 있으니 첫 번째 만족이다. 자식들은 죄다 자기들 걱정은 하지 말고 나만 행복하라고 응원하는데 성화에 가까울 정도이다. 나를 닮아서 삶의 의지가 강하고 고난을 헤쳐나가는데 꿋꿋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무릇 안심이다. 

마음 공부인지 모르지만 가끔 깊은 숨을 쉴 때가 있다. 깊게 들이마실 때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난과 슬픔을 들이마시라 한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쉴 때 모든 즐거움과 기쁨과 축복 등을 이 세상에 내 보내라 들었다. 그것이 자비라 한다. 마음자리 평안하고 슬픈 사람이 없게 자비를 내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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