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청성면 송 금자

목단 꽃은 청성면 시골 마을, 여산 송씨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 365일 내내 고단했던 그 때는 무명천 밑에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매듭을 풀 수 없이 하루하루가 뒤엉켰다. 한 올 한 올 풀어가면서 무명천위로 목단 꽃이 피어올랐다. 한숨과 세월로 한 땀 한 땀 놓은 수는 자태 고운 목단 꽃이 되어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기대신 80년 켜켜이 쌓인 인생의 향기로 마당 한 편에 도란도란 모여 앉았다. 

딸 부잣집 엄마. 딸만 줄줄이 여섯을 낳던 시절에는 그 이름이 반갑지 않았다. 세월이 변해서 이제 딸 부잣집 엄마들이 으스대는 세상이 됐다. 오래 살다보니 좋은 세상을 만났다. 변하지 않은 건 우리 아이들이 나고 자란 우리 집, 시집와서 큰 형님 내외와 같이 살다가 5년 만에 이 집으로 제금 나와서 그 이후로 내내 이 집에 주소를 심고 있다. 우리 8남매가 서로 주고받는 남매의 정도 모양새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의 정이 넘쳐 나이든 내 차지까지 온다. 내가 서글플 겨를이 없게 하는 우리 아이들, 내가 한숨 쉴 틈이 없게 하는 우리 아이들. 필목장사 하던 시누가 자주고름 노란저고리로 나를 꼬드겨 열아홉 살에 시집가서 누에치느라 쪽잠 자며 고단했던 날들, 줄줄이 딸만 낳을 때는 마음고생에 기댈 곳이 없었다. 남편 먼저 보내고 허전함을 달랠 길 없던 그 날들도 이제 덤덤하게 지난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았다. 그 기억이 아프지 않은 건 지금 더 행복한 추억 보따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 추억 보따리 두 가지만 풀어보면

노란저고리 끝동이 맺어준 천생연분

열아홉 살, 필목 장사하던 우리 동네 성님은 나한테 자주고름이며 노란 저고리 끝동을 수시로 손에 들려주면서 “참하다 예쁘다”며 덕담을 건네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다 나를 꼬드기는 뇌물이었다. 나는 올해 여든 두 살이 됐다. 영동 한성면이 고향이다. 딸만 셋인 집에서 자라면서 동네 이웃으로 지낸 성님이 나를 예뻐해 주셨다. 댕기머리 따고 앙증맞던 열아홉 살, 동네에 필목 (비단)장사하던 그 성님이 값으로 치면 적잖은 양의 자주고름이며 노란저고리 끝동을 받기 미안할 만큼 슬며시 손에 쥐어주곤 했다. 처음에는 고운 빛깔에 마음을 뺏겨 넙죽 넙죽 받았지만 어느 날 부터 

“안 받을래요”

사양을 했다. 그래도 주는 손길이 멈추지 않아 난감해 하고 있을 때 필목장사 성님이 나한테 넌지시 말을 꺼냈다. 침을 꼴깍 삼키는걸 보니 어째 어려운 얘기를 하려나보다.

“우리 남동상이 하나 있는데 아직 장가를 안 갔어. 그란디 팔이 한 짝이 없어. 군대 가서 사고가 났는데 사람은 미끈하고 인정도 많아.”

신통방통한 것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에구머니 뭔 소리여” 해야 하는데 나는 얼굴도 못 본 남동상 이라는 그 양반이 괜스레 측은했다. 혹여 시집이라도 가면 고생은 맡아놓은 당상인데 그 생각은 안 들고 젊은 사람이 손이 없어서 어쩐데요 괜한 걱정까지...그래서 만났지 뭐여 천생연분 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열아홉 살, 그니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 시집가는 날, 새색시 쫄쫄 굶다.

시집가는 날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날 잡아서 눈이 어찌나 많이 왔나. 친정에서 결혼하고 가마타고 오는데 눈이 무릎까지 쌓여서 가마를 더 이상 끌고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마에서 내려 푹푹 빠지는 그 눈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새색시라 보들보들한 배로도 유똥 치마로 갈아입고 꽃단장은 다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수북이 쌓인 눈을 해쳐가며 성큼성큼 걸을 수밖에. 다음날부터 나한테 닥칠 고단한 하루하루를 미리 알려주듯이 말이야. 

눈길을 헤쳐나가며 점심 무렵 겨우 도착했더니 큰동서가 새색시 맞느라 종종 걸음으로 다니고  있었다. 새색시가 아침은 제대로 먹기나 했을까 거기에 눈길 헤쳐오느라 온힘을 다 뺐더니 뱃속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이 도란도란 모여 잔칫날을 맞고 있었는데 새색시 맞이는 뒷전이었다. 눈길을 빠져나오느라 유똥 치마도 후줄근해져 이미 새색시자태가 무너졌고 뱃속에서는 밥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수줍은 새색시가 밥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겨우 참고 점심때를 놓치며 저녁 무렵 되어서야 겨우 한술을 뜨고 기막힌 결혼 첫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강행군이던 결혼 첫날 한나절의 황당한 일들을 뒤로 하고 나는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남편은 첫날밤에 나에게 믿을 수 없는 말로 서약을 했다. 말로만 듣던 남편의 팔을 보면서 그날도 처음처럼 그저 측은했지, 나한테 고생보따리가 될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으니 팔자소관으로 돌려야했다. 그래서 부부의 다른 이름을 천생연분이라고 하는 가 보다. 남편은 

“팔 한 짝 이라도 고생은 안 시킬게”

19살의 새색시 27살의 새신랑, 남편의 말이 허풍으로 들리지 않았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믿음에 나는 ‘그래 우리 잘살아보아요’ 라고 나에게 약속을 했다. 남편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나는 운명 앞에서 뻗대지 않았고 대신 운명을 실은 배는 내가 노를 저어야 너울대는 파도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일곱 살, 총명하고 당돌한 송 금자 

국민학교 입학 전에는 입학할 아이들한테 취학통지서랑 광목을 끊어서 보내줬어. 그 광목으로 옷 한 벌 해 입고 입학을 했었지. 나랑 동갑인 사촌도 같이 학교에 가게 됐는데 두 사람 몫으로 나왔으면 좋으련만 한 사람 몫만 나온 거야. 둘 중 하나는 학교에 못 가는 거지. 워째 둘 다 보내주면 월메나 좋아 할머니는 고민 할 것도 없이 “지지배가 무슨 학교냐 아들부터 학교 가야지 흥섭이부터 학교에 보내자”

너무 속상했지만 내가 힘 있나 할머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학교에 못 가게 됐어. 그란디 어찌나 속상한지 분을 참을 수가 없었어. 너무 속상해서 애호박에 화풀이를 했어. 애호박을 칼로 꾹꾹 찌르면서 나는 왜 학교에 안보내주느냐고 울었지. 할머니가 내 편을 들 리 만무 허지. 어린 것이 잔망스럽다고 애꿎은 애호박을 왜 건드리냐고 지청구(꾸중)만 한 번 더 먹었지.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하던 시절이야.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나도 어린 것이 당돌하기는 했어. 학교에 못 가니께 동네 야학에도 잠깐 다녔어. 야학 선생님을 우리시형 오빠 삼았는디 미끈하고 얌전한 분이었어. 내 이름 석자를 빨리 쓰고 싶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배우고 썼어. 암팡져서 한글도 금세 깨우쳤어.

골 깊은 주름이 여든 살이 넘은 내 나이를 가리켜 주지만 아직도 텃밭에 나가 손을 놀릴 수 있다. 주말이면 집 마당에 꽉 들어찬 우리 아이들 차가 나를 싣고 꽃놀이, 맛있는 집 찾아 가느라 쉴 틈이 없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20년 전 먼 길 떠난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에 꿈에서라도 보려나 마음 졸이며 잠을 청하지만 어째 그이는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야속한 그니. 잘 있다는 말일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어 나는 여기에서, 그니는 거기에서 잘살고 있다.

나는 과거를 곱씹는 노인이 아니라 추억 보따리 하나 둘 셋 풀어보는 재미로 사는 아직도 꿈꾸는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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