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서당, 도 문화재 지정 절차 1단계 ‘지정 대상 심의’ 진행 중
500년(추정) 역사 지재서당, 도 지정문화재 등록 도전
서당은 왼쪽으로 기우는 등 위험한 상태
지정문화재로 등록되면 지원금으로 서당 정비 및 수리 가능

헐릴 뻔한 청성면 장수리 지재서당(구 구지서당)이 기사회생했다. 논산 강경고, 대전 동신고 등에서 한문 교사를 하다가 2009년 퇴임한 출향민 김대현(73) 씨가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등록에 나서 서당 재건축 계획이 보류됐기 때문이다. 옥천군은 지재서당 문화재 등록 절차를 돕고 있다. 
지재서당은 장수리 장수체험관에서 직선거리로 약 500m 떨어져 있다. (도로명 주소는 청성면 장수로 193) 체험관에서 출발해 벚나무가 나란히 이어진 보청천을 따라 걸으면 15분가량 걸린다. 
성균관 유생 출신 김옥정이 16세기(추정) 건립했고, 어린이 공부방, 훈장방, 대청마루로 이뤄져 있다. 서당에선 조선 말까지 금릉 김씨 종친 자녀, 인근 거주 어린이들이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금릉 김씨 13세 김옥정 선생 묘는 서당 뒷산에 모셔져 있다 

지재서당의 모습
지재서당의 모습

■ 김대현 씨가 지재서당 살리기에 나선 까닭 

지난 1월 김대현 씨는 깜짝 놀랐다. 금릉 김씨 종친 회의에서, 지재서당을 부수고 새로 짓자는 방향으로 논의됐기 때문이다. 서당이 조금씩 기울어 무너질 위험이 있고,  낡았다는 이유였다. 김 씨는 “(가문 명의) 농지를 팔아 재건축 비용 1억8천만 원까지 마련했다”라고 했다. 

금릉 김씨 30세인 김대현 씨는, 이 결정에 아쉬움을 느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500년 역사를 지닌 목조 건물을 헌다는 사실도, 조선 선조의 기운이 깃든 문화재를 잃는다는 사실도, 안타까웠어요.”

서당을 살릴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다가 김 씨는 군 문화관광과를 찾았다. 가문만의 문화재가 아닌, 정식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정식 문화재로 등록된다면, 서당이 헐릴 일은 없다. 

김 씨는 한 전문가가 서당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전했다. “문화재로서 가능성이 있어 보여요. 부수지 말고 기다려 봅시다.”

군에서는 지재서당이 충청북도 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게끔 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 물론, 모든 문화재가 도 지정문화재가 되는 건 아니다. 지정 대상 심의, 현지 평가, 지정 예고 심의 등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의 복잡한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군 문화관광과 강병숙 주무관은 “절차를 밟고 있어서, 도 문화재 지정 가능성은 아직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지금은 1단계에 해당하는 지정 대상 심의가 진행 중이다. 

지재서당 현판을 들고 있는 금릉 김씨 종친회장 김병택 씨
지재서당 현판을 들고 있는 금릉 김씨 종친회장 김병택 씨
지재서당 현판
지재서당 현판
지재서당 창립자 김옥정 선생 묘를 설명하는 김대현 씨
지재서당 창립자 김옥정 선생 묘를 설명하는 김대현 씨

■ 충북 지정문화재 지정되면 정비·수리비 지원받아

4월12일 비 오던 날 지재서당은 위태로워 보였다. 건물이 조금씩 기울고 있어 사람 키보다 3배쯤 큰 은색 알루미늄 봉 4개가 왼쪽 면을 지탱하고 있었다. 금릉 김씨 22세 후손인, 탁계 김상진이 스승 미호 김원행(조선 영조 때 정통 학자로 추대돼 많은 성리학자·실학자를 배출)에게 부탁해 받은 ‘止齋(지재)’ 현판은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가로 1m, 세로 0.5m가량 돼 보이는 현판은 금릉 김씨 종친회장 김병택(79) 씨 청성면 집 창고에 보관 중이다. 창고 구석에서 조심스레 현판을 들고 나온 김 씨는, 현판에 빗방울이라도 튀길까 봐 비가 떨어지지 않는 큰 지붕 밑에서 보여줬다. 

김 씨는 지재서당 바로 옆 작은 집에서 3년 전까지 30년을 살았다. 그만큼 서당에 애착이 있다. “청성면에 별다른 게 없어요. 문화재로 지정되면, (청성 홍보도 되고)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지재서당 도 지정문화재 등록에 앞장선 김대현 씨는 요즘 희망에 들떠있다. 도 지정문화재로 선정되면, 지원금으로 지재서당을 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붕도 고치고, 서당 앞 인삼밭도 정리하고, 흙길도 새로 정비하고.”

충청북도 문화재 보호 조례에는 ‘도지정문화재의 관리·보호, 수리 또는 기록 작성을 위하여 필요한 경비’를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문화관광과 강병숙 주무관은 “보수 등이 필요하면 (금액을 산정해) 도비 50%, 군비 50%로 지원한다”라고 말했다. 

도 지정문화재 심사를 모두 통과한다면, 지재서당은 9월 말 정식 문화재에 등재될 가능성이 크다. 김대현 씨는 내년 옥천으로 귀향한다. 옥천읍에 아파트도 사뒀다.“문화재로 등록되면 서당 가이드도 해보고 싶고, (내가) 한문 선생을 했으니까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은 마음이 있죠.”

지재서당과 김대현 씨
지재서당과 김대현 씨

 

금릉김씨 서당 ‘지재(止齋)을 찾아서’ ··· 문화재 지정 신청하면서

청산 남쪽 구지산 끝자락 언덕에 있는 500여년 역사를 지닌 금릉김씨 재실겸 서당을 찾았다.

고색창연한 목재 기와집은 보청천을 바라보며 쓸쓸히 홀로 서 있었다. 

허물어진 연못가에는 개나리가 샛노랗게 반기고 매화꽃은 봄바람에 흰눈같이 휘날린다. 

주인없는 서당 지붕기와엔 와송만이 버섯모양 외롭게 뒷산에는 진달래꽃 붉게 춘광에 빛난다.

금릉김씨 30대는 나그네,뜰에 서서 나의 뿌리인 조상의 역사와 삶을 추상해 본다.

금릉김씨는 김해김씨에서 분리되어 고려때 서경유수를 지낸 ‘김중구’(1214~1260) , ‘금릉군’으로 봉해져 1세로 중시조다.

양주목사 아들 김규 전국을 유람하다가 풍광(風光)이 수려한 청산(靑山) 장녹골 청량사에 청착하여 제단을 쌓고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한다.

이 서당은 13세 김옥정(16c) (성균관 생원)이 지은 것으로 이조 3대시인 이달 선생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날 때 ‘목단’한시를 한 편 써놓고 갔다고 한다.

이 서당에서 금릉김씨 종친 자녀, 인근 어린이들을 무료로 가르침으로써 청산지역에 예와 學(학)을 심어주었으며 조선말까지 배움의 터였다.

매년 음력 10월7일에 이곳에서 경향 각지에서 종친들이 모여 시사를 지냄으로써 追遠報本(추원보본)을 몸소 보여주었다.

청성면(말밍이, 계하, 무회리)은 금릉김씨의 집성촌으로 특히 말밍이는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에는 서당에 가지 않고 훈장이신 조부님 밑에서 동네아이들과 눈보라치는 겨울이면 천자문, 계몽편, 명심보감을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내가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것도 어린시절 한문공부때문이였으리라.

퇴직하고 귀향하여 옛조상(옥정)처럼 고향아이들을 모아 장수체험 마을과 연계하여 선비체험 봉사활동을 하려하였으나 아이들이 없어 꿈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청성초등학교 폐교위기까지 왔으니)

책 읽는 소리, 어린애 우는 소리가 없는 시골,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올해 초 종친회의에서 이 오래된 서당이 기울어져 헐고 신축하는 것이 논의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 금릉김씨의 배움의 산 증인인 서당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 종친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큰 손실이 아닐까.

그래서 헐기 전에 옥천군에 문화재 가치가 있나 의뢰하여 며칠전 전문대학 교수와 학예사 답사하여 긍정적 대답을 받았다. 하여튼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금릉김씨의 자존심과, 청산 지역의 문화유산의 보존이 되길 기대해 본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서당을 떠나면서 김 원행 선생께서 중건때 써 주신 현판 (止齋)의 고‘止’의 깊은 뜻을 음미해 본다.

仁者樂山之止(인자요산지지) 어진사람은 산이좋아, 돌아와 그곳에 머물고 相彼邱偶女조之止(상피구우여조지지) 저 언덕 숲 꾀꼬리 노래하며 머물고 있네

君子以之知所當止(군자이지지소당지) 선비들은 이러함으로 마땅히 머물곳을 알아야 하고 忠信孝敬敬惟於善止(충신효경유어선지) 충성, 신의, 효도 그리고 공경함은 오직 착함에 머물러야 하나니

출향인 전 대전고 한문교사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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