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숙 난타강사(1948년생~75세)  
요즘 같이 가짜가 많은 세상에/ 믿을 사람 바로 당신 뿐/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내 인생에 전부인 사람/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찬란했던 벚꽃이 눈꽃되어 춤사위처럼 떨어진다. 난타박자를 치며 함께 즐기다 보면 스트레스는 어느새 제로가 되고 그토록 걱정이던 “치매여 안녕”이다. 가요 한 자락에 밑장단으로 두드리는 북소리 장단에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웃음까지 합쳐져서 세상 최고의 활달한 수업이다. 북과 북채를 휘두르면서 자신감이 업이 되고 서로 화답하면서 내는 두드림과 울림은 기쁨이 팡팡 터지는 축제의 장임에 손색이 없다. 배우는 데 음악적 재능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퍼포먼스에 까르르 까르르, 흥이 저절로 나오면 몸 사위를 과장해서 힘껏 좌우로 돌려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다. 이제 남의 눈치 보고 평판에 주눅들어 살기에는 살아온 연륜이 아깝지 않은가! 

■ 《옥천북지관 가요난타》로 오세요

난타는 세세하게 다루기보다 동작과 리듬이 중요하다. 타악의 기본은 북을 잡는 법과 북을 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강하게 약하게, 탭탭, 업업, 다운의 세 가지 기본 스트로크를 익히고 동시에 치고, 번갈아 치는 연습을 리듬에 맞춰서 반복해야 한다. 타악의 이론을 아주 살짝 배우고, 매너와 채를 잡는 법과 기본자세를 계속 익혀야 한다. 박자의 개념을 익혔다면 강박, 약박을 구분하면서 스윙도 익히고 팔을 어떻게 움직이나 폼도 익혀야 한다. 따라 하다보면 어느새 난타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 자세에 따른 호흡도 익히고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까지 습득하면 진짜 즐길 차례이다. 현재 우리 난타교실에서는 기초연습에 『무조건』, 『찔래꽃』, 『찐이야』 3곡을 배우고 있다. 한 달 정도 해보면 기초 1곡을 무난하게 떼고 즐길 수 있다. 누구나 타악기가 두드려 내는 단순한 장단에 흥을 일으킬 수 있다. 월요일 1~3시 수업에 학생이 23명이나 출석하고 있다. 앞으로 최고 인기교실로 만들 생각이다. 『찐이야』가사처럼 나도 믿을만한 사람이지 싶다. 직장인들이 저녁에 하고 싶다고 해서 동아리 스타일로 수업한다. 우리 집에서 화, 일 2번 저녁에 10여 명이 수강하고 있다. 3만 원 수업료는 쉬는 시간에 간식과 커피에 쓴다. 

나는 옥천읍 죽향리에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옥천경찰서에 경찰관으로 근무하셨는데,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 나를 포함 딸을 내리 셋 낳으시고 남동생 넷을 순서대로 낳으셨다. 모두 다 먹고살기 힘든 때라서 경찰 아버지가 계셨어도 넉넉하진 못해서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내 아래로 동생이 여섯이라서 양보할 것이 많았다. 서울 큰집에 기술을 배우러 올라갔지만 사촌언니와 같이 집에서 놀았다. 신랑 지인과 내 친구가 서로 공모하여 참한 아가씨로 소개된 나는 비원 근처 신혼다방에 나갔더니 신랑과 친구가 앉아있더라.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고 한참 후에 지인한테서 연락이 와서 우리의 만남이 재개됐다. 

■ 참말로 열심히 살았다

신랑은 모난 데가 없이 깔끔하고 괜찮게 생겼다. 그래서 내 나이 24살에 5살 위 단양오빠 이귀영 총각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경찰서를 퇴직하시고 한동안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나중에 스님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가 이원 태고종 대성사에서 살고 계셔서 결혼식은 거기서 했다. 얼마 후에 혈압이 높으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머니가 머리를 깎으셨다. 우리에게는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와 다른 길을 걷게 되셨다. 어머니가 별세 후 그 절은 다른 스님이 운영하고 계신다. 동방불교대학을 졸업한 둘째 남동생이 바로 옥천 태고종 대성사 혜철스님이다. 지호스님이 오빠의 아들인데 현재 군법사로 근무 중이다. 우리 가문에 불교의 맥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면 나에게는 예술의 끼가 하나 더 있다.

1972년도에 서울 천호동에서 시부모댁에서 같이 살다가 내 고향 옥천으로 돌아왔다. 큰딸은 목원대 피아노과를 나와서 결혼해서도 계속 피아노 강사를 하다가 얼마 전 우쿨렐레 1급 자격증을 따고 우송전문대와 중학교 교사들 교육을 하고 있다. 대전 판암동에 본집이 있고 사위는 조경사업을 해서 옥천에서 같이 살고 있다. 둘째 딸은 46살인데 충북대학에 편입학으로 졸업하고 올해 충북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환경과 물 관련 전공을 하고 있다. 둘째는 농촌포럼에서 강사를 하고 있는데 공부와 일을 사랑해서 결혼할 생각이 없단다. 나는 내 딸의 진취적이고 멋진 인생을 신뢰하고 지원한다. 내가 영리한 편인데 척박하던 옛 시절에도 적극적으로 인생을 헤쳐 나오고 지금까지 현역에 있어서 딸들 역시 나를 좋아한다.

우리의 옥천 정착은 파란만장과 고군분투이지 싶다. 경찰서 건너편에 살림집이 딸려 있는 가게를 얻어서 “신간만화가게” 라고 신랑이 작명하고 만화방을 시작했다. 나중에 집주인은 2층을 올려서 직접 “관성탁구장”을 운영했다. 우리 가게 옆으로는 “옥일이발관”이 있었다. 전세 기간이 끝나고 우리는 건너편으로 이사해 비어있는 가게(지금은 문방구 가게 자리)에서 계속 만화방을 몇 년 운영했다. 대우장목욕탕 건너편자리 옛날 새마을금고 자리에서도 몇 년 동안을 만화 가게를 운영하다가 현재 BYC 자리 건물 2층을 얻어서 다시 만화가게를 계속 하다보니 세상에나 도합 30년 가까이 만화방을 운영했다. 우리는 비디오 대여는 일체 하지 않고 오로지 만화만 취급했는데 만화방은 학생 아줌마 아저씨 모든 사람이 다 좋아했다. 성실하고 깨끗하게 만화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어느새 돈이 조금씩 모였다. 

드디어 우리 가게가 생겼다. 지금 삼양초등학교 앞에 있는 건물을 사서 “새마을문구”를 인수받아 “주령문구”라고 개명해서 운영했다. 문방구를 접고 “원조할매낙지볶음” 체인점을 운영했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 몸이 쇠약해졌다. 그래서 몇 년 운영하다가 여동생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여동생도 지쳐서 다방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세를 주었다. 현재 삼양초 건너편 다방 자리에 “미소 인력”을 차려서 10년 넘게 남편이 대표로 운영하며 옥천 지역경제에 이바지 중이다. 하하하. 

나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54살에 사물놀이를 시작했다. 옥천문화원 콘테이너에서 배움을 시작했는데 어느덧 20년이다. 청주와 대전에서 배우고 자격증은 서울에서 취득하였다. 꽹과리, 징, 장구, 북 네 가지 악기를 다룰 수 있어야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고, 비로소 남을 지도할 수 있다. 사물놀이 자격증을 취득하고 자원봉사센터에서 사물놀이와 난타, 일반 봉사 등등 20년간 계속하고 있다. 여태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았듯이 앞으로 내 인생은 유쾌하고 즐겁게 북소리로 흥 돋우며 다 같이 어우러져 신나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밝은 아우라가 팡팡 쏟아지는 멋진 난타 쌤님이다. 

한 열흘 온 나라가 벚꽃 사랑이었으나 약속이나 한 듯이 후드득 꽃비를 내려 팔도강산에 하얀 양탄자를 깔아놓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 우리네 청춘도 그리 지나고 말았지만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멋진 할머니로 80세 무난히 넘기고 90세 보장받는 꼿꼿한 몸매와 청춘이 보너스로 까르르 까르르 소담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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