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섭(40년생. 82세. 청산면 백운리)

백운리에도 눈에 내렸다. 펄펄 날리는 눈길을 걸어 개울가에 나갔더니 마른 나뭇잎에 눈이 꽃송이처럼 매달렸다. 발이 푹푹 빠진다. 골목을 쓸며 이런저런 생각이 깊었다. 쌓인 눈이 제법 갈까? 이렇게 눈이 많이 온 모습도 한참만이네. 마당에 놓인 장작이며 빗자루를 챙겨 처마 밑으로 옮겼다. 군불을 지피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가 뜨거운 물을 바가지에 떠서는 눈 위에 몇 번 뿌렸다. 바닥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어 얼음이 두꺼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맘에서다. 아궁이에 고구마를 몇 개 묻었다. 단맛이 퍼지는 군고구마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내에게 줄 간식을 준비해야지. 긴 겨울 밤 티비를 보다가 아궁이 앞에 꺼낸 재속에 묻어 둔, 온기 따스히 남은 군고구마를 꺼내 동치미와 먹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기랴.

아내는 강원도 춘천 출신이다. 길고 깊었던 강원도의 겨울나기에 적응도 되었으련만 춥다고 자꾸만 이불 밑으로 파고든다. 일찍 저녁을 먹고는 노래를 듣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볼륨을 자꾸 높이는 것을 보면 청력이 점점 약해지는 탓인가? 텔레비전 화면에는 젊은이들이 나와서 멋들어지게 노래를 뽑고 있다. 한때는 청년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아내의 환심을 사더니 요즈음엔 처자들과 어린 소녀들이 여럿 나와 또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노래 듣느라고 뉴스 시간도 자주 놓친다. 그래도 노래는 기분을 좋게 해 주고 활기차게 해 주니 얼굴 찌푸게 만드는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는 것보다 낫다.

아내가 늘상 텔레비전을 끌어안고 있어도 이해한다. 이 나이에 아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걸 안해 줄 일이 무어란 말인가. 성격이 워낙 야물고 꼿꼿한 아내는 지금까지 빈틈없이 살아왔다. 아이들도 잘 키웠고 살림도 알뜰살뜰 살아주었다. 본인의 성정이 깔끔하고 허술함을 못 참아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지켜야 안심하느라 스스로 피곤했으련만, 이렇게 평화로운 노년을 맞는 것은 모두 아내 덕분이리라. 밥도 챙겨주고 옷도 빨아주니 이 또한 고맙지 아니한가.

나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백운리로 이사를 왔다. 선대의 고향이었기에 어딘가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던가 보다. 이웃한 친구들과 책보따리를 메고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부모님의 열의와 본인의 의지와 얼마간의 경제적 능력이 따랐으면 중학교에 진학했으련만, 무엇 때문이었는지 따져볼 필요는 없을지라도 지금 생각하면 조금 서운하다. 공부는 거기가 끝이었다. 농사짓는 부모님 뒤를 따라 농번기가 되면 일을 거들고 날마다 소꼴을 벴다. 우리 집 밭둑 논둑의 풀들은 자라기 무섭게 아버지가 베어 내셨으므로 나는 친구들과 지게에 낫을 걸고 산으로 들판으로 나갔다. 발채에 풀을 잔뜩 베어 지고 오는 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부럽고 서러웠다. 외진 오솔길을 걸으며 눈시울이 붉어져서 혼자 노랠 불렀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밭에서 울제 ....’ 이 노래를 소녀들이 많이 부를 듯 싶었지만, 나를 두고 서울로 떠나 간 형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불렀던 듯 싶다.

스무 살이 가까워지자 시골살이도, 농사일도 재미가 없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노동판에 뛰어들어 미장일을 배웠다. 전국적으로 새로 집을 짓고 아파트가 생겨나면서 일거리가 많던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따뜻한 남녘으로 보따리를 쌌다. 거제도 통영의 해안가는 바닷바람이 불었지만 따뜻했다. 봄이 되면 제비처럼 중부 지방과 서울로 일을 따라다녔다. 객지 생활에 재미를 붙여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세월이 화살처럼 흘러갔다. 

32살이 되어 강원도 춘천 처녀를 아내로 맞아 신혼살림을 꾸렸다. 2남 1녀의 자식들이 태어나 집안에 온기가 흘렀다.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좀 더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던 차에 중동 바람이 불었다. 중동에 가서 일하면 한국보다 서너 배의 수익이 보장된다는 소문을 듣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열사의 땅으로 떠났다. 

時給 1불 10센트를 받았다. 그 당시의 환율로 따지면 940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 시절의 기억은 왜 이다지도 선명한지. 

처음엔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인건비보다 네 배 이상의 수익이 보장되어 제법 쏠쏠했다. 그 소식을 듣고 중동 특수를 노리는 소개업자와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대거 중동으로 몰려들어 점점 임금이 낮아졌다. 때맞춰 국내에도 부동산 개발의 붐이 일고 아파트 건립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두고 온 가족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가족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밥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절실해졌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의 간격을 돈이 해결해 줄 수 없었다. 2년 기한이 되자 귀국을 서둘렀다.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고 도란도란 밥을 먹고 아이들의 책가방이 마루에 방에 놓인 걸 보니 저절로 행복해졌다. 아이들의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고, 왁자한 웃음이 마당에 꽃처럼 피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게지. 아이들은 옥수숫대처럼 자라고, 아내가 담그는 김치는 새콤하게 익어가고, 하루종일 힘들게 일을 해도 그 품삯이 내 가족의 맛난 밥이 되고 내 아이들의 책과 공책이 되고 옷이 되고 기쁨이 되니까 나는 즐거웠다.

아내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생활력이 대단했고 살림도 야무지고 깔끔하게 살았다. 만두공장에도 나갔고 전자회사에서도 일했다.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집을 지었다. 모든 재료를 직접 구매하고 계획을 세워 어느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벽돌마다 정성을 새기고 구석구석 온 마음을 다해 지었다. 목수 일을 하던 지인도, 타일을 하던 지인도 힘을 모아 주었다. 다들 형편도 알고, 원재료비며 인건비를 저울의 눈금 보듯이 훤하게 알고 있으니 바가지 쓰지 않고 검소한 비용으로 집을 지었다.

새 집으로 이사하고 눈물이 났다. 내 살아온 삶을 이 집이 증거, 하는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고 결혼하면서 세월이 또 흘렀다. 큰 아들은 회사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하사관으로 공군비행장에 근무하고 있다. 딸도 출가하여 잘 살고 있다. 자식들이 제 몫을 하게 되니 나도 온 몸에 기운이 빠지는 날이 왔다. 60대 중반이 되니 이제 큰 돈 들 일도 없고 내 몸의 근력도 점점 부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노동판에서 흙바람 벽에 서서 살아온 내 삶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 때맞춰 일거리가 점점 줄었다. 욕심을 버리고 조금씩 소일거리로 하던 일들도 모두 버렸다. 내 나이가 일흔이 되었고, 점점 노인이 되어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마을 노인정에는 내 또래들이 여럿이다. 모여서 같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화투짝도 맞추곤 한다. 텔레비전을 보며 누가 노래를 잘 한다, 나는 저 가수가 더 좋다며 입씨름도 가끔 한다. 작년과 올해는 몹쓸 바이러스로 다들 집안에 갇혀 지내니 심심하고 세월이 더디 가는 것 같다. 하루빨리 노인정에 나가고 싶다. 그림 맞추기를 하며 하루의 패를 떼고 싶다. 정월의 솔은 아직도 청청하고  매화는 언제 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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