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박장현 (1936년 12월 丙子生. 85세)

안태고향 백운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정직하게 살고자 마음먹은 나는
박가, 장현이라고 하오.

 

한학에 밝으시던 조부님께 어렸을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세상 살아가려면 글줄은 읽어야 한다는 부친 말씀 쫓아
광주농고를 졸업했소.

그 당시 고등학교 졸업이라면 괜찮은 학벌에
여기저기 취직도 할 수 있었으니
농지농협이나 국립 특작원 쪽으로 나간 친구도 여럿이요.
나는 그 길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소.

부모님은 맏이인 내가 집안의 기둥이라 하셨소.
형제들의 대들보가 되어 풍파를 막아주고
식구들의 우산이 되어 비를 막아주고 
부모의 등불이 되어 길을 밝히라 이르셨소.

군대에서 맘이 좀 흔들렸소.
동기들한테 세상의 온갖 풍문을 귀동냥 하면서 궁금증이 일었소.
전쟁 끝난 서울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부산의 국제시장엔 어떤 물건들이 거래되는지
인천 항구엔 어떤 배들이 들어오는지
강릉엔 무장공비들이 수시로 출몰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도 도회로 나가 그 속에서 어울리고 싶었소.
세상에는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많은 일이 있다고 했소.

제대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부모님이 내 앞을 막으며 말씀하시었소.
“전쟁 끝나고 세상은 흉흉하다고 야단인데
보리밥이라도 같이 나눠 먹으며 함께 살자.
우리 집 장남 없으면 의지할 곳 없어 못 살지.”
그 말씀에 마음이 무너져 할 수 없이 집에 주저앉았소.

벼농사 2,000여 평, 밭농사 1,500평에
식구들의 삶을 걸었소.
봄이면 모판을 만들고 모심기를 했소.
더러는 품앗이도 하고, 더러는 남의 집 일도 거들었소.
논둑엔 개구리들이 뛰고 무논엔 논고동이 기었소.
물길이 좋은 덕이네 논부터 모내기를 시작하면
무논이 늦은 만구네 모내기를 할 즈음이면 
못줄에 한 뼘 간격으로 꽂은 꽃줄이 다 젖어 시들어 갔소.
‘더디다~ 더디다 점심 채비가 더디다.’
‘에헤~ 에~ 헤이’
목청 좋은 수반아지매 앞소리 하면 우린 뒷소리를 질렀소.
새참을 먹고, 막걸리 한 사발에 갈증을 푸는
가을 풍년을 기다리는 나날이 기일게 이어진거요.

밭에는 콩을 심어 콩타작을 하고
고구마를 심어 빼떼기를 썰어 매상을 하고
들깨 참깨 심어 장날에 내다 팔았소.
수수를 심어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마늘은 접으로 엮어 도시에서 온 장사꾼에게 맡겼소.
그렇게 번 돈으로 3남 1녀 자식들 공부 시켰소.

한 녀석은, 외국인 회사에 다니며 잘 살고
다른 녀석은,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하며 돈 잘 벌고
막내는 충북대 건축학과 졸업하고 건축 설계사로 일 하고
딸은 공장 하는 사위 회사 일 도우며 잘 지내오.
모두들 반듯하게 잘 자라 부족함이 없소.

내 자식들 한테 이르는 말이 있었소.
‘정직!’
바르고 곧고 거짓없이 살자는 말이었소.
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자식들도 그리 살고 있소.
그래도 맘에 걸리는 것 있어 늦었지만 고백해보리라.

다음 생에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소.
이 땅의 남자로 살아가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오.
남자의 고단한 일생을 되짚어 보면 하염없소.
가끔은 시골살이 택하지 말고 농촌지도소 계통으로 나가
농촌 계몽 사업도 하고 가치있고 보람찬 생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도 해 보오.

그래도, 부모님께 효도하며 잘 살아온 삶이라고
효자상도 받았으니 이 또한 기쁨이며, 자랑이요.
내 삶을 무던히 따라주고 곁에서 지켜온 안 사람
고맙다는 말, 꼭 전해주려 하오. 고맙소!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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