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자 1948년~

마당에 들어서니 깔끔하고 싱싱한 잔디들이 낯선 이를 반갑게 맞아준다. 나지막한 담 벽 옆에는 옹기화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세월의 흔적으로 금가고 갈라진 화분을 손보고 때우고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보듬어 안고 소중하게 살아오신 듯하다. 연꽃을 듬뿍 담고 있는 오래 묵은 소래기의 모습에 정다움과 세월의 연륜이 켜켜이 내려앉았다.  

“연꽃을 좋아하시나봐요, 꽃도 이쁘고 마당도 살뜰하게 잘 가꾸셨네요.”

어머님과의 인사를 하는 중에도 눈길은 연꽃으로만 가고 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연꽃도 같이 인사를 해준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끝내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잖아. 내속은 진흙보다 더 깜깜하고 썩어 문드러졌지만, 나도 그 어둠을 이겨내고 꽃을 피웠지. 인생의 찬란한 꽃을.”

사랑스런 눈길로 연꽃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뿌듯해 하신다. 어렵던 시절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싶어 연꽃에다 어머님의 고단했음을 비유하신다.  

■ 전사처럼 살아온 세월의 습관

내 고향 청성면 서평리. 무수한 세월 속에서 ‘서평’이라는 고운 이름은 소서리로 통합되면서 옛 이름을 잃어 버렸다. 우리 어릴 적부터 전해오는 말이 있었다. 제 일이 마장이요, 제 이는 의동, 제 삼은 서평이라고. 청성면과 청산면이 옥천군에 속해 있지 않았을 무렵이니 내가 큰 애기였을 때다. 그때 서평리는 농사도 번성하고 먹고 살거리가 많아 끼니 걱정 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마을 농가의 절반이 잎담배 경작을 했었다. 담배농사 짓는 집에는 시집도 보내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담배농사는 고됐다.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들은 한 여름 뙤약볕에 담배 잎을 나르거나 새참을 옮기며 어른이 되어갔다. 스무 살 즈음엔 시집을 가면서 각자 다른 인생길에 접어들었다. 

“남편 나이 44살이었을 때 뭐가 그리 급했는지 서둘러 먼 길을 가셨지. 그때가 큰 딸이 18살 때라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깜깜해서 앞을 분간할 정신이 아니었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어. 남편이 남겨놓은 거라곤 까만 눈동자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뿐이었어. 농사지을 마땅한 땅도 없고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에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이곳 백운리로 이사를 왔어. 농공단지에 있는 공장을 다닐 수 있다고 누가 말해줬지. 공장에서 받는 월급이라고 알량하기 짝이 없어서 초과근무, 야근 등을 도맡아 하면서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았어”

내 나이 40대, 백운리 이웃들과 만두공장에 다녔는데 다들 어려운 살림살이에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애쓰던 시절이라 우리는 동지처럼 속내를 나누면서 일하고 정을 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지만 그렇게 또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때가 생각나시는지 눈에는 습기가 어리면서도 저절로 앙다문 입술은 결연해 보이신다. 아플 만큼 아파보고 모진 세월 겪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엄마는 마음 놓고 슬퍼할 여유도, 위로받을 여유도 없이 오로지 전사처럼 살아온 세월의 습관이려니...

“애들이 착해서 나를 많이 도와주고, 큰딸들은 아래동생들을 보살펴 주면서 잘 커줬어. 새벽같이 일 나가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해서 출근길에 많은 양의 밥과 국을 해놓고 나가면 아이들끼리 먹고, 놀고 하면서 저희들끼리 컷다우. 내 마음 한구석에 많이 가르쳐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아. 상급학교를 못 보내서 애가 타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면서 자기 방식대로 공부하고 직장 나가고 했지. 그래도 아들과 막내딸은 누나들이 도와주어서 대학까지 시켰으니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 큰딸들이 희생을 참 많이 했어.”

그래도 어머니는 여전히 자식들에게 미안해하신다. 언제나 미안하다고만 하신다.

■ 슬픔은 어느새 다 잊어버렸네 

아들 하나에 딸이 다섯이나 되니까 자매들 간에도 서로 아끼고 엄마도 잘 챙겨주고 하더라. 없는 시절에는 어떻게 굶기지 않고 잘 먹일까 가르칠 수나 있을까 부담감에 너무 무거웠었지. 딸자식은 살림밑천이라더니, 결국 나에게 위로와 친구가 되어 주었어. 6남매가 우애 좋게 잘 지내고 가끔 여행도 시켜주어서 호강을 하고 있지. 몇 해 전 다녀왔던 동남아 여행은 너무 좋았어. 우리 새끼들 다 데리고 가는 여행이라서 더 좋았었나봐. 이번 여름에는 코로나 때문에 시절이 어수선하고 돌아다니는 걸 조심해야 하니까 펜션에서 온가족이 함께 놀다왔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 너무 미안하고 또 고맙기만 한 자식들과 다함께 지내는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지.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난 연꽃처럼 잘 자란 자녀들 이야기를 할 땐 연꽃보다 더욱 더 얼굴이 환해지고 신나 하셨다. 영락없는 우리네 엄마의 모습이다. 자식은 엄마의 하늘이고 모진 세월 속에서도 붙잡아온 희망인 것이다.  

■ 해마다 김장 날 잔치 날이 기다려지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우리 집은 잔치집이라 손꼽아 김장 날을 기다린다네. 자식들은 마치 여행 오듯이 설렘과 그리움을 안고 만나면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른다네. 그동안 밀린 수다도 떨고 뭣이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륵거리며 웃느라고 시끌벅적 정신이 없어. 맛있는 김장김치에 푸짐하게 돼지고기도 삶아서 볼이 터지게 먹고, 서로 입에 넣어주고 우애 좋은 모습을 보면 흐믓 하지. 아마도 어린 시절 즈그들끼리 의지하며 똘똘 뭉쳐 지내야했던 정이라 더 그런가봐.”

나는 하도 오래 공장생활을 해서 훈장처럼 디스크가 생겨서 수술했다. 무릎도 조금씩 아파서 좀 불편하지만 살살 달래면서 큰 병 안들 게 조심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아프면 자식들이 속상하고 힘들어 하니까 내가 안 아픈 게 자식들 도와주는거다. 큰딸이 항상 전화해서 조금씩이라도 걸으라고 채근한다. 전화 받은 김에 일어나서 동네라도 한 바퀴 돌다 온다. 

요즘은 편안하고 정신없이 살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도 느긋해져 벙글어진 연꽃마냥 이쁘게 살려고 한다. 새벽부터 서둘러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이제야 맘 편히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끼면서 한껏 게으르게 지내도 되니 세상살이가 재미있어진다. 잠이 많이 줄어서 새벽에 일어나면 앞마당에 나가 풀도 뽑고 화초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다. 때로는 가슴깊이 한쪽으로 밀어두었던 남편과의 추억도 살며시 꺼내 보면서 남편에게 물어 본다. 그렇게 급하게 떠난 그곳은 어떠냐고 좋으냐고, 내가 보고 싶지 않냐고, 우리 아이들 잘 자란 모습 보고 있느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  

“이제는 아무런 바람도 여한도 없이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며 살고 있어. 연꽃이 진다고 슬퍼할 것도 아닌 것이 꽃이 지고난 후 연밥으로 결실을 맺거든. 나는 매화처럼 화려한 꽃은 아니지만 내 소임을 다했고 나의 사랑스러운 자식들로 결실을 잘 맺었으니 하루하루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게 나의 마지막 소임이리라. 가난하고 힘든 날 들 다 지나고 이제는 마음부자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바지런 하시고 손끝 야무진 어머니의 마당정원과 연꽃들은 항상 이쁜 모습으로 어머니의 위안이 되고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진흙 속에 피어난 연꽃 같은 우리네 어머니의 삶, 참으로 위대하고 고결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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