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복 1941년생 구술생애사
박영복 1941년생 구술생애사
  • 옥천닷컴
  • 승인 2020.06.2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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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형들이 떠난 집안을 지켜야 하는 자손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던 박 선생님. 마음을 다잡아 어른들 보살피며 고향땅에 뿌리를 내렸다. 떵떵거리며 잘 사는 양반 댁이라 지켜야 할 법도도 많았다. 챙겨야 할 식솔들도 적지 않았다. 너른 집안 살림 맡아한다고 內子가 고생했다. 그래도 군소리 없이 많은 식솔들 다 챙겨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농사까지 도왔으니 내 인생 8할은 아내 덕이다.

 

■ 방귀깨나 뀌던 박씨네
나는 밀성 박씨 충헌공 파 23대손 영복이여. 원래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치면 69대손이고 泳子 항렬이지. 우리 동네에 있는 집안 재실을 관리하고 돌보는 일을 평생 해 오고 있지. 우리 박씨 재실종회장님을 대여섯 분 모시다가 지금은 박영대님과 손 맞춰 종씨 일을 보고 있으니, 내가 이만하면 선조들께 타박 받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네.
나는 형제 많은 집안의 넷째로 태어났다. 가문 넓고 식구 많은 집안 안살림을 도맡은 모친은 늘 바쁘셨다. 넷째를 낳았지만 편히 앉아 젖 물릴 시간도 부족하여 나는 젖배를 많이 곯았다. 그래서 형제 중에 키도 제일 작고 야위었고 몸이 부실한 편이었다. 
살림 넉넉하던 조부님은 자손들이 공부를 많이 하여 사회와 국가에 도움 되는 동량(棟梁)으로 자라길 희망하셨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외지에 보내 공부하던 형님 두 분은 6.25때 행방불명이 되셨다. 두 분 형님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시던 조부님과 부친은 식자우환(識字憂患)을 한탄 하셨다. 그 시절에 배움이 깊고 아는 게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여 혼돈과 갈등의 시간을 많이 겪었다. 전쟁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고 편만 나뉘었던 가 보다. 두 형님이 어찌하여 그리 되셨는지, 전쟁 뒤에 생사는 어찌 되셨는지 명확한 것은 없다. 다만 북으로 가셨을 거라는 소문만 들으며 찹찹한 마음을 달래보았다. 
그러하였음에도 나는 가문의 財力으로 우석대학교 상대에서 공부를 하였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밤 새워 토론하고 젊은 혈기를 쏟았다. 그 때가 아득한 옛일처럼 아득하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군대는 필수요, 의무였다. 나는 월남 파병대에 지원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십자성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이바지 하였다. 또한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우도록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월남에는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많이 왔었다. 이미자, 남진, 배삼룡 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맡은 보직은 의무병이었다. 총격전으로 다친 병사가 있다는 연락이 오고 헬기로 이송되어 오는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도왔다. 약재상에서 일했는데 수술한 환자,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약을 보급하는 담당이었다. 
전쟁터가 아무리 험하고 인정사정없이 적을 죽이는 곳이었지만 다친 사람에게는 예외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환자는 치료하고 보살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베트콩들이 다치면 헬기로 태워 와서 치료해 주고 다시 적진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했다. 물론 속마음이 어찌 동일할까 만은. 같은 헬기에 실려와도 아군을 먼저 지혈하고 상처에 소독제를 바르는 정도의 차별은 했다. 그렇게 살려 보낸 베트콩이 우리 군인에게 다시 총을 쏘고 전쟁터로 돌아가서 적으로 마주 보는 게 전쟁이다. 참으로 무섭고 가슴 아픈 곳이다. 이승에서 만나는 지옥이다.

 

■ 내 인생의 결실, 8할은 아내 덕이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그야말로 노총각이었다. 요즘과는 달리 스무 살만 넘으면 장가들고 시집가던 시절이었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말처럼 영동 처자 여희숙을 각시로 맞았다. 호리호리한 몸매, 예쁜 얼굴에 여고까지 나온 재원이었다. 제대하며 받은 퇴직금도 있었고 월남 파병 용사에게 주는 특별 월급도 있어서 분가할 계획으로 설렜다. 그런데 조부와 부친이 한사코 분가를 막았다. 내가 분가하면 따라나서겠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할 힘이 내겐 없었다. 아내는 내 여건을 두루 살피고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다. 
이장도 하고 새마을 협의회장을 맡아 마을일에 기여도 했다. 새마을 지도자상으로 대통령상도 수상했다. 상금으로 받은 300만원은 마을의 석축공사 하는데 기증했다. 그 300만원으로 50미터를 쌓았으니, 마을을 위해서 나름대로 일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내자도 청산면 새마을협의회 부녀회장을 6년 하면서 행안부 장관상도 받았다. 부창부수였다.
아들 범식이는 충남대를 졸업하고 오송 식약처 행정실에 근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얼굴 본지 오래 되었다. 그래도 나랏일 열심히 하고 국민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로 뿌듯하고 보람을 느끼고 있다. 며느리는 피아노를 잘 친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여러 군데 봉사활동도 다닌다.
딸 셋은 첫째는 가정과, 둘째는 안경공학과, 셋째는 전산정보처리과를 졸업하여 제각기 관련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위들도 다정다감하고 어른들께 예의 바른 반듯한 사람들이다. 다들 잘 자라주었고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부친이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내 어릴 때 당질이나 집안 조카들이 자주 우리 집에 왔었다. 그 때마다 부친이 사탕을 나눠주면서 도란도란 얘길 나누시는 걸 옆에서 보며 자랐다. 맘이 따뜻하고 자상하게 사셨으니, 부친의 그늘이 넓고도 깊다. 집안 대소사에 친척들이 모이면 아직도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부친 신 벗어 놓은 곳도 못 따라 가는 사람이다. 
지난 얘기지만, 대학 동창들 중 공직에 나가 승승장구 하며 고관대작의 길에도 오른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나도 부모님 곁을 떠나 공직생활을 했으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인생은 그저 一場春夢이다. 아직도 건강하고 자식들은 잘 지내고 손주 들 모두 밝고 영리하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애주가인데 평생 술 고프지 않고 制止받지 않고 원하는대로 마시며 즐겁게 살았다. 건강 상할까 염려하는 內子의 잔소리는 좋은 안주다. 그게 제일 맛난 안주이며 평생 물리지 않는 음식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월남전 참전 용사로 우리 집 대문에는 ‘국가유공자의 집’이란 명패가 붙어있다. 고엽제 피해자로 7급을 받아서 매달 몇 십 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있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 용돈 걱정 않고 통장에 돈 떨어지는 일 없이 살고 있다. 더 바란다면 그때부터는 욕먹을 심보, ‘욕심’이다. 이만하면 자존심 지켰고 족하다.

작가 조용숙
작가 조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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