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리 배정숙(77세) 어르신 (1944년~ )
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51)

백운리 마을 주차장 입구로 작은 차가 들어왔다. 배정숙 어르신이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쉬이 나오지 않는 것은 젊고 고운 자태 때문이었다.

가지런히 쓸어 올린 머리, 목에 살짝 둘러 멋을 낸 스카프. 

미소까지 곁들여 만남은 첫 장면부터 예쁘게 그려졌다.

차를 타고 어르신 댁으로 이동하면서 한마디 하신다.

내 인생을 노래로 하면 '불효자는 웁니다.' 라고.

다들 까르르 웃었지만 운전석 거울에 비친 어르신의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다 젖어 있었다.

■ 불효자는 웁니다.

대전 삼성동이 고향인 나는 삼성국민학교를 다녔다. 무심한 세월 속에서 고향의 모습도 변했다. 유년 시절 학교 운동장은 정문에서 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간간이 대전 나들이 때 지나면서 바라보이는 삼성국민학교는 그 시절 운동장의 반밖에 커 보이지 않는다. 운동장이 동네에 한 귀퉁이를 내어주기라도 했나. 나도 나이 들었고 학교 주변에 높은 건물이 올라가면서 우리가 뛰어놀던 곳이 눈에 반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그 때를 지날 땐 그 슬픔이 전부인양 죽고 싶고 그 기쁨이 최고인양 그랬다. 세월 속에서 수많은 희로애락과 만나면서 그 슬픔도 기쁨도 먼지처럼 작은 喜悲(희비)의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맵시가 좋아서 미용기술을 일찌감치 배웠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6남매를 건사하시는데 나는 미용 하겠다고 파주까지 일을 찾아서 떠났었다. 철이 없어도 유분수지, 맏딸이 되서 내 욕심만 차리고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을 보듬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나도 어머니처럼 자식들 키우며 애간장 타들어 가는 서러움이 마음자리 구석구석에 배이면서 어머니의 아픔을 그때서야 겨우 읽어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죄스러움이 남아 '불효자는 웁니다.' 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스무 네 살 한창 예쁜 나이, 파주에서 미용 일을 하던 중 잠시 대전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옥천 청산사람이 중신을 서서 남편을 소개받았다. 잠시 집에 들렀다 파주로 올라갈 계획 이었는데 운명이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남편과 충북 영동에서 맞선을 보았다. 사람은 좋았지만 마음에 끌리지 않은 여러 가지 여건이 내키지 않았다. 남편은 인물도 좋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의 구애에 마지못해 결혼했지만 운명은 그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운명의 덫에 걸렸다는 명문이 탄생했나보다. 운명의 덫에 걸려보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싶다.

20대 젊은 날
먼저 떠난 남편을 추억해주는 공로패

■ 천정 낮은 초가집, 답답한 내 마음에 덤 하나 얹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8남매의 맏이였던 남편이 건사해야할 가족은 열 명도 넘었다. 도시에서 살다온 내가 하루아침에 대가족의 안주인이 되어 하루하루 숨이 턱까지 찼다. 

어느 날 밤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려고 밤에 몰래 나왔다가 시어머니한테 붙잡혀 온 적도 있었다. 밤길 가로등도 없고 동네도 낯설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도 안 되고 버스가 하루에 두세대 밖에 안다니는 동네다. 내가 길가에 섰다고 그 밤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가 내 앞에 설리도 만무하다. 

시골의 漆黑(칠흑) 같은 밤은 내 신세처럼 앞이 하나도 안보였다. 더군다나 시어머니가 살살 뒷짐 지고 따라오셔서 나는 허탈하게 시어머니를 쫒아 집으로 다시 돌아간 웃지 못 할 비화를 생각하면 쓴 웃음만 나온다.  

고부간은 해답 없는 숙제를 같이 풀어나가야 하는 관계라 좋으신 분이었지만 여느 집의 고부간처럼 나 역시도 마음속의 응어리들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시어머니 돌아 가시기전 당신이 평생 끼고 있던 금가락지 두 쌍을 주셨다.

"애미야 고생 많았다. 내 해줄건 없고 금가락지 너한테 주련다."

어머니가 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서 주셨다. 시집와 어머니와의 갈등도 있었고 때론 묻어 버리고 때론 뒤꼍에서 몰래 눈물 훔치며 그 세월을 보냈다. 

어머니께서 가락지를 빼서 내 손가락에 끼워주시던 날 어머니와 화해를 했다. 그건 마음으로 우리 둘만 아는 화해였다.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 살림을 돕지 않아서 밥 짓는 것도 어설펐다. 새댁 때는 퍼석거리는 보리밥으로 시아버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일쑤였다. 모든 게 삐거덕 거리며 내 일상은 파열음만 내고 있었다. 

남편은 청산 월명광산에서 덤프트럭 운전과 기술자로 일했다. 우직한 남자였지만 여자의 속앓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심성까지는 바라기 힘들었다. 아마 그 시절을 살았던 남정네들이 대부분 그러했기에 여자들이 속병이 깊어진 까닭일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도 푸념과 한숨은 밭고랑에 묻어버리면서 아이들 어릴 때 청산 장터에서 '삼성 미용실'을 열었다.

'삼성' 이란 이름도 친정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 이름이었다.

솜씨도 있었지만 시골살이가 답답해서 숨통도 터줄 겸 미용실을 차렸다.

청산 장날이면 장보러 나왔다가 머리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소일거리 이상의 살림살이도 보태고 우리 아이들 어릴 때라 나도 젊어서 동네 멋쟁이 소리 들으면서 일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미용실이 북적이고 손님 맞는 재미에 고단한 일상도 견뎌냈다.

아이들과 시동생 시누들이 나이들이 고만고만해서 제대로 입히지도 먹이지도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옷 한번 제대로 못해주고 실밥이 보일 때까지 입혀 보내야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동생 시누에게도 마음뿐이지 제대로 못해준 내 마음을 알 리가 없을 거라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그 시절들을 보냈다. 

명절에도 식구들 건사하느라 친정에 가보지 못하면서 친정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움이 쌓여만 갔다.

남편이 한국도로공사에 취직하면서 용산 사택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20년을 용산사택에서 살았고 백운리에 시부모님과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 운전 면허증을 따서 새벽이면 차를 몰고 와 식구들 밥을 차려주고 다시 용산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작은 차가 너무 기특한 도우미다. 

루시아 (세례명)로 태어난 날
기쁨이 되는 손주들

■ 밭고랑에 다 묻어버린 푸념들

살면서 속앓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밭고랑에 푸념도 묻고 한숨은 호미질로 날려 버리는 게 상책이다. 그 세월을 지나고 이제 증손녀를 보는 할미가 되었다.

우리 딸이 딸을 낳고 그 딸이 또 딸을 낳았다. 무심한 세월 속에서 진짜 할머니가 되었다. 거울을 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증손녀를 보았지만 우리 백운리에 아이 울음소리 들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다. 안쓰러운 일이지만 우리가 후대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책임도 짊어지게 된 세대다.

그래서 9988 행복 지키미 활동을 하면서 나보다 위세대의 형님들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 민요도 불러 흥으로 위로해드린다.

맥이 풀리는 날은 즐겨 부르는 민요 '노들강변' 을 구성지게 불러보는 맛도 일품이다.

남편은 당뇨로 합병증에 중풍까지 와서 8년 고생 하다가 21년 전에 돌아가셨다. 수발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먼저 가는 이는 그저 측은하다. 시부모님 다니던 청산 성당에 나가고 있다.  루시아 라는 세례명도 얻고 성당의 자매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도 한다.

넓은 집에 혼자 있지만 새댁 때부터 같이 이웃으로 만나 벗이 된 양갑순이 등 마실 다니는 동무가 있다. 게다가 텃밭에 상추며 부추 고추들이 살가운 벗이 되었다.

매일 자식처럼 돌봐주고 이웃들에게 나눠주면서 선심도 종종 쓴다. 말없는 녀석들이지만 내 손길을 타야 윤기 나게 자랄 수 있어서 새끼마냥 돌본다.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내 벗이 된 나이다. 인생의 응어리, 슬픔, 다 상추 밭고랑에 살포시 묻고 매일 아침 거울 보면서 올림머리 올리는 여자로 살고 싶다. 꽃무늬 스카프도 잊지 말고. 

운명의 덫 인줄 알았던 삶의 무게들이 세월 속에서 인생의 덤이 되어 이제 나를 평안하게 위로하고 있다.

마을 형님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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