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라는 이름 대신 엄마로 살아온 시간들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가 개인 오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마을을 찾았다. 대문을 열자 가지런한 자갈 마당에 수줍은 작약 한 송이가 먼저 반겨주었다. 바로 양춘자(78) 어르신댁이다. 칠십 넘은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는 소소한 일상 한 가지도 역사책으로 엮어도 될 만큼 우여곡절이 많다. 울고 웃으며 듣고 그 속에는 살면서 우리가 가야할 길 까지 안내되어있었다.

■ 기억의 처음은 6.25때지
“보은 삼성면 어디쯤에서 여섯 살까지 살다가 6.25때 엄마 손 잡고 피난 와서 광기에서 좀 떨어진 사구막이라는 동네에서 살았어. 엄마 손 잡고 광기에 있는 사구막으로 피난 갈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군인들이 배가 고픈지 늙은 오이를 따가지고 껍질 때 먹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어”
양춘자 어르신이 기억하는 6.25는 배고픈 군인들이 늙은 오이를 껍질째 씹어 먹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또 하나는 엄마 손을 잡고 오빠 동생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나 광기 사구막이라는 지역으로 이사했던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엄마가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광기로 가는 길목에 꽤 넒은 또랑물이 있었어, 어린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물을 건넜어. 어려서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추측컨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광기라는 곳에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일궈 놓으신 것 같아. 집하고 산비알 밭이 있어서 그 밭을 일구면서 살았어. 나는 어렸을 때니까 주로 오빠랑 엄마가 그 밭을 일군 것 같아. 홀로 우리 삼남매를 키운 엄마가 고단한 삶이셨어. 엄마는 틈틈이 두부 장사도 하면서 정말 고생고생하면서 우리 삼남매를 키우셨지”
남편도 없이 어린 삼남매를 키우셨을 양춘자 어르신 모친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대충 짐작이 되고도 남는 대목이다.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 앞에서는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자식들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고 살았을 시절이기에 딸자식 학교 교육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양춘자 어르신도 그저 어머니 밑에서 집안일을 배우며 큰 애기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 가정도 외롭게 지켜냈다
양춘자 어르신은 지인의 중매로 스물한 살에 청산면 명치리 마을로 시집을 오셨다. 
“우리 오빠한테 수양 누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광기에서 살다가 청산으로 이사를 왔어. 오빠 수양 누나가 내가 혼기가 차니까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주명선이라는 남자한테 중매를 했어. 그래서 명치리로 시집을 왔는데 시집오고 얼마 안 있다가 남편이 군대를 간 거야.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그리고 손 위 형님까지 있는 집이었어. 눈앞이 깜깜했지. 시어머니도 좋은 분이고, 형님도 좋은 분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시집살이가 힘들게 느껴졌는지 몰라. 또 그 시절에는 군대도 꼬박 3년을 살다가 왔잖아”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생판 모르는 남자 하나 믿고 시집왔는데 그 남편마저 군대에 갔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지루했을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양춘자 어르신은 시어머니와 손 위 형님이 다 좋은 분들이었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남편이 제대를 하고 나서도 바로 분가를 못했어. 그래서 시댁에서 한 7년을 살았던 것 같아. 큰 아이 낳고 분가를 하는데 얼마나 좋던지 그 밤을 희죽 희죽 웃으며 밤을 꼬박 세웠어. 그렇게 분가해서 넷을 더 낳았지, 남편이랑 살 때는 농사지으면서 살았어. 그런데 행복도 잠시 남편이 내 나이 마흔일곱에 병으로 먼저 세상을 등진 거야. 남편도 없는데 나 혼자 농사를 지을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만두 공장이라도 다니려고 얼마 안 되는 밭 뙤기랑 집을 다 팔아서 지금 살고 있는 백운리로 아이들 데리고 이사를 나왔어. 백운리에는 그 당시 만두 공장이 있었거든”
아직은 젊은 나이에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품에 안고 백운리로 나온 양춘자 어르신은 그 당시 천이백 만원이란 돈을 어렵게 마련해서 여섯 식구 몸 누일 구옥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서 만두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어르신은 마흔 일곱부터 아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엄마의 세월을 견뎌냈다. 

■ 엄마의 세월
“처음에는 만두 공장에 한 3년 다니다가 나중에는 미아전기로 옮겨서 또 3년을 다녔어. 그러다가 아이들 학비가 나온다는 풍한방식으로 옮겨서 한 10년을 더 다녔지”
농사일만큼 공장일도 힘들었지만 자고나면 한 뼘 씩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는 게 어르신의 인생이었다. 오로지 엄마의 세월이었다. 이제는 다섯 남매가 따로 가정을 일구고 손자 손녀까지 대가족을 이루었다. 지금처럼 대가족이 되기까지 어머니의 그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거실 벽면을 차지한 칠순 가족사진만 봐도 배부르다. 어르신은 당신의 고생은 하나도 기억에서 소환하지 않는다. 
“우리 막내딸은 대학까지 나왔어. 그게 다 큰 딸이 중학생이던 지 동생을 데려다가 가르친 덕분이지. 우리 큰 사위 같은 사람 세상에 또 없어. 우리 막내딸이 지 언니 집에서 학교 다닐적에 지 형부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언니 몰래 처제 용돈을 그렇게 챙겨줬대. 우리 막내딸이 지금도 그래. 나는 큰 형부 같은 사람 있으면 시집 갈 거라구. 우리 큰 사위는 처갓집에 너무 잘하는 고마운 사람이야.”
지금 어르신이 살고 있는 집은 자식들이 하나 둘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십시일반 모은 돈과 양춘자 어르신이 모은 돈을 더해서 16년 전에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힘든 세월을 견뎌왔을 양춘자 어르신은 고생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맑은 분이셨다. 누구 하나 미워하는 마음 없이 고운 마음으로 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온다는 양춘자 어르신의 말씀이 오랫동안 귓바퀴를 맴돌았다.

작가 조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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