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헬레나(1934.12.21~) 구술생애사
김영애 헬레나(1934.12.21~) 구술생애사
  • 추억의 뜰 김경희 작가
  • 승인 2020.05.20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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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할머니, 신앙생활 하시나 봐요?

예쁘장한 헬레나 어르신은 백운리 토박이시다. 부침개를 부쳐 들고 나가도 식지 않을 거리에 여동생들이 살고 있다. 한 부모 밑에서 핏줄로 인연을 맺고 이웃으로 성당의 자매로, 나이 들어가는 어르신에게 더없는 위안이다.

 

■ 여동생들과 한동네 사는 운 좋은 할매 
줄줄이 여섯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사이가 좋으셔서 결국엔 쫑마리 아들까지 보셨다. 옛날 백운리는 200호 넘을 정도로 아주 컸었는데, 친정에 논밭이 많아서 쌀농사 덕분에 밥술이나 떴기에 부자 소리 들었다. 친정에서는 딸 여섯을 모두 공부시켜주었다. 나는 그 중 가장 머리 좋고 공부욕심도 있어서 공부도 잘했지만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셔서 국민학교만 마쳤다. 일곱 남매 모두 청산 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공부시키던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공부시켜준 부모님들은 일찌감치 깨인 분들이었다. 막내 여동생은 청주교대를 졸업해서 부부교사로 은퇴하였다. 남동생은 인천대학교에서 교수하고 퇴직했다. 공부하고 싶던 나의 안타까운 빈자리를 동생들이 채워주었다. 이제 나 포함 여자 셋 남동생 하나만 남았다. 막내 여동생은 지전리에 살고 나와 넷째는 백운리에 산다. 지척에 여동생들이 사는 것만큼 큰 위로도 없다.

 

■ 준비 없이 남편을 떠나보내다
같은 마을에 살고 계시던 외삼촌의 소개로 4살 위 총각을 만나 내 나이 22살에 결혼하였다. 친정이 딸부자집이라 아들부자인 집과 성혼하였다. 아들 5형제 딸 둘 중 셋째인 남편은 인물 좋고 성격 좋고 모든 게 다 좋았다. 그런데 세상이치가 다 좋을 수 없어 남편을 조금 일찍 떠나보내는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딸 하나 아들 셋 낳으라고 매일 비셨다는데 정성이 닿았는지 말대로 됐다. 나는 둘째 며느리라 시부모를 모시지 않았지만 아래위 집에 살면서 시부모님들 옷은 다림질해서 깨끗이 입혔다. 친정엄마가 솜씨가 좋아서 한복 본을 말라서 주면 내가 바느질해서 시부모님께 드렸다. 한복 광목 명주 베로 시부모님 옷, 남편 옷, 애들 옷도 만들어 입혔다. 시댁에서 논 2마지기를 우리에게 떼어줬더니 친정에서 논 3마지기를 얹어서 주었는데 욕심 없던 나는 바로 돌려주었다.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던 남편이 44세일 때 감기가 들렸다. 몸이 으스스하고 기침이 나온다고 하면서 혼자 시장에 있는 약국에 가서 조제해온 감기약을 먹었다. 이상스레 약을 먹고 나서 계속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 본인이 스스로 버스를 타고 옥천병원으로 가서 3일 동안 입원하다가 그길로 돌아가셨다. 남편을 황망히 떠나보내고 힘들었지만 나는 또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야했다. 나의 슬픔과 아랑곳없이 오늘은 사라지고 내일은 또다시 찾아왔다. 그게 인생이다.

 

■ 새마을 지도자가 되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거셌다. 백운리 지전리 각 부락에서 여성 새마을지도자를 1명씩 뽑았는데 면서기들이 나를 뽑았다. 혼자 네 아이를 키우기도 버거운 상황이라 거절했다. 한 날은 오밤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면서기가 “교육 받으러 갑시다.”그 밤에 나를 깨우러 온 절박한 마음에 나도 수락을 했다. 옥천 소재 연수원에서 전국에서 선발돼 온 여성지도자(새마을부녀자)들과 함께 2박 3일씩 교육받았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마을 사람들이 다 똑똑하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기에 내가 선정되어 새마을 지도자를 10년 정도 했다. 정신교육부터 받고 농로, 도로, 수리 시설과 같은 기반을 닦아주었다. 전기와 전화 보급으로 농촌이 살기 좋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나도 새마을운동은 연수교육을 통해 당시에 만연하던 술과 도박을 줄이고 피임교육이나 마을회관을 건립하는 등 적극적인 새마을사업에 참여했었다. 다 지난일이라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문서의 한 장 이지만 마을이 성장하는데 치열했던 한 순간을 보냈다. 

 

■ 민주화 시위하는 신부님들 식복사로 섬겼다
성당의 신자도 아닌 시아버지가 풍이었는데 청산성당의 수녀님들이 매일 방문하여서 환자를 닦아주고 한결같이 봉사하는 태도에 고맙고 감동되어 저절로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셔서 결국 우리 집에 모셨다. 문 열고 그윽하게 쳐다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청산성당에 주임신부님들이 식복사가 없어서 많이 불편하였는데 내게 식복사를 요청하셨다. 신부님은 50대인 내게 식복사를 부탁했는데, 사실 월급 줄 형편도 못됐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식들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있고 하느님이 계시는 거지, 신부님이 제 자식들 책임질 수 있으세요?”따지자 “복음정신으로 살아야지, 이 자매님이 왜 이러냐?”받아넘겼다. 김*일 박정흠 두 신부님의 식복사로 근무하면서 한 달에 2만5천원 받았다. 
때는 민주화의 열망으로 반정부시위에 30대인 신부들이 깊이 가담할 때였다. 새마을지도자 등의 인연으로 잘 알던 경찰과 면서기들이 자주 와서 “높은 자리 있을 때 나 좀 살려달라, 신부님 어디 가셨나, 성당에 있었냐?”하고 조사를 받았다. 김*일 신부와 청주교구 소속 신부들과 안동교구 신부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걸리면 바로 영창 갈 때였다. 때로는 차 트렁크 속에 타고 오셔서 소통하고 데모를 주동하기도 했다. 시골 아낙이었지만 격동의 현장에 놓여 졌던 간담 서늘한 기억이다. 이후 청산성당 수녀님의 소개로 안동교구로 내려가서 공한영신부, 전상업신부 식복사로 27년 살면서 봉사료 27만원을 받았다. 2007년도에 드디어 타향살이를 마치고 백운리로 돌아왔다. 

■ 시련은 인생에 양념이다
내 나이 78세이던 2013년도에 집 마루에 앉아있는데 자꾸만 어지럽고 계속 토했다. 뒷집 윤경보씨 아내가 그때 새댁이었는데 시끄럽게 토하는 소리를 듣고 사다리를 타고 담장을 넘어와 내게 수지침을 놓아 주었다. 그 사이 119에 신고하고 동서도 오고 장터에 살던 시동생이 오고 온 동네가 시끄럽게 북적였다. 119를 타고 대전 선병원에 가서 수술했다. 뇌종양 수술을 받고 4일 만에 깨어나서 집에 돌아왔는데 나는 사람도 못 알아보고 누워 있었다. 둘째며느리가 똥오줌을 받아주었다. 사람도 못 알아보고 싹 달라져서 돌아오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 가족과 이웃들이 보여준 마음에 탄복했고 형제나 다름없이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네 인심이 나에게 큰 힘이 된다.
퇴원 후 통증이 너무 심해 다시 병원에 가서 열어보니 붕대 조각이 발견됐다. 병원에서는 내가 큰소리 없이 수용하니까 사람들이 신앙생활하시는 분 같다고 한마디씩 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아프다고 난리 칠 텐데 찍소리도 안한다고 ‘이쁜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 후 지금까지 같은 의사에게 3달에 1번씩 진료 받고 있다. 
나는 남편과 딱 18년을 살았지만 먼저 간 데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 4남매를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친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내 얼굴에 곱게 그려진 주름은 하느님이 내게 주신 훈장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지도이지. 원망과 한숨 대신 감사와 기도로 예쁘게 그려지는데 50년이 걸렸거든.

작가 이연자
작가 이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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