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 조분리 출신 영동군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안재찬 회장
옥천, 보은, 영동은 내내 한식구, 공동의 농업, 관광 정책 등 해나갔으면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안재찬 회장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안재찬 회장

청성면 조분 리는 정말 알고 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도로가에 조그만한 이정표와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마을,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이다. 누가 그 산 언덕 깊숙하게 마을이 있다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조분리에도 50년 전에는 100호가 넘게 살았고 아이들만 해도 30여 명이 훌쩍 넘었다. 묘금초등학교 등굣길은 그래서 북적거렸다. 한시간 넘은 거리를 줄을 지어 갔는데 도랑가 바위밑에는 나병환자들이 사는 곳이라서 한참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순흥안씨 집성촌이었고 마을 주민들끼리 우애가 깊었다. 사실 고립된 마을이라 온 마을 주민들이 더 살갑고 가족같았다. 부친인 안상복씨는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더랬다. 궂은 일 나서서 하고 장남이었지만 재산을 탐내지 아니했다. 그래서 형제간의 갈등과 분쟁도 없었고 마을 일이라면 제 일처럼 나섰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안재찬(63, 영동 매곡면 옥전리)씨는 영동에 가서도 4H 활동 10년, 자율방범대 15년, 의용소방대 20년, 그리고 92년부터 시작한 새마을지도자와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다. 무려 28년째다. 2010년 부터 매곡면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을 5년 남짓 재직하다가 2015년부터는 영동군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을 5년 넘게 맡고 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4년 12월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평생 봉사만 하고 살았던 것. 집안은 가난했다. 안재찬씨가 묘금초 2학년2학기 때 매곡면 옥전리로 온 가족이 이사를 왔지만, 가진 땅과 집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 땅에서 시작해야 했다. 지금은 자수성가해 3천여 평의 포도밭에 하우스 6동을 경작한다. 샤인머스캣과 캠벨, 충랑 등 다양한 포도를 재배하며 포도 부농의 꿈을 여전히 꾸고 있다. 오지에 살 때라 출생신고마저 3년이나 늦었다. 원래 58년 생이지만, 3년이 지나 출생신고를 하러 가니 동생들과 나이가 같아져 난감했지만, 당시 나이 정정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들을 한살씩 늦춰 서열을 만들었고 그렇게 3년 젊은 61년 생으로 여전히 살고 있다. 불과 2학년 때까지 살았지만, 그 때 기억이 지금의 고향 생각을 형성했다. 오지 학교라고 해마다 행사때 군용트럭이 와서 아이들 뒤에 태우고 운동장 한바퀴 빙 돌아준 것도 좋았던 추억으로 기억이 난다고. 아버지는 영동으로 이사하고 담배농사를 대리경작으로 지었다. 돈이 없다 보니 사채를 끌어다 썼고 그것은 두고두고 빚이 되었다. 김영삼 정부 때 쌀 전업농에게 장기 저리로 땅을 구입하게 해서 그 때 땅을 샀고 조금씩 재산을 그나마 불릴 수 있었다. 가난해서 아버지는 재산을 물려주진 못했지만, 사람과 마을, 지역 공동체에 어떻게 헌신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 가르침은 생활속에서 절로 스며들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열심히 하면 눈에 띄었고 사람들이 추켜 세워줘 면 협의회장과 군 협의회장까지 차례로 올랐다. 명예를 취하려 한 게 아니었다. 군 새마을회장이 각중에 공석이었을 때 누가 천거를 하였지만, 사양했다. 하려던 사람이 많았고 괜한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은 정리했다. 자리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영동군 11개 읍면에 독거노인들 집에 도배, 장판, 집수리 하는 사업은 매년 12가구 가까이 해주고 있고, 농약병 수거 등 재활용 사업을 통해 남은 수익금을 각 읍면 지회에 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보은, 옥천, 영동은 정서와 문화가 비슷한 한 생활권으로 전현직 지도자협의회장들끼리 지역을 돌아가면서 두달에 한번씩 모임을 한다고. 그처럼 옥천은 멀리 떨어진 고향이 아니라 가까운 고향이다. 마음 내키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고향은 한참 쪼그라들었다. 그나마 알았던 어르신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고 귀농한 사람들도 더러 있어 생경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고향 산천은 변하지 않았다. 갈 때마다 초심을 돌아본다. 선친 산소가 있어 고생만 하다 간 선친들을 생각한다. 
“옥천은 늘 마음에 품고 있는 고향이에요. 제가 포도농사만 30년인데 청성면에 잇는 포도연구소를 제집 드나들 듯 했거든요. 그 때 옥천에서 포도 농사 잘 짓기로 유명한 곽찬주 회장과도 친분을 쌓고 그랬죠. 옥천은 포도 폐농을 많이 해서 그 때 철거한 중고 하우스 자재가 다 영동으로 건너 왔다고 보면 되요. 영동에도 이제 옥천 못지 않게 하우스 포도를 많이 하죠. 영동 광개토산업이라고 농자재 판매를 하는 황인천씨가 또 옥천 사람이에요. 영동에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평판도 좋아서 여기 농자재를 많이 쓰죠.”
그는 영동사람, 옥천사람, 보은사람이라고 딱히 구분짓기보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인접지역이다보니 다 얼키고 설켜 있어 한 식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매곡면 옆에 황간면에도 묘금초등학교 동창이 살아요. 물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이고 결혼으로 혈연으로 인연이 얼켜 있어 올라가다 보면 다 연결되어 있더라구요. 매곡과 황간은 김천과 가까워도 정서적으로는 충청도라 옥천, 보은과 많이 어울리는 편이죠. 거꾸로 옥천군 새마을협의회 강정옥 회장은 영동 심천이 고향이지만, 옥천에서 군의원도 하고 활동도 대부분 옥천에서 했잖아요. 그런거 보면 지역을 구분지어 니사람 내사람 가리고 니땅 내땅 하는 것 보다 한데 어울려 같이 하는 사업들을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포도축제도, 관광지 공유도, 농업 정책도 도토리 키재기 식 경쟁을 하기보다 협동과 연대로 같이 공동의 것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겼다. 
그는 옥천보다 영동에서 더 오래살았고 영동의 관계가 더 넓었고 뿌리도 깊었다. 앞으로 그의 자손들도 영동을 고향이라 여길 것이다. 4남매 중 세 딸들은 타지로 시집을 갔고 막내아들이 남아 황간에서 직장을 잡고 같이 산다고 했다. 하지만 10살 이전에 몸소 겪었던 고향은 마음의 훈장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살아가면서 어릴 적 생각이 더 간절해지고 깊어져요. 수구초심이라고. 고향 생각이 언뜻언뜻 나네요.”
매곡면 노천리 포도밭 하우스에서 그를 만났다. 오전 11시부터 회의 약속이 있다고 있는 그를 미리 불러세워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한테 미안하지요. 맨날 바깥으로 나돌다 보니 아내가 집안일도 농사일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제 임기 마치면 가족들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답니다. 저를 아는 고향 분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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