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하 (옥천읍 삼양리)

옥천, 구일리 귀현은 아주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입니다. 고향은 제가 태어나고, 자라나면서 이상을 그리며 꿈을 키워왔던 곳입니다.

어린 시절 그리운 추억과 낭만이 서린 고향에 가면, 돈이 없어도 좋고, 명예가 없어도 좋습니다. 제가 자라날 때엔 이상도 높고, 꿈도 많고, 친구도 많았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가서 그 옛날 추억만 남아있습니다. 그 옛날 달뜨는 저녁이면 어린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모여앉아 노래하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각박한 객지생활에서도 새로운 활기가 솟아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그동안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가 그립습니다. 정다운 친구는 가고 없지만, 그 옛날 추억이 되 살아나서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해 찾아갑니다.

제 고향은 함박산 아래 올망졸망 한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이고, 앞에는 논밭이 있고, 논둑밭둑길을 지나가면, 맑고 맑은 물이 넘실대는 드넓은 구일ㅇㄴ못이 잇습니다. 이와 같이 산자수면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이 아름다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올 때엔 한 지붕아래 삼촌숙부님과 사촌동생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숙부님과 숙모님은 돌아가시고, 사촌동생들은 모두 다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추석날에 어머님께 성묘를 하려고, 아들 손자 데리고, 고향에 갔습니다. 맑고 청명한 가을날, 번거롭고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코스모스가 피어나서 바람결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사이 길을 걸어 갈 때, 지난날 그리운 모습이 되살아났습니다.

산돌아 고갯길에 올라 내려다보면, 그 옛날 정취가 선명하게 생각났습니다. 저녁 해가 지면 동네에서 밥 짓는 저녁연기가 무럭무럭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습니다.

그 옛날, 봄이면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4월엔 이산, 저산에서 진달래가 울긋불긋 피어나고, 길가엔 노란 개나리가 생긋생긋 웃고, 종달새가 지지배배 노래하는 양지 밭에서 나물 캐던 아낙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서 그윽한 솔향기와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해 내려오니 개구쟁이 시절, 한 여름 버드나무 아래로 흐르는 냇물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고, 멱을 감고, 고기 잡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논두렁에서 물방개와 미꾸라지 잡던 그 옛날 추억이 되 살아났습니다. 지난날 논둑 밭둑길은 이제는 새마을사업으로 넓고, 반듯한 도로가 나있고, 구불구불한 하천은 반드시 나 있어 지금은 그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농촌으로 변했습니다.

동네 어귀에 들어가 보니 그 옛날, 내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앞산 뒷산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워왔던 친구도 오고 간데 없고, 풀피리 마주 불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꽃피고, 새가 울던 그 옛날,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앞산 뒷산에서 산 꿩이 울고, 뻐꾹새와 소쩍새가 우는 내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뒷동산은 과수원으로 바뀌고, 집 앞 텃논은 비닐하우스로 덮어지고,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면서 온 동네를 주름잡던 비좁은 골목길이 이제는 새마을 사업으로 훤하게 뚫려 있고, 새들이 처마 밑에 집을 짓던 초가집은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보고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이제는 하루하루 몰라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 우리가 살던 초가집이 궁금해서 골목길을 돌아가 보았으나, 우리 집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우리 집터는 채소밭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 지난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사랑방에서 글 읽는 소리, 안방에서 다듬이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부엌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 집 안방 뒤 대나무 밭에서 아침저녁에 참새가 짹짹거리고, 굴뚝에서 꾸역꾸역 솟아나는 흰 연기가 하늘높이 올라가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한겨울 찬바람이 불어오는 쓸쓸한 밤엔 초가삼간 좁음 방에서 희미한 석유등불 아래 어머님과 마주앉아 바느질을 하면서 들여 주신 재미난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해어진 양말을 꿰매시던 어머님 손길이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때엔 삼사촌 9식구가 한집에서 법석거리고 살면서, 한여름 저녁에는 마당 쓸고 멍석에 누워 둥근달을 바라보고.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배기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은도끼로 찍어내서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 삼 칸 집을 짓고/ 한 백년 살고 싶다"는 노래를 불러 주시던,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자난날 그 흔한 노랑나비, 흰나비와 고추잠자리가 지금은 보이지 않고, 마당가를 뱅뱅 돌며 나르던 제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시 발길을 돌려 고샅길을 돌아 내려오니, 빈집들이 듬성듬성 보이고, 소꿉놀이 하던 죽마고우들은 모두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서 보지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그 옛날 우리 마을에서 부자로 떵떵거리고 살던 마당 넓은 기와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을 주고받던 이웃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지금은 허리 굽은 노인들이 고향에서 선산을 지키고, 살아가곡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월은 흘러가서 이제는 강산도 변하고, 인심도 변해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죽어서도 저의 영혼은 고향에 묻혀 살아 숨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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