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 여행사진작가 (안남초 31회 졸업)

강경식여행사진작가

‘제주도에서 빌린 돈은 가파도(갚아도) 되고, 마라도(말아도) 된다’는 중학교 사회수업 시간에 배웠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또 여기 제주도에 와서 들은 얘기가 있다.
모슬포항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가파도와 마라도 사람들은 술값을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는 주모(酒母)의 너그러움이 있었단다. 뭍은 아니지만 큰 땅에 나온 주민들은 풍랑으로 가파도와 마라도에 들어갈 수 없는 때, 주막에 앉아 막연히 세월을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인내해야할 동안 텅텅 빈 주머니 사정을 주모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맞먹는 인심 좋은 풍경이다.
제주도를 삼무도와 삼다도라는 별칭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심이 후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땅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가파도와 마라도는 어릴 적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다. 요즈음 도회지와 시골이 대비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게다.

세 여인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네덜란드의 하멜이 써서 한국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 하멜표류기)』에도 ‘케파트(Quepart)’라고 가파도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가파도랑 발음이 비슷해, ‘하멜이 이곳에 표류했었다’라는 해석을 뒷받침하게 한다.
카메라를 메고 자주 가는 송악산이나 대평포구, 사계리에서 바라보아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는 ‘보리밭과 바람’의 섬이다. 가파도는 해발 20m로 아주 낮고 평탄한 곳이다. 덮개를 닮았다고 해 개도(蓋島), 개파도(蓋波島), 더위섬으로 부른다.
모슬포 여객선 터미널은 가파도와 마라도를 오가는 많은 여행객으로 늘 붐비고 있어, 출발 예정 시간보다 1시간 정도는 일찍 도착해야 제시간에 여객선을 탈 수 있다. 10분이면 오갈 수 있으며 여객선은 하루에 4회, 축제 기간에는 2배로 증편해 운항한다. 올해는 그놈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손님이 너무 없어 모두 울상이다.
모슬포 여객선 터미널은 그동안 어선과 같이 사용했던 북항 ‘하모항’에서, 새로 지은 남항 ‘운진항’으로 옮겨 2017년 7월부터 운항하고 있다. 주차장이 많이 넓어졌다.
올해는 4월 4일부터 5월 5일까지 한 달간 ‘가파도 청보리’축제가 열린다. 지난해 4월 초순에 이어 중순에도 갔지만 이미 보리가 누렇게 변하고 있어 아쉬웠다. 짙은 색 청보리를 보고 싶다면 3월 초순부터 4월 초순에 방문하는 게 좋다.
‘바람도 머물다 간다’는 가파도는 해안선 길이가 4km로 아주 짧고 해발 20m밖에 안 되는 작은 섬으로 올레길 10-1 코스 ‘가파도 올레’가 새로 지정돼 재촉하지 않는 걸음걸이로 바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곳도 있어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이 지긋한 중년 부부이든 젊은 청춘남녀이든 2인용 자전거로 섬을 한 바퀴 도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젊은 아가씨 둘이 기꺼이 포즈를 취해준다

배에서 내려 섬 가운데 길인 ‘통물’을 지나 ‘벼락왓’산책길로 들어섰다. 봄 향기 가득한 남풍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상큼하고 시원하다. 한창 핀 청보리는 봄 햇살을 맞으며 마냥 신나 있다. 좌우를 둘러봐도 청보리와 푸른 바다뿐이다. 청보리와 바다를 번갈아 보며 푸름에 취해 심호흡을 해 본다.
카메라를 든 중년의 여인이 내 뒤를 따른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너른 들판의 푸른 보리밭 풍경을 담으려는 모양이다. 나는 길 한쪽에 비켜서서 삼각대에 의지한 채 멀리 주황색 지붕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아기자기한 밭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그녀의 셔터 소리가 넓은 들판을 가른다. 한가한 들판에 터지는 셔터 소리는 두 사람의 간극을 더 벌리기라도 하듯 날카롭게 들린다. 순간 숨이 멎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름대로 자신의 뷰파인더에 집중한다. 다시 그녀가 한 발 앞서 나간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서 본다. 그녀의 흔적을 뒤적이고 싶어서였을까? 그녀를 모방하고 싶어서였을까?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구도는 어떻게 짤 것인지 정하지 못한 채 그냥 서 있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렌즈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셔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도 뒤질세라 셔터에 검지를 올려놓은 채 멈춰 있었다.
그녀는 나와 그렇게 미진한 상봉을 하고 좁은 보리밭 길을 떠났다.

새롭게 선보인 예쁜 허수아비<br>
새롭게 선보인 예쁜 허수아비

올레길을 걸으면서 초가집 마당에 홀로 앉아 미역과 가시리를 다듬는 할머니를 보았다. 아내는 ‘맛있는 최고의 돌미역’이라며 한 꾸러미를 사서 내 손에 들려준다. 이 돌미역은 돌아오는 우리 딸 5월 생일에 미역국을 끊여 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할머니가 ‘마수걸이’라며 덤으로 더 준 생미역을 뜯어 먹어보니 짭짤한 맛이 그만이다.
가파도에서 먹는 해물짬뽕에는 밝은 밤색의 ‘가시리’가 얹혀 나온다. ‘가시리’는 표준어 ‘우뭇가사리’의 제주도어로 씹을 때 오도독거리는 독특한 식감이 좋은 식재료로 가파도의 3~4m의 깊은 수심에서 해녀들이 직접 딴다고 한다.
가파도에도 여느 유명한 섬과 마찬가지로 해물자장과 해물짬뽕으로 유명한 식당이 하동포구에 있다. 여기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맛을 볼 수 있으니 텔레비전의 영향이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맛있는 해물자장과 해물짬뽕 식당

웃음이 먼저 나온다. 이런 것도 행복한 여행을 위한 한 가지라고 이해는 하지만,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좋은 여행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나도 호기심에 못 이겨 그 긴 대열에 서고 말았으니 웃을 수밖에 ….
가파도의 서쪽 해안인 ‘물앞이 돌’이나 ‘고냉이 돌’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해넘이를 보지 못해 아쉽다. 다음엔 하룻밤 자면서 해돋이, 해넘이를 보았으면 좋겠다.

평화로운 청보리와 섬마을 풍경이 잘 어울린다
멀리 산방산이 보이고, 가까이엔 송악산도 보인다
청보리에 흠뻑 젖은 여행객
올레길 10-1코스 이정표
연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상동포구에 내리면 가파도를 알리는 글씨가 바로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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