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곡리 200살 된 팽나무, 우리 동네 든든한 형님이야

딸딸이(어르신들 보행 도움 유모차)는 마당에 우두커니 섰다. 매일 노인정 마실 같이 다니던 딸딸이는 소박맞기 일보 직전이다. 코로나라는 녀석이 우리 노인네들 발목을 잡고 우리를 집에 가뒀다. 찬찬히 걷는 동네 산책이 전부다. 노인정에 모여 윷놀이 하며 즐거웠는데 얼마나 기다려할까 변함없는 건 마을 정자의 200살 팽나무와 우리 딸 진자다.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목포 사는 우리 딸 진자가 매일 아침 마다 전화를 준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른 딸 전화. 7년 전 영감 떠나고 내가 적적할까 진자는 매일 7시 30분이면 나를 깨운다. 마을의 팽나무도, 딸의 전화를 받는 나도 언젠가는 사라질 텐데...
우리는 그저 오늘 좋은 말을 나누며 고운 미소로 화답하면 족하다.

 

■ 청마리 이씨네 금지옥엽 막내딸
우리 가족이 맞은 해방은 더 특별했어. 광복 전에 오빠가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에 끌려가게 돼서 오빠가 울면서 집을 떠났지. 우리 가족들도 다들 부둥켜안고 오빠를 떠나보냈어. 어머니는 밤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오빠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했어. 그런데 오빠가 떠난 뒤 우리는 일본군이 후퇴해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 
어느 날 어머니!!! 부르는 소리에 나가보니 세상에나 오빠가 살아 돌아온거야. 오빠가 타고가던 말이 다리가 부러져서 더 먼저 돌아오게 됐어. 우리는 죽은 사람이 살아온 것처럼 기뻐하면서 동네잔치를 벌였어. 그리고 오빠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경찰이 되었지. 
10살이었던 나도 오빠의 생환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됐어. 핏줄이 그렇게 진한거야.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 자리에서 울고만 있었어. 
나는 3남매로 자랐어. 우리 나이에 3남매는 흔하지 않아. 다들 7남매 8남매 줄줄이 형제들이 많아서 끼니 걱정이 예사였지. 오빠는 이 종렬 언니는 이 종분 나는 이 종부 우리는 종자 돌림을 썼어. 여자들은 돌림도 잘 안 쓰는 데 우리 언니와 나는 돌림자를 쓰고 귀여움 많이 받으면서 자랐어. 우리 집은 남녀 차별이 없을 만큼 나는 대우 받고 자랐어.
동네 친구들이 집안 농사를 돕고 논에서 일할 때 나는 세라복 입고 학교에 다녔으니까.
나는 옥천여중에 다녔어. 집에서는 50리길이라 통학은 하지 못하고 옥천 읍내 작은 집에서 학교를 다녔어. 주말이면 청마리 집에 가서 주말을 보내고 왔어. 50리를 걸어서 집에 갔어. 말이 50리지 어디 걷기에 가당키나 한 거리야? 그래도 어머니 보고 싶은 마음에 토요일이면 교복을 입고 그 길을 걸었어. 집에 도착하면 해가 떨어져서 캄캄했지 전기불도 없었잖아. 집 가까이 가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어. 속으로 엄마가 나를 반겨주시는구나 했지. 너무 행복했어.
어머니는 무슨 잔칫집마냥 시루떡이며 동태전에 온갖 부침개를 해놓고 나를 기다리셨어. 
막내딸 오는 토요일이 어머니한테는 잔칫날인거야. 나도 1주일 만에 보는 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가슴에 안겨 떨어지지 않았어. 다음 날 아침이면 울면서 다시 옥천으로 돌아왔지.
어머니가 싸주신 반찬이며 먹거리를 보따리보따리 챙겨서 큰 길까지 어머니가 바래다주셔서 헤어질 땐 또 가슴이 아파 같이 울었어. 그렇게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지.
종분이 언니는 17살에 안남면으로 시집을 갔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인가 언니도 시집 안 간다고 울고 나는 언니를 못 볼 거 같아서 또 울고 안남은 청마에서 멀지 않지만 옛날에는 시집가면 시댁 귀신 되는 거잖아. 그렇게 금지옥엽처럼 자랐어.

 

■ 결혼, 인생의 반전
스무 살에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어. 남편은 그 때 해군이었어. 휴가 나왔지. 해군 세라복 입고 오빠 집에서 선을 봤어. 남편은 그 때 22살 세라복입은 얼굴 솜털 뽀송한 군인이었지. 한창 팔딱팔딱 뛰어다닐 때라 마냥 애들 같더라고. 나는 스무 살 남편은 스물두 살 그렇게 애송이들이 결혼을 했어. 처음 맞선보는 날은 옥천에서 순경하던 오빠 집에서 선을 보고 점심 먹고 뭔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는 옥천 부산사진관으로 약혼 사진을 찍으러 갔어. 이미 부모님 들은 정혼을 했고 우리는 얼굴에 곰보자국은 없나 확인하고 바로 약혼 사진을 찍은 거야.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올라 사진관에 가서 어색한 약혼사진을 찍었지.
그렇게 결혼해서 군서면으로 시집을 왔어.
트럭에 혼수를 잔뜩 해왔어. 마을 사람들이 구경 나왔을 정도니까. 오동나무로 짠 장롱 양단 이불 시골에서 보기 힘든 혼수품에 다들 놀랐어. 그 때는 마을 새댁들이 저녁마다 와서  내 옷가지랑 이불을 만져보고 부러워했어. 그 때 같이 시집와서 60년 넘게 살고 있는 이웃들이 지금도 같이 노인이 되어 노인정에서 윷놀이 친구가 됐어. 옆 골목 갑성이 어머니부터 몇 명 있지. 같은 동네 남자를 만나 시집와서 노년까지 친구가 되는 특별한 인연이 되었지. 나는 집에서 일을 배우지 않고 학교만 다녀서 농사를 제대로 못했어. 시어머니가 점잖으셔서 일 못하는 며느리 구박은 안하셨어. 내가 글을 좀 배웠기 때문에 나도 어머니에게 예의바른 며느리라 우리는 서로를 인정했지. 농사 못 짓는 대신에 시누이와 시동생을 잘 챙겼어. 남편도 농사를 많이 짓지 않고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했어. 농사는 마을에서 품앗이 하면서 남들 하는 만큼만 했지. 큰 농사는 하지 않았어. 
나는 5남매를 뒀어. 복림 좌형 경형 진자 진숙이 다들 목포 강원도 인천 부천에 살아. 여기저기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거야. 그래도 목포 사는 진자가 매일 전화를 해서 멀리 사는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네. 너무 고맙지. 딸 목소리 들으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맛이 아주 좋아.
아침이면 큰아들 손자인 증손자 기범이 사진을 보면서 한 번 웃고 이장이 하는 스피커 방송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보면서 하루를 열어.
군서면 우리 동네는 양반마을이야. 노인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노인네들도 없어. 마을을 지키는 200년 된 팽나무가 떡 버티고 있어서 우리는 80살 90살이 되도 여전히 한참 아우들이야. 우리 동네 사람들이 점잖은 건 팽나무 그늘아래서 배웠을 거야. 춥다고 옷을 입혀주나 덥다고 바람을 쐬어주나 그래도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200살이 됐어. 우리는 나무한테 배워야 돼. 진득하니 사는 법을 말이야. 
평화로운 우리 동네가 너무 좋아. 텔레비전에서 매일 방송 나오는 전염병이 우리를 감옥살이 시키지만 우리 동네는 너무 깨끗해서 그런 거 오지도 못할 거야. 그래도 이번 여름에는 팽나무 그늘에서 다들 모여앉아 주거니 받거니 수다도 떨고 수박도 한 통 깨먹어야 할텐데.
그렇게 되겠지?

작가 이정숙
작가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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