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면 백운리 정순임(1938년~) 구술생애사
청산면 백운리 정순임(1938년~) 구술생애사
  • 옥천닷컴
  • 승인 2020.03.1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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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픔은 성모님에게 드리고 나는 기쁘게 찬송하리

 

요즘? 답답하지. 
아쉽게도 코로나19 때문에 나는 성당에 미사도 못 드리고 있어. 80이 넘게 살다 보니 별별 일을 다 겪었지만 지금은 몹시 이상한 질병이 전 세계에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던데 걱정이야. 고달파서 웃음을 잃었던 58살 즈음에 동네 친구가 나더러 성당에 나가자고 전도를 했어. 그 친구 덕분에 교리도 배우고 영세도 받고 25년 가까이 천주교 신자로 살고 있지. 지난 인생이 고행성사를 하듯이 슬픈 기억도 많지만 노년의 나는 기쁜 이야기도 많아.

 

■ 꾸불꾸불한 재 넘어 시집가던 길 
나는 젊어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어. 체구도 작은데 먹고살기 위해 노력을 하다 보니 힘에 많이 부쳤지. 생각이 많아서 자잘한 근심도 많았고, 걱정거리가 많아서 노심초사를 많이 하던 습관이 내 얼굴에 흔적을 많이 그려놓았어. 나의 세례명은 데레사야. 문 대통령 모친도 나처럼 데레사인데 작년에 돌아가셨지. 이제는 슬픔일랑 잊고 지금은 기쁜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소.
나는 상주군 모서면에서 남매로 태어났다. 옛날에는 다들 사는 게 고만고만해서 항상 배를 곯았다. 오죽하면 입에 풀칠한다는 말이 나왔을까.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오빠가 가장 노릇 하며 함께 힘든 시절을 보냈다. 60년이 훨씬 지난 세월이라 슬픔인지 기쁨인지 다 잊어버렸다. 때로는 다 잊어야지 그 많은 기억들을 가슴에 담아두면 못살 것이다.
동네에 철마다 들르는 약장사 할머니가 백운리 총각을 중매를 섰다. 내 나이 22살에 4살 위인 박영래 총각과 결혼을 하였다. 신랑은 백운리에서 3시간을 걸어서 우리 친정으로 와서 혼인식을 마친 후에 신행도 하지 않고 곧장 백운리로 돌아갔다. 가마꾼 4명이 나를 태워서 갔는데, 낮은 재에서는 가마를 탔지만 높은 산은 나도 가마에서 내려서 걸었다. 시댁 가는 길은 결혼 후 펼쳐질 내 앞날처럼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4남1녀의 셋째인 남편은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나와 결혼했다. 시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고 했는데 남편은 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잘하지 못했다. 일 못한다는 핑계로 당구나 치러 다니면서 소홀하니 열심히 하는 것은 나의 몫이 되었다. 나까지 태만하면 소중한 자식들을 학교도 못 보낼 판이었다. 땅도 보잘것없어서 쌀 소출이 적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라고 했다지만 한마디로 나는 안 해본 일 없이 다했다. 여름이면 백운리 주변 산으로 깊이 들어가서 철거지(덤불)를 걷어서 팔았다. 그냥 팔면 장사꾼이 돈을 적게 쳐주었기 때문에 철거지 껍질을 벗겨서 삶은 후에 뽀얗게 해서 팔았다. 질긴 껍질을 벗겨내다 보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거친 독기에 지문이 다 닳아서 없어졌다. 그때 우리 또래들은 먹고 살기가 궁핍해서 다만 몇 푼 벌이라도 해야 했다. 가을에는 농사 진 것들을 걷어 들이고 겨울까지 산으로 가서 부러지거나 꺾인 가지들을 모아서 지고 내려와 아궁이에 불 때고 밥을 해서 자식들을 먹였다. 고된 노동에 남편에 대한 원망이 없었다면 거짓일 게다. 
참고 견뎌낸 힘은 오로지 자식들이다. 
자식들 모두 청산 초 중 고를 다녔다. 두 딸은 청산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 따라서 직업을 갖느라고 인천으로 갔다. 객지에서 밥해 먹으며 회사를 다니다가 신랑을 만나 청춘남녀가 다 그렇듯이 연애하고 결혼했다. 인천에 정착해서 아이들 키우며 제 나름대로 독립해서 살고 있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쫑마리 아들까지 제 누나들 따라서 인천에서 취업해서 그곳에서 역시 정착하였다. 인천도 대도시인데 열심히 사느라 추석이나 설 명절에나 간간이 만나는 것에 만족한다. 사느라 바쁜 것 뻔히 잘 아니까 자주 오지 못해도 서운한 것은 없다.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되니 자주 통화하는 것에 만족하려고 한다.
대전에 살고 있는 큰아들은 청산에 있는 만두 제조공장에 다니고 있다. 큰며느리는 학교 서무과에 오랫동안 근무하고 있는데 올봄에 옥천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둘이 만나 연애결혼 했는데 부부가 맞벌이로 근면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 거리이다. 큰아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으로 와서 나와 시간을 보낸다. 긴말 없어도 이심전심 통하고 안심이 되는 것은 큰아들 이어서일까? 남편이 이른 나이 60세에 작별하였기에 나는 사느라고 고생과 고통이 많았다. 그러나 인생이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가 없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일도 있고 궂은일도 있는 것이 인생살이겠지. 인생길을 걷다 보면 높은 산도 올라야 하고 깊은 강도 건너가야 하는 법이다. 

 

■ 기도만이 나의 할 일이다.
내가 자손들에게 할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가 동네 친구 덕분에 청산성당에 다니고 있다. 지금 나의 큰 기도 제목은 큰손자 둘이 공부를 마저 마치고 취직해서 각자 밥벌이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청산성당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곱게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보드라운 미소의 성모상이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오래전에 무릎 두 군데를 수술해 다리가 아파도 나는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수요일 미사도 시간만 되면 가고 있다. 집에서 성당까지 20분 정도 걸리는데 날이 궂어도 추워도 더워도 기쁜 마음으로 반드시 가고 있다. 젊은 날 일하는 것에 비하면 1천 배 가벼운 노력이며 다만 감사하다. 

 

■ 데레사! 항상 즉시 기쁘게 살게나- 성모님의 따뜻한 명령
성당 잔디밭에 놓인 커다란 바위에 새겨놓은 “항상 즉시 기쁘게”라는 구절은 걱정거리가 많은 내게 기쁘게 웃으며 살라는 성모님의 따뜻한 명령이리라. 기도하느라 바쁘다. 묵주기도를 하루에 3단에서 4단 정도 바치고 바쁠 때는 2단도 한다. 손주들 자립하도록 축복기도 드리고, 며느리들 사위들 딸들 아들들 건강하고 오순도순 살도록 기도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 아쉬운 건 자식들은 아무도 성당 안 다닌다. 나만 대표로 다니면 되지 뭐, 묵주기도를 하도 많이 외워서 치매는 안 걸릴 것이고 늙어서 요양원 안 가고 지금처럼 살면 되지.  
처음 시집와서부터 살았던 70년도 더 된 집은 큰아들이 10년 전에 개축해서 번듯해졌고 따뜻해서 참 좋다. 매일 기도를 하면 슬픈 주름도 옅어질 거다. 아무리 춥다 해도 봄은 봄인가 보다. 마당에 꽃나무들이 새순을 돋우고 꽃들도 움을 트고 있다. 코로나19도 지쳐서 제풀에 잦아들 게 틀림없다. 옛날엔가 사스도 메르스도 신종플루도 다 지나갔는데 아무리 독해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겨낼 거다. 
극성맞고 똑 떨어지는 이장이 자나 깨나 우리 동네를 쓸고 닦아서 먼지 하나 없고 휴지조각 굴러다니는 게 하나 없으면 말 다했지. 그래서 우리는 마스크 안 끼고도 큰 걱정이 없어. 살랑살랑 봄바람에 코로나19인가 그 녀석이 같이 휩쓸려가기를 바랄뿐이지.

작가 이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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