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표의 역사탐방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잔물결이 출렁되는 '향수호수길'. 나들이 길에 바람도 쏘일 겸 음 추린 봄날, 강바람을 맞으며 상쾌한 '향수호수길'을 걸어보자. 옥천선사공원에서 굽이굽이 산기슭 흙길을 걷다가 대청호 취수탑 물비늘 전망대에서 드넓은 호수의 맑은 바람을 호흡하자. 이어진 옛 오대리 배터 절벽 위에 설치한 아슬아슬한 데크로를 따라 황사태 넓은 벌, 황룡암 기암절벽까지 십여 리 길에서 청량한 대청호 산들바람과 자연을 호흡하자!

옛 주막들은 큰 고개 아래와 강 나루터 기슭, 옛 장터 부근에 자리하여 길손들의 타는 목마름과 배고픈 허기를 채워주며 쉬어가던 곳이다. 조선 후기 옥천군과 청산현에 60여개 주막들이 곳곳에 있어 백성들의 희로애락이 진하게 녹아 있다. 

김옥균과 삼거리 주막집에 얽힌 이야기다. 옥천읍 삼거리 주막은 서화천과 금구천이 합수되는 지점인 옥천읍 삼양리 삼거리마을이다. 이곳은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옛날부터 주막들이 있어 술과 국밥 한 그릇으로 길손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삼거리는 충청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충청대로와 경상서로를 잇던 가화역 부근에 있던 주막 마을이다.

삼양 삼거리 척화비는 충북 기념물 6호 문화재로 1871년 흥선대원군이 1866년 9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등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침략하자,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전국팔도의 교통 요지에 세운 비이다. 삼거리에도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 즉 교역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야사에 전하기를 조선 말엽의 개혁가 김옥균 선생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등으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한양에서 하인 종자를 데리고 오래간 만에 안내면 인포리 고향 산천에 성묘하러 오던 길이었다. 한양에서 오백리길을 며칠 걸려 청주에서 증약 마달령, 서정자를 지나 막 옥천읍내에 들어서려 하니, 마침 목도 마르고 피로도 겹쳐 요기도 할 겸 해서 잠시 삼거리 주막에 들렀더란다.

당시 김옥균 선생은 촉망받고 잘 나가던 유망한 중앙 관리로서 기품이 있고 인물 또한 훤하게 잘난 인물이었다, 주막 집에 들어서자, 기생들이 버선발로 나와 옥균 선생을 맞이하느라 호들갑들을 떨었다. 목마른 김에 막걸리 한 잔을 벌컥 벌컥 단숨에 들이킨다. 시장하던 차에 삼거리 명물 인절미도 몇 점 들었다. 김옥균은 시서화는 물론 잡기에 능한 한양 선비로 시조창 한 수를 멋들어지게 읊었다.

컬컬한 술도 마시고 노독도 풀었으니, 길을 재촉하여 인포리로 출발하려 하니, 삼거리 주막의 예쁜 기생들이 김옥균 선생에게 홀딱 반하여 따라 나섰다는 애기가 전해진다. 이 같은 애기는 바로 군북면 석호리 청풍정에 깃든 명월 기생과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명월암 전설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고향 안내면 인포리 선산에 성묘도 하고 문중 어른들도 만나보며 며칠 후 한양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삼거리 주막에 들려 쉬어 갔다. 얼마 후 출발하려니, 시중을 드는 하인이 보이 않았다. 나타난 시종인 하인이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시종은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였다. 그래서 옥균 선생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옆집 주막에서 옥천 노름꾼 왈패들과 골패 노름을 해서 노잣돈을 다 잃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는 것. 김옥균 선생이 혀를 끌끌 차면서 "그 왈패들과 네가 노름 한판 붙어 봐야겠구나"라고 말하며 왈패들과 노름판을 벌리고 둬 시경 지난 뒤, 환한 웃음 지며 엽전 꾸러미를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영감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니, "옥천 왈패들이 나의 잡기 실력을 당하겠느냐! 그놈들 엽전을 네가 모두 땄다. 그리고 우리 노잣돈만 챙기고, 왈패 노름꾼들을 무릎 꿀려서 혼 줄을 내고 나머지 엽전을 다 돌려주었노라"고 말하며 "자 늦었으니, 어서 가자"라고 했단 이야기.

김옥균·명월 전설 깃든 명월암(군북 진걸) 1960년대 청풍정 길 (故양무웅 원장 제공)
김옥균·명월 전설 깃든 명월암(군북 진걸) 1960년대 청풍정 길 (故양무웅 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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