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철 어르신 (1933년생, 이원면 용방리) 구술생애사
곽상철 어르신 (1933년생, 이원면 용방리) 구술생애사
  • 옥천닷컴
  • 승인 2020.01.0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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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원면에 준 사랑이 눈에 보여야 말이지.

 

옥천군 이원면 용방 3길 95-8번지에 자리 잡은 나의 집은 우리 동내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면서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원래 있었던 초가집을 헐어내고 스레트 지붕을 올려서 집을 한번 새로 지은 뒤로는 보일러시설을 하고 페인트를 덧칠 했을 뿐 별다른 개축을 하지 않은 탓에 내가 늙어가는 만큼 이집도 나와 함께 낡아지고 기울어져 가고 있다.

 

■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흘러가 버린 나의 시간들
곽규야마소오데스, 이원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불려진 곽상철의 일본어 이름이다. 8월 초 토요일 오전 이었다. 그때 당시 일본순사들이 타고 다니던 말의 주된 먹이거리가 아카시아 잎이었다. 우리학생들에게 잎을 따서 모으도록 시켰는데 그날도 우리는 아카시아 잎을 따기 위해서 지정된 산에 올라가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할당된 분량을 맞추기 위해서 열심히 짚바구니에 잎을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가 어디선가 느닷없이 날아와 장터와 시내에 대고 공습을 가했다. 우리는 폭격으로 뿌옇게 번져 오르던 화염과 먼지를 보고 혼비백산이 되어 산에서 구르다시피 뛰어 내려왔다. 동내 안으로 들어섰을 때 금강철교도 폭격으로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안 되어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또다시 초등학교 6학년 녹음이 시작되는 초 여름날 6.25 전쟁이 발발했다. 아들이 없었던 충북 영동에 사시는 큰 아버지 댁에 양자로 가있던 큰형님이 급히 오셔서 중학교 2학년짜리 작은형님을 데리고 아버지가 쥐어준 돈 몇 푼을 주머니에 넣고 경상남도 청도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을 떠나지 않은 마을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 장소에 모여 인민군에게 사상교육을 받아야만했다. 피난 떠난 어린 아들들이 살아있다면 어디서나 밥은 굶지 말라는 바람으로 어머님은 밥상위에 두형님의 밥그릇과 수저도 늘 함께 올려놓으셨다. 

수복 후 9월 중순쯤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몰랐던 형님들이 집에 돌아오셨다. 그 기쁨은 말로는 표현 할 수가 없었다. 핏줄로 엮인 뭉클한 마음을 어디에 비할까. 

 

■ 기억에 남는 자랑거리가 있다면 
나는 웅변을 참 잘했다. 웅변대회가 있을 때마다 학교대표로 내가 뽑혔다. 원고가 완성되면 나는 그것을 들고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민둥산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소나무 그루터기에 올라서서 조그맣게 멀리 내려다보이는 작은집들을 청중 이라고 생각하고 식구 중에 한명이 저녁밥 먹으라고 데리러 올 때까지 수없이 연습을 했다. 강단에 오르기 전까지 두근두근 거렸던 내 심장소리와 그리고 나에게 일제히 한꺼번에 쏠리는 기대의 시선들. 특별히 생각나는 수상은 중학교 2학년적에 교육세 납부에 대한 주제로 웅변을 했는데 도내에서 일등을 했던 것과 군대 초임시절에 사회바로잡기 라는 주제로 군인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을 때 이렇게 두 번이다. 어린 나에게 용기와 설렘을 주었던 기회였다. 

 

■ 결혼식 당일 날 신부얼굴을 처음 봤으니까 이쁜지 안이쁜지 미리 알수가 없었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철도회사에 입사해서 화물 정비 일을 몇 년 하다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가평에 있는 부대에서 복무중 제대 말년에 집안어른의 중매로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결혼을 위해 2주 휴가를 받았고 결혼식 날 신부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신부 집이 충북 영동면 양산에 있었는데 결혼식 날 서울시청에 근무하고 있던 작은형님이 마련해준 세단택시를 타고 신부 집으로 향했다. 

이곳저곳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비포장 길을 속도를 줄이고 달리다가 길바닥에 밋션이 걸려서 택시가 더 이상 움직이지를 못하게 되었다. 속은 타들어 가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그렇게 가슴 졸이며 맞이했다. 모두 내려서 차를 힘껏 밀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어서 우리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신랑인 나와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내려온 군대동기 셋과 동내 친구 한명이 밤티 고개 에서부터 영동 양산까지 걸어서 신부 집까지 갔다. 신부 집에서는 제 시간에 오지 않는 신랑을 두고 등신같이 군대에서 휴가도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했다는 소리를 나중에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내는 예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결혼 후 곧바로 그 회사의 경리부에 있었던 작은형님의 친구 소개로 서울 동신화학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내는 시골집에 남아서 생활했다. 새댁으로서 신랑과 떨어져 아버님을 모시며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농사일까지 군말 없이 감당해준 아내에게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는 형님 집에서 회사에 다녔는데 아버님이 점점 많이 아프셨고 시골의 땅 농사를 아내에게만 맡겨 둘 수 없어서 형님과 상의한 후 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다. 서울에서 회사 다녔던 젊은 사람이 시골로 내려와 열심히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동내어른들이 이장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33살 젊은 나이에 이장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 23년이라는 시간동안 경험했던 모든 일들은 나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용방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 우리 죽는날 까지 누구의지하지 않고 제 발로 걸어다닐 수 있기를
그때 내나이 24살 신부나이 20살 

지금 내나이 84살 아내나이 80살

아내는 무릎이 아파서 치료를 받으러 한 달에 한번 대전에 있는 대학병원에 간다. 오늘아침 이른 밥을 먹은 아내가 주름진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 딸이 사준 진분홍 립스틱을 실금처럼 얇아진 입술에 바르고 나서 옷장으로 가 가장 아끼는 무릎까지 닿는 코트를 꺼내 입고 있다. 아무리 나이는 먹었어도 깔끔하게 하구 다녀야 의사나 간호사들이 더 잘 치료해 준다 라고 아내는 믿고 있다. 어제 아내가 마을회관에 점심 먹으러 갔을 때 아내의 자가용을 내가 깨끗이 닦아 놓았다. 대전가는 길에 딸내미 만나서 줄 들기름 두병과 고춧가루를 바구니에 실은 아내가 시동을 걸고 마당을 빠져나간다. 아내의 전동 스쿠터가 달린다. 마을회관입구에 도착해서 아내의 스쿠터가 큰 나무둥치를 무사히 돌아가는 것까지 확인해야 나는 안심할 수 있다.

 

■ 손주들 이름 그럼 다 기억하구말구
우리영석이 문영이 그리고 우리혜원이 혜정이 뭐냐 내가 지어줬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 이잉 준영이 그래그래 맞아 준영이 그리고 셋째네가 문수 작은애 민지 넷째네 애들은 민주하고 민석이지.

 

■ 나의 큰 숙제를 덜어줬던 자식들
첫째 큰아들 승헌은 서울 KBS 기획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둘째 딸도 4년제 대학을 나와 간호 일을 하다가 지금은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셋째 넷째도 안정된 직업을 갖고 다복하게 살고 있다. 돌아보면 자식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한 가지가 있다. 우리 자식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4년제 대학을 마친 것이다, 네 아이가 지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외가 쪽 후손으로써 그분의 총명함을 우리 자식들이 조금이나마 물려받은 것 같다. 

이장 일을 볼 때 이원 면사무소 면서기를 할 수 있는 특채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공직생활이 고됐고 봉급이 너무 박해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아서 고사했다. 과일농사를 지어 얻은 수입이 더 좋았다. 특히 포도금이 좋았다. 나는 지금까지 농사일을 하고 있다. 

나는 5시 반이면 일어난다. 안식구가 자는 안채는 보일러를 설치해서 기름을 사용해 난방을 하지만 내가 자는 아래채는 지금도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윗말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산에 썩은 나무가 지천에 널려있다. 빽빽하게 위로 곧게 뻗어 있는 나무 사이에 죽어있는 소나무가 많이 있다. 그래서 아침밥 먹고 10시가 넘으면 톱 하나 들고 나무 묶을 끈내끼 하나 챙겨서 슬슬 뒷산에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오른다. 올라가서 나무를 차곡차곡 차려서 울러미고 내려오거나 어떤 날은 길이가 긴 나무를 통째로 집까지 끌고 와서 잘게 잘라 한곳에 모아놓고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그렇게 두 번 군불을 땐다. 기름보일러를 돌리는 안채는 운운하게 따스운데 이쪽 방은 장작 몇 개만 더 집어넣어도 금새 뜨끈뜨끈한 찜질방이 된다. 

나를 부르는 다른 이름들이 있다. 이원 노인회 분회장, 옥천노인회지회 부회장, 농협 원로 청년부 회장, 이원농협 임원동호회 회장, 이원면 유도회 회장. 어느 것 하나 정이 가지 않는 자리가 없다. 하지만 이원면을 향한 나의 사랑이 눈에 보여야 말이지...

작가 이태경
작가 이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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