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가 끝이 나도 지원되는 독일 ‘하르츠피어’서 영감을 얻자

 

 [상상하라! 옥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과 노동 앞에 붙어 있는 부지런할 ‘근’인 근로는 '열심히 일하는 게 미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로 시장자본주의에서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도태되어야 하는 것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기본 논리라고 생각한다. 동정과 시혜가 그들에게 주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작동할 뿐, 실업은 곧 무능력의 표상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논리가 숨겨져 있다. 국가사회의 벼랑끝에서 밀려나면 곧 ‘죽음’이라는 등식은 민주노총에서 외친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이런 인식의 변화 없이 국가 정책이 변화할 리 만무하며,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과 '무능력자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내깔리기 이전에 최소한 사람으로서 사는 동안 인간의 존엄성과 존중감을 느끼게 해줘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국가의 도리 아닌가 싶다. 시장 자본이 국가, 사회의 공공성을 압도하는 이 엄혹한 시대에 경향신문 12월6일자 독일 하르츠 피어를 소개한 ‘무관심의 연대’ 칼럼에서 영감을 얻어 함께 쓴다. 

 '2000년대 독일의 실업률을 대폭 낮춘 '하르츠 개혁'을 고안한 페터 하르츠 전 노동개혁위원장은 ‘최저임금 인상은 확실히 성장에 기여한다. 경쟁력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이 최저임금을 존중하고 훼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독일인은 실업상태에 놓이게 되면 처한 상황에 따라 실업급여와 실업급여II, 사회급여를 지원받는다. 실업급여는 노동자가 월급을 받을 때 지불한 고용보험에 의해 실업 후 최대 1년까지 받게 되는 급여로 한국에도 도입되어 있어 생소하지 않지만, 독일인이 하르츠피어(Hartz IV)라 부르는 실업급여II는 2005년 1월1일부터 실행되었다. 하르츠피어는 노동의지가 있으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경우나, 실업급여 수급이 만료된 경우, 실업자 본인과 그가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족구성원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지원받게 된다. 하르츠피어 수급자는 2014년에 500만명에 달했으며 수급액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매년 새로 정하고 있다. 2014년 자료에 따르면 성인1 가정인 경우에는 월 53만8천650원을 지원받지만, 만5세, 만10세, 만14세 자녀 셋을 두고 아내와 함께 사는 50대 가장이 실직 후 실업급여 수령이 만료된 상태에서는 하르츠피어로 210만8천700원 가량이 지원받는단다. 이는 최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금이고 주택임대와 난방을 위해서는 별도로 지원된다. 2015년 하르츠피어 수급엑은 다음과 같다. 실업자 본인(53만8천650원), 성인반려자(48만6천원), 만0세~만6세 자녀(30만4천200원), 만7세~만14세 자녀(36만450원), 만15세~만18세 자녀(40만7천700원), 만19세~만25세 자녀(43만2천원), 만16세~만25세 청소년과 청년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살고 있는 경우(43만2천원).

 성인1의 경우에는 월 임대료(13.6~15.1평, 방1~2개)가 54만9천450원, 앞서 언급한 세자녀를 둔 50대 가장의 임대료(28.7평~31.8평, 방 5개)로 월 106만2천450원이 지원된다. 이외에도 난방비와 주택관리비 명목으로 추가지원이 가능하다' (독일이야기 https://dogilstory.tistory.com/ 참고)

 그런데 하르츠피어가 처음부터 하르츠 피어는 아니었다. '실업센터로부터 소개받은 직장을 한번 받아들이지 않으면 30%, 두번째는 60%, 그 다음에는 100%삭감한다. 헌재에서 위헌여부가 청구된 부분은 바로 이 제재에 관한 것이다. 독일 헌법재판관들은 하르츠피어의 제재를 위헌이라 판단했다. 제재는 30% 삭감까지로 한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헌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회국가를 위한 규율에 관하여 국가는 넓은 재량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재량은 최저생계비에 관해선 인정될 수 없다. 최저생계비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이기 때문이다. 입법자는 국민들을 교육시키거나 삶을 개선하려고 하는 목적이라해도 최저생계비를 삭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할 권리는 없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간의 능력이나 의무이행과 관련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이에게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문구는 경향신문 12월6일자 김진한 헌법전문가, 독일 에어랑엔대 방문학자가 쓴 ‘무관심의 연대’에 나온 칼럼의 일부분이다. 

 국가 정책이 변화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이야기할 테지만, 우리 지역부터 이런 철학과 인식 선상에서 자체적인 정책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인가. 옥천에 산다는 것만으로 최소한의 삶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살 수 있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신경쓰고 고민해야 할 지점은 ‘삶'이다. 보여주기 위한 경관을 막대한 예산으로 조성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지자체마다 정책 경쟁이지만, 우리가 사는 옥천은 아무리 약하고 힘 없는 사람이라도 존중 받는 삶으로 지향을 삼았으면 좋겠다. 잠시 잠깐의 보이는 행복보다는 일상속에 스며들어 번지는 행복이 중요하다. 힘없는 약한 사람이라도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더불어 산다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는 삶을 챙기는 현명하고 따스한 옥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일헌법재판관들이 내린 현명한 판결처럼 옥천에서도 그런 지혜로운 판단이 모든 정책과 사업에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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