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하숙집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

 

박세용 교수가 윤동주 하숙집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문화원장이 윤동주와 정지용의 하숙집에 대해 이야기한다.

새벽부터 분주하다. 

교토로 1920년대 조선인 정지용을 만나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7시. 치쿠고나고야역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숙소를 나왔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하쿠슈 생가·기념관 관계자(Kyoko Takada, Eriko Nisbida 등)가 배웅을 나왔다. 그들의 인정에 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어쩔 수 없었던 과거와, 미래로 가는 시간, 그것은 역사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현재에 살고 있는 나 그리고 우리의 미래.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으련다. 

8시. 교토로 이동하는 신간센에 몸을 실었다. 

실내는 넓고 깨끗하였다. 1945년 윤동주가 생을 마감한 감옥이 있었던(현재는 후쿠오카 외곽으로 이전) 후쿠오카. 그리고 필자의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징용을 갔던 후쿠오카. 이곳에 오면 아니 생각만하여도 울화통이 치밀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뭉툭한 쇳덩이가 명치끝에 달린 듯 더부룩하다. 후쿠오카를 떠난다니 개운하고 밍밍한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김선이 시낭송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정지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금방 지났다. 

12시. 교토역에 도착하니 키가 큰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조 상'이라 하였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던 교토조형예술대학으로 향했다. 박세용 교수는 윤동주와 강처중 그리고 윤일주 등에 대하여 설명한다. 

윤동주, 정지용, 박세용은 교토 동지사대학 동창이다. 그러니 박세용 교수는 윤동주나 정지용에 대한 감정이 보통 사람보다 더 애틋할 것이라 예상된다. 실제로 정지용 문학을 연구할 때 당시 상황이나 일본어에 대한 질문을 하면 촘촘하고 세세하게 답변해 준다. 

김승룡 문화원장은 정지용의 하숙집도 곧 찾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필자는 정지용의 하숙집이 교토식물원 근교에 있었다는 문헌을 찾은 적이 있다. 증언 구술자가 사라지기 전에 정지용에 관한 흔적들을 바르게 정리해야만 한다. 마음만 바쁘다.

해가 저물어갔다. 정지용이 거닐었을 '압천'에도 뿌연 어둠이 가라앉고 있다. 다리 위에서 '압천'을 바라보며 정지용이 유학을 시작한 "1923년 7월 京都鴨川에서"라는 창작 시점을 밝히고 있는 「鴨川」을 떠올려 전문을 싣는다. 당시 정서를 느껴보기를 권하며 1927년 『學潮』 2호의 표기법에 따랐다. 띄어쓰기나 시의 해설은 지면 사정으로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기로 한다.

鴨川 十里 벌 에
해는 점으러. 점으러.

날이 날마닥 님 보내 기,
목이 자젓 다. 여울 물 소리.

찬 모래 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 여라. 시연치 도 안어라.

역구 풀 욱어진 보금 자리,
수북이 홀어멈 울음 울 고,

제비 한 쌍 떠엇 다,
비마지 춤 을 추 어.

수박 냄새 품어 오는 저녁 물 바람.
오렌지 껍질 씹는 젊은 나그내 의 시름.

鴨川 十里 벌 에
해는 점으러. 점으러.

- 一九二三 · 七 · 京都鴨川에서 -
- 『學潮』2호, 1927. 6, 78-79면. 최동호 엮음, 『정지용 전집』1, 서정시학, 2015, 95면 재인용.

정지용 「카페프란스」의 배경이 되었을 ‘카페프랑소와’(교토 등록 유형문화재로 지정) 전경

'압천' 어딘가를 걸었을 정지용. 2019년, 그의 고향사람이 1923년의 정지용을 생각한다. 

거의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심하다. 어디 무심한 것이 세월뿐이겠느냐마는 자꾸만 가슴이 헛헛해진다. '나그네'의 설움 말고도 정지용이 이마를 벽에 부딪칠 만큼 서러웠을 시간들을 생각한다.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은 그의 고뇌가 미진하게나마 전해오는 까닭이다.

그리고 '카페-프란스'(교토 등록 유형문화재로 지정)로 간다. 이곳은 정지용이 유학시절(1923-1929)에 들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필자가 2006년 이곳에 들러서 들었던 일화의 기록을 소개하도록 한다. 

필자는 정지용이 동지사 대학에 입학한 지 83년 후인 2006년 9월 4일에 교토에 있는 동지사 대학에 갔다. (중략) 그는 경성이라는 낯선 곳과 일본이라는 적지를 만나면서, 또다시 그곳을 떠나면서 비로소 문학적 감성이 견고해졌으리라. 그리고 박춘옥, 박희균, 박세용, 통역학생의 안내를 받으며 압천을 따라 「카페프란스」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카페프란스'에 갔다. (중략) 이곳은 정지용이 다니던 그 당시의 주인의 딸(할머니가 되어 있었다)과 그 딸의 며느님이 운영하고 있었다. 의자와 탁자는 그 당시에 사용하던 것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고, 그 당시 사용했던 벽난로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할머니와 며느님은 정지용의 유학시절을 탐방 취재 중이라는 옥천문화원측의 설명에 깊은 호의를 보여주었다. 이 호의 속에서 유학생 정지용의 외로움과 그리움, 방황, 꿈, 낯섦 등이 함께 묻어났다. - 졸고, 「정지용 산문 연구」, 우석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 각주 33번 중에서.

이때 할머니는 "정지용을 안다"고 말하였다. "(정지용은)키가 작고, 친구들이랑 자주 왔다"고도 하였다. 할머니의 기억이 옳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 착각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고 다시 찾은 '카페프란스'에는 주인의 딸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여전히 벽난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몇 년이 지났다. 다시 찾은 이곳에는 벽난로의 흔적마저 없었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겠지만 필자는 그 이후로 '카페프란스'에 가면 밖에서만 서성거리다 발길을 돌린다. 201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필자의 내면적 자아가 정지용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는 현장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해 여름에 필자가 다녀간 교토의 '히에이산' 쪽을 가늠해본다. 정지용이 여학생과 걸어서 갔다는 '히에이산'. 정지용은 당시 징용으로 교토에 머물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과 만난다. 조선에서 유학 온 학생이라는 정지용의 설명에 후하게 대접을 해주는 조선인 노동자들. 그들은 히에이산에서 구한 고사리와 산나물을 갈무리하여 조선식으로 요리를 해준다. 

여학생과의 관계를 묻는 조선노동자들에게 정지용은 '사촌'이라고 대답한다. 정지용과 여학생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위로 섞인 덕담과 조선밥상을 대접받았다. 

이때 조선인 노동자들은 히에이산 케이블카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케이블카가 우리나라의 것과 좀 다른 열차형태로 되어있다. 이것은 아찔한 급경사를 오르내린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애환과 고통이 함께 실려서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히에이산 케이블카는……. 슬픈 생각에 잠기다 보니 귀가 멍멍해진다. 그래도 '히에이산 케이블카'는 한 번 타볼 일이다. 그리고 히에이산 정상에 오르는 길에 엔라쿠지에 들를 일이다. 그곳에서 고사리 들어간 우동을 먹어보길 권한다. 정지용과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목울대가 따갑다.

'기온거리'를 지난다. 일본의 옛 거리와 상점이 그대로 있다는 이곳. 정지용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호기롭게 혹은 갈등과 번민에 녹초가 되어……. 기모노를 입고 지나는 사람들 사이로 힐끗힐끗 1920년대가 날름거리는 듯하다. 그 사이로 박팔양과 정지용이 떠오른다. 박팔양에게 '압천' 이야기를 하였다는 정지용. 그 이야기를 듣고 교토까지 정지용을 찾아갔다는 박팔양. 이들은 압천을 거닐며 생각이 깊었을 것이다. 

19시. 동지사대학 한국 유학생회와 교류를 가졌다. 지용제 행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과 한국 유학생회의 교류가 있었다. 동지사대학 유학생 회장과 부회장 등이 참석하였다. 석식만찬 자리에서 필자의 테이블에는 동지사대학 2학년과 3학년 여학생이 함께 하였다.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분주히 살고 있었다. 그 분주한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부회장은 철학을 전공한다고 하였다. 이번학기를 마치면 한국에 들어가서 군입대를 할 예정이란다. 

현실은 때때로 발목을 잡고 멈추게 하거나 쉬어가게 한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기약할 내일이 있음에 안도의 호흡을 고르기로 한다.

일행들이 정지용을 생각하며 압천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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