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제 (옥천작가회의 회원, 동이면 세산리)

가을은 그 무엇인가를 향한 애틋함에, 눈이 맑아지는 계절인 것 같다. 만물은 결실로 충만하다. 결실은 보람이다. 들녘의 감들이 주렁주렁 주홍빛 물감을 토설해 내고 있다. 자신의 불순물을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스스로를 정화한 덕분이다. 부족한 부분을 비와 바람 앞에서 인내하고 절제하면서, 성실하게 믿음으로 밀어 올린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손에 보물을 잡고서도, 행복을 모르면서 살아간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모순'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병이 든 환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늘, 우리에게 설파를 하신다. 모두가 잠시 인연을 따라서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질 '허공 꽃'이라고 강조를 하신다. 밀어내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힌다. 그 '허공 꽃'을 잡으려고 원숭이처럼 분주하게 생각의 티끌을 굴리기에 세상이 시끄럽단다. 이해가 갈 것 같은데, 듣고 나면 또 헤매기 시작한다. 묘한 이치다. 이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칼을 들어 어둠을 상대로 다투지 말고, 그저 조용히 '내심낙원(內心樂園)'의 불을 켜 들란다.

오늘은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가을은 혼자 있어도 충만한 계절이다. 처처에서  충만과 감사의 기도가 들려온다. 

그 덕택에 온통 자연과 생명이'살아있음의 축복'으로 가득하다. 그냥 앉아서 하늘만 쳐다봐도 좋다. 이런 날 고구마를 캔다. 나는 그냥 집사람 곁에 있을 뿐, 도움은 안 된다. 새색시 볼처럼 맑은 감들이 빙그레 웃음으로 응원을 한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救荒)식품이다. 약방의 감초격이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생명력은 우리네 민족성과 '결'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유래는 조선 영조(1763년) 때, 조임이라는 선비가 대마도에서 들여와 부산에서 재배를 시작했단다. 나는 고구마만 보면 눈물이 난다. 아린 추억의 덕분이다. 우리 집은 늦가을부터 여름까지 고구마가 주식이었다. 겨울엔 방안에 큰' 통가리'를 만들어 놓고서 신주단지처럼 모셨다. 깎아도 먹고, 삶아도 먹고, 구워도 먹는다. 쥐 새깨들도 통가리 곁으로 모여든다. 함께 자다 보면 어느새 내 발가락을 긁는다. 새끼 쥐들은 귀엽다. 나도 그도 외로워서 친구가 되었나 보다.

고구마는 초봄이 되면 심는다. 손바닥 크기의 모종이 땅을 터전 삼아 뿌리를 내리면 왕성한 생육 작용을 한다. 

지금은 지구가 오염이 심각해서 농약 없는 농사는 꿈도 못 꾼다. 그러나 고구마는 농약이 필요 없다. 그만큼 강한 자생력을 갖춘 식물이다. 조금 자라면 고구마 줄기는 좋은 식자재가 된다. 

줄기를 살짝 벗기면 더없는 식품이다. 김치를 담그면, 아삭아삭한 식감이 별미다. 기름을 살짝 두르고 볶아도 좋다. 수확 전 고구마 줄기를 따서 삶아 볕에 말리면, 겨우내 우거지 버금가는 맛을 자랑한다. 고등어조림도 좋고, 갈치조림도 궁합이 맞는다. 잎도 따서 깻잎처럼 장아찌를 담가도 좋다. 겨울철의 고구마는 진귀한 보물이다.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 없다. 밥에 넣어도 좋고, 샐러드도 좋다. 우리 손주들은 구워서 주면 '할머니 최고!', 엄지 척을 연발한다. 나는 하루 한 끼는 고구마로 연명한다. 다이어트에도 좋고, 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해서 활력을 충전 시켜 주는 것 같다. 작은 손바닥 크기의 식물이 땅의 기운을 먹고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시행하는 듯하다.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자연의 적지 않은 은전이다. 이 작은 진실이 자연의 힘인 것 같다. 

자연은 생명을 보듬는 큰 보고다. 인간은 자연의 덕과 복 아래서, 잠깐 동안 노닐다 가는 '백년과객(百年過客)'이라는 선조들의 말씀이 가슴을 적신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연의 본질을 망각하고 산다.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에 현혹되다 보면 본질과 멀어진 삶을 누리게 된다. 자연은 늘, 참다랗게 우리들 곁에서 베풀지만, 인간의 교만이 세상을 흐리는 것 같다. 자연의 숨결을 가꾸고 보듬는 직업이 농사이다. 돈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땅을 버릴 수 없는 이유다. 고구마를 캐는 날, 많은 것을 흙 속에서 배운다. 새삼 흙의 소중함과 농사의 가치를 실감하는 날이다. 농사도 보람과 자부심으로 긍지를 느끼게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지도자들의 몫이다.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 사람 사는 맛이 아닐까.

고구마 캐는 날, 가을 금싸라기 같은 볕이 화살처럼 달아나려고 한다. 내 안의 조그만 씨앗들이 조금씩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면 가슴으로  파란 물감이 밀물처럼 밀려들 것 같다. 이 좋은 계절에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는 없을까. 그것은 내 마음의 궁궐을 짓는 방법일 터. 결국,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나'라는 실체를 지우는 작업이라는데. 나는 언제 그곳을 향하여 마음껏 비행할 것인가.

누구나가 '내심 낙원(內心樂園)'을 짓는 행복을 꿈꾸는 가을이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가을이 달아나려고 한다. 조그만 도토리 하나가 발등에 툭, 떨어진다. 하늘을 쳐다보니 온 천지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축복의 장이다. '마음의 상상'을 마음껏 즐겨보자. 자연이 베푸는 큰 잔치 마당 앞에서. 우리가 모두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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