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DMZ평화인간띠 잇기 공동위원장 맡았던 제일교회 이진 목사
‘사회개혁’ 기장의 존경받는 원로 고 이국선 목사가 아버지
산업선교활동과 지역운동 잇는 사회참여 목회활동 인천서 해와
10년 전 서울 강동교회 목사 사임하고 농촌 선교 사명 갖고 옥천으로 와

 

DMZ판문점 평화 인간띠잇기 옥천지부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한 제일교회 이진 목사
DMZ판문점 평화 인간띠잇기 옥천지부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한 제일교회 이진 목사

 10년 동안 웅크려 있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어느 순간’ 드러날 법한 존재였는데 그는 옥천에서 오랫동안 잠행했다.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그가 그간 옥천에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는 사회화 된 존재였다. 사회 깊숙이 들어가 평범한 사람들과 만났고 굵직한 정치적 이슈들을 가감 없이 끄집어내어 토론하며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가 불쑥 솟아난 것은 지난 4월27일 2018년 남북평화통일을 결의한 판문점 선언 1주년을 맞아 ‘DMZ평화 인간띠 잇기 운동’을 벌일 때였다. 그는 옥천지부 공동위원장을 맡아 206명의 옥천 주민들과 함께 철원 노동당사 앞에서 427민+평화 손잡기 행사에 참여했다. 이 날 옥천 주민들은 모두 8대의 차량을 이용해 철원으로 이동했다. 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소속 진보적인 교파의 목사로 이제야 지역사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폐교회가 된 옥천경찰서 앞 제일교회를 새롭게 일신하면서 교회 신자들과 작은 공동체를 이루면서 진보적인 가치를 오랫동안 나누고 있었다. 그는 새롭게 교회를 재건했다. 그냥 교회가 아니라 역사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신자들과 공유하는 교회를 재건했다. 역사와 사회 속에 동떨어진 교회가 아니라 참여하는 교회의 신앙 정신을 일궈놓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회 중 그의 강론을 거부해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항의하는 사람도 만났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역사 현장을 보여주면서 함께 가치를 나눠갔다. 지난여름 교회 신자들과 함께 제주도로 3박4일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제주 4.3항쟁이 있던 일대를 다 훑어보고 설명을 들으며 참 역사교육을 함께 했다.  기독교장로회에서 산업선교의 기틀을 닦은 역사적 인물의 고 이국선 목사의 장남인 이 진 목사가 옥천에 왔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회개혁, 진보적 사회활동의 맥을 놓지 않고 활동한 이 진 목사는 옥천 온지 10년 차 천천히 기지개를 펴고 있다. 427 평화 인간띠잇기는 그의 옥천 지역 활동의 첫 발이었다. 옥천에서 다가오는 총선도 그냥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했다. 진보적인 가치를 지닌 시민들이 모여서 사회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공론의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를 만났다.  

철원으로 가서 206명의 옥천 주민들과 함께 지난 4월27일 평화띠잇기 운동을 했다.
철원으로 가서 206명의 옥천 주민들과 함께 지난 4월27일 평화띠잇기 운동을 했다.

■ ‘참된 신앙’의 기치를 걸고 지역사회 개혁의 공론장 펼칠 터

 지난 8일, 옥천제일교회의 소박한 예배당에서 만난 이 진 목사(65, 옥천제일교회)가 무화과를 내밀며 말했다. 그가 대접해준 무화과에서는 달콤함과 오묘한 맛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자꾸만 먹고 싶어지는 맛이 났다.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이 목사는 “소개는 무슨, 여기 산 지 10년이나 됐는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 목사는 인천과 서울에서 40여년 목회 활동을 뒤로 하고, 10년 전 옥천에 정착해 옥천제일교회를 재건했다. 지난 4월27일에는 DMZ평화인간띠운동본부 주관 ‘4.27민(民)+평화 손잡기’ 행사에 옥천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새로이 옥천 지역사회와 관계를 시작한 그의 지난 인생사를 들어봤다. 그의 무화과처럼 그의 이야기도 강한 흡입력이 있어 마치는 순간까지 단 한마디도 놓칠 수 없었다.

제일교회 이진 목사와 8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제일교회 이진 목사와 8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 아버지 따라 목회를 꿈꾸다

 그의 목회 활동은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 고 이국선 목사는 기장 총회장, 한신대학교 이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 인권위원장을 지냈으며, 동인교회를 세운 인천 산업선교의 선구자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뜻의 동인(同人)교회는 대성목재공업주시회사 노동자들의 위해 지어진 산업선교교회다. 이곳에서 故이국선 목사는 탁아소, 노동조합교육, 노동자 신협조합, 대성 신협조합 등을 운영하며 노동자 및 인천 지역 복지를 위해 힘썼다. 

 이 진 목사는 이러한 아버지를 본보기 삼아 인천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27살에 인천에서 제2동인교회를 개척했다. 제2동인교회는 교인 수 120명 중 100여명이 운동권과 청년들일 만큼 개혁정신이 강했으며, 어린이집, 공부방 등이 운영해 지역 복지 활동을 했다. 

 인천NCC(National Council of Churches)인권위원회에서 총무 등 22년간 인천에서 목회 활동을 한 이 목사는 2004년에 서울에 위치한 강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한국 교회 교단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 2008년 기독교장로회 총무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마했다. 

 출마 직전 농촌의 열성적인 목회자들을 보며 한 “선거에 낙마하면 농촌에 가서 섬기겠다”는 결심대로 이 목사는 2008년 옥천에 정착했다. 

■ 농촌 목회의 삶

옥천 사람들에게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정다움이 있다. 이 진 목사는 외지 사람이지만 신기하게도 옥천 사람만의 정다움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 그가 도시 대형교회에서 누릴 수 있었던 편안한 목회를 포기하고 옥천이라는 농촌에서의 모험적인 목회를 선택한 그의 열정적인 마음에서 생겨난 것일 거다. 인천과 서울 등지에서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을 해왔던 그가 기독교장로회 총무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농촌 교회로 스며들었다. 너른 안목과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스스로의 진단 속에 기꺼이 신자 한명 없이 폐교회가 된 옥천제일교회로 자원해 왔다. 기독교장로회 거물급 인사가 옥천 작은 교회에 온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옥천에서의 목회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에 목회를 하면서 농촌교회에서 열심히 목회를 하던 목회자분들의 인상이 남았기에 2008년 사표를 내고 그 해 12월에 여러 농촌교회 중 개혁을 위한 옥천으로 오게 되었다. 제2동인교회에서 20년, 기장총회 선교국장 3년, 강동교회에서 5년간 목회를 했었지만,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충북 노회의 지원으로 당시 폐교회 수순을 밟았던 옥천제일장로교회 재건은 가능했으나, 문제는 교인이었다. 이 목사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문제로 옥천제일장로교회에 대한 주민 인식은 좋지 않았고, 타지에서 온 목사의 전도를 받아들이겠다는 이도 없었다. 이 목사가 “맨땅에 해딩하듯 교인도 없이 시작할” 걱정에 잠겼을 때, 교회 문을 두드린 사람들이 있었다. 주변 교회의 내부 분열로 교회를 나온 사람들이었다. “교인들이 교회를 지켜야지”라고 말하며 만류했지만 그들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고심 끝에 이 목사는 선교파송(설명) 형태로 그들을 받아들여 2008년 12월 25일 첫 예배를 했다.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일교회와 성도들 사진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관련된 모슬포와 성산에 있는 교회에서 찍은 사진. 옥천제일교회 이 진 목사 제공.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관련된 모슬포와 성산에 있는 교회에서 찍은 사진. 옥천제일교회 이 진 목사 제공.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관련된 모슬포와 성산에 있는 교회에서 찍은 사진. 옥천제일교회 이 진 목사 제공.
제주 4.3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관련된 모슬포와 성산에 있는 교회에서 찍은 사진. 옥천제일교회 이 진 목사 제공.

목회를 넘어 지역사회로

그가 이렇게 진보적인 목회를 추구하게 된 그 시작에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 만들었던 “목요회”에 있었다.  32세에 갑작스런 아버님의 별세로 인천NCC 총무역을 하며 인천의 역사를 뒤엎고 핵심적인 일을 한 ‘목요회’를 모임을 만들었다. 

이 진 목사는 초대 인천시의원 야권단일화회의때 일을 떠올릴 때면 담배냄새 때문에 고생했던 생각이 난다고 한다. 인천 지역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밤새 회의를 했는데, 장시간 회의에 지친 구성원들이 늘 담배를 피는 바람에 밤새 화장실 문을 열어놔야 할 정도였다고.

 그는 대건 고등학교라는 카톨릭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당시 명문 고등학교로 알려졌던 제물포 고등학교 선생들이 카톨릭 고등학교로 오게 되어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제물포 고등학교 1960-70년대 졸업생들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진 목사는 그런 인재들과 같은 제물포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았기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통하게 되었고, 마음이 맞아 “목요회”라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목요회의 구성원들은 기독교, 천주교, 의사, 교수, 변호사, 사회운동가 등 각자의 직업 분야에서 탁월한 인재들이었다. 이렇게 탁월한 인재들이 모인 목요회는 인천의 역사를 뒤집어엎는 핵심적 거점이 되었다. 목요회는 당시 돈만 내면 졸업장을 수여해주는 선인학원을 인천대학으로 시립화했고, 굴업도 핵폐기장 설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일을 해냈다. 뿐만 아니라 야권을 단일화하기도하고 인천 시의원을 7명 배출하는 등의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한 마디로 “대한민족의 혼이 깨어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나중에는 인천 시장들이 바뀌면 목요회에 인사를 올 정도였다고. 그렇게 목요회의 뒷받침이 진보적 성향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목회 방향으로 설정이 되게 되었다.

30여 명의 교인들과 제일교회를 다지다

옥천제일교회는 귀농·귀촌인 들을 포함한 3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올바른 역사 지난여름에는 3박 4일간 제주도 4·3사건 발생지 일대를 둘러보고 왔다. 과감한 시도였지만 마지막 날 모든 교인들이 제주의 뼈아픈 역사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려 회개했다. 저마다 생각과 의식이 달라지는 시간을 가져 뿌듯했다고. 뿐만 아니라 평화 및 통일 운동의 일환으로 15년 전에는 평양에서 백두산까지 발걸음 하는 열정을 발휘했다. 기존 교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혁신적인 활동 이유를 묻는 말에 이 목사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종교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십자가는 목걸이 십자가처럼 거는 게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거야, 자기반성을 통해 끊임없이 깨달아야 해 그게 ‘십자가’야”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 대한민국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올바른 기독교인들을 떠올리며  “현재의 한국 교회는 과거의 모습에 비해 반성해야 할 점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있었던 잘못된 것은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이 있으면 받아들였던 진보적인 성향을 되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 대한 철학을 짧게 설명했다. "교회 다녀야 무조건 천국 간다는 것보다, 지옥에 가지 않게 하는 거" 라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가서 자기를 보고 어떻게 살았나 반성하고 다시 올바른 길을 가면 된다."라고 한다. 새하얀 머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 이 진목사의 힘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부유해진 시절이기에 종교가 사회에 대한 보수화, 혹은 안정화 되어가는 모습에 정착보단 자신의 지역을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그는 올해 옥천에서 총선 후보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점을 가리키며 “옥천의 인구수가 지난 10년 사이 1만 명이나 줄었다”라고 어려워진 현실을 말했다. 제일 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사업을 하고자 옥천에 왔지만 지역 주민들이 외부인 들이라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아 실패를 겪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간 성도들도 많았단다.

 그는 옥천의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며 옥천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옥천의 교회들뿐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함께 깨어 있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장에서 작금에 ‘검찰개혁’ 목소리를 외치는 데 그보다 이면에는 ‘언론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쳐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 사회 현안들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신문사의 기자들이 늘 사실에 근거한 기사를 써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옥천에는 옥천신문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옥천신문이 그런 계속 역할들을 이어 나가주기를 바라고 지역주민들도 행동하고 실천하는 주민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김유진, 임윤석, 문초희 풀뿌리청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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