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권 [옥천민예총 문학동인지 제27집 『그래도 꽃』]

나는 아직 꽃이 터지기 전 녹둣빛 도라지 꽃망울 속에 있고요
그 사진 속에 있는 문 안에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붉은 물 돌기 전의 앵두나무 이파리 속에도 있고요
감자의 움푹한 씨는 속에도 숨어있었습니다

나는 목련의 겨울눈에서 잠을 잤고요
개구리 메뚜기 토끼의 뒷다리에 숨어 있었고요
방금 그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뚜껑을 닫은 상자 속에 들었고요
놀란 눈을 한 그 아이가 급히 삼켜버린 것이고요
아까 그 주정뱅이 아저씨가 울며 감춘 술병 속에도 있었습니다

나는 방금 떠난 기차의 기적 소리이고요
어젯밤 지나간 소나기를 따라갔기도 하고요
과일장수 아주머니의 전대 속에 돈과 함께 있었고요
포장마차 진열장 고등어 뱃속에 숨어 있기도 하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전
버튼을 누르던 떨리는 손가락에도 있었습니다

모든 곳에 있기도 하고
어느 곳에도 없기도 하고
아무 데나 있기도 하지요
내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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