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황한순 어머니

1929년생, 출생년도만으로도 그 울림이 묵직한 95세 어머니.
어머니의 작은 어깨, 와락 안아주고 싶어 잠시 주춤했다. 신문사에서 온다고 입술을 바르고 계신 어머니. 뒤돌아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열다섯 살, 큰 애기의 얼굴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했다. 세월이 야속하실까? 그리우실까? 너무 고운 어머니 모습에 고마움이 밀려오는 건 어떤 심정이었는지 나에게 다시 묻는다. 아마도 곱게 나이 드신 어머니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며느리 이거여”라며 엄지를 추켜세우신 고부의 정도 어머니의 고운 모습을 만든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들내외와 고운 어머니, 훈훈한 수채화 한 폭 수놓아도 손색없는 어머니 댁 정경이었다.

■ 이제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은 유년

보은 회남면 조곡리가 고향인 나는 작은 마을의 먹고 살만한 집 딸이었다. 공부는 하고 싶었지만 농사가 많다보니 살림이 크고 남동생들 챙기는 일이 내 몫이었다. 애석하지만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과의 전쟁이 아니라 누나로서 남동생을 챙기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인 것이 시대정신이던 때다. 여자로 태어나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가 여인들에게 미덕이라고 가르치던 시절이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학교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 그리움과 갈증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들의 성장에 정성을 쏟아 붓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이름들, 이남년 윤점례 박복순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이다. 90이 넘으니 온통 그리움 투성이다. 

■ 우연처럼 다가와 70년 연리지를 같이 심은 남편

남편(정진복)과의 만남도 우연처럼 다가왔지만 천생연분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우리 큰집에서 새끼머슴 살던 분이 우연찮게 중매쟁이가 됐다. 이웃분이 친정아버지(황선석)에게 중신을 한다고 하셔서 아버님이 신랑자리를 보러 가던 길에 큰집 새끼머슴이던 분을 만났다. 아버님에게 “형님, 어디 가셔요?”, “응, 우리 한순이 신랑감 보러 간다” 했더니만 그럼 “내가 아는 총각 한번 만나보슈” 라고 건넨 한마디가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

아버지는 예정에 없던 만남이지만 남편을 만나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시며 어머니에게 망설임도 없이 그 청년한테 시집보내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우려되는 마음에 “사는 건 좀 보고 왔나요?” 걱정 섞인 마음에 말을 건넸지만 아버님은 ‘사람하나 보면 돼요’ 라고 즉답을 하셨다. 아버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지만 살림 걱정 없이 살던 나에게 맨 바닥에서 일궈야 하는 시댁의 여건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월을 거슬러 시집가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아득히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렴풋이 연지곤지 찍었던 한순이 얼굴이 보인다. 가마타고 세천에 내려서 걸었던 길도 없는 시골의 풀숲, 돌멩이로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던 한순이. 그 이후로 어느새 성큼 달려와 75년을 살아냈다.

생전남편과 함께

■ 시댁 그리고 남편, 숙제같았지만 결국 내가 보듬어야 할 식구들

결혼 후에 남편은 19살에 병사구사령부(현:병무청)로 입대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기거하다가 친정으로 돌아왔다. 시집오기 전부터 손끝이 야무지고 솜씨가 좋았던 나는 재봉일을 잘해서 제품집에 취직을 했다. 속앓이 하면서 남편만 기다리는 아낙으로 살지는 않았다.

그때쯤 우리 어머니가 작은 시동생을 낳았는데 결국 내 차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8남매 9남매가 예삿일이니 시집온 새댁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같은 해에 출산을 하는 경우들이 흉이 되지 않았다. 그 틈에 시누이, 시동생 키우느라 정작 내 새끼 젖은 제대로 못 물리는 여인네들도 많았다. 시댁이라는 이름은 내 새끼보다 늘 먼저인, 우리 여인들에게 넘지 못할 산이었다.

나도 첫 딸내미 애영이가 생겼다. 아가씨보다 우리 딸이 한 살 위라 아가씨 똥 기저귀도 빨아서 키웠다. 나이가 비근하니 둘이 티격태격할 때는 시누이 나무랄 수도 없고 우리 딸이 안쓰러워서 내내 마음 졸였다. 

■ 길도 없던 강원도 산골에서 살림을 시작하며 

1등상사로 직업 군인이던 남편을 만나러 큰 딸 애영이 손을 잡고 남편의 부대에 찾아갔다. 지금도 강원도는 먼 거리이지만 대중교통 시설이 척박하던 시대 강원도는 말 그대로 두메산골인 곳이었다.

꼬박 이틀이 걸려서 남편의 부대에 도착했다. 딸을 품에 안은 남편은 한손으로 내 손을 슬며시 잡고 발걸음을 뗐다. 친정에서 귀하게 자라던 큰 애기였지만 결혼을 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면서 강원도의 그 산골처럼 길이 없던 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 갔다. 

듬직한 남편과 사랑스런 딸, 길이 없는 그곳에서도 두렵지 않은 건 남편의 굳게 잡은 손과 딸의 재롱이었다. 남편의 부대 앞에서 7-8개월 살았을 무렵, 남편이 제대특명이 내렸다고 집에 가있으라고 해서 애영이를 데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달래서 집으로 돌아왔다.

찰흙공장 하던 시절
찰흙공장 하던 시절

■ 약방과 찰흙공장을 하며 살림을 불려나가다  

군에서 약을 취급하던 남편은 총기 있고 눈썰미가 좋아서 배운 경험으로 약방 면허를 취득해서 약방을 차렸다.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은 공부해가면서 대전 전민동 허허벌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우리는 60년 전에는 앞서가는 사업이던 찰흙공장을 했다. 찰흙, 당시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어느 누구 예외도 없이 미술시간에 공작용으로 쓰던 재료다. 대중화된 상품으로 공장을 운영하니 돈도 벌면서 놉도 얻어서 일을 시키고 집도 한 채 두 채 사면서 살림 불려 나가는 맛에 힘든 줄도 몰랐다. 

기계를 돌려서 네모난 봉지에 찰흙을 꽉꽉 채워 박스에 넣고 납품하면 몸은 고단해도 일하는 재미는 제법 컸다. 내조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그만큼 결실이 좋았던 때라 열심히 살았다.

■ 사랑이라는 이름들

4남매를 두었다. 지금은 옥천에서 아들 며느리와 살고 있는 복 많은 노인이다. 우리 며느리 자랑은 참을 수가 없다. 26살에 시집 왔는데 실낱 끝 만 한 소리도 안 하는 우리 며느리. 매일 가는 주간보호센터에 가서 며느리 자랑이 빠지지 않으니 다들 웃어넘기지만 참으로 고마운 며느리다. 우리 시아버님은 우리 아들 낳고 나는 아들 한 번 업어 줄 새도 없이 손주를 금지옥엽처럼 사랑해주셨다. 우리 며느리가 그 아들의 안식구이며 내 자랑이다. 사랑도 대물림이며 거스를 수 없는 유전자이다.

우리 완영이 친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한 아이가 있었다. 영동이 고향인 친구인데 그 아이 어머니가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쌀 한 자루를 갖고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 그 무거운 걸 어찌 들고 왔느냐 하니 자식 맡겨놓은 마음을 어떻게 보답할지 모르겠다고. 그 심정을 나도 헤아리고 남았다. 자식은 그렇다. 곁에 있어도 마음 졸이고 바라보면 마냥 좋아서 가끔씩 어디서부터 맺어진 인연인지 그 발원지를 모르는 인연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그랬고 내가 자식에게 또 그렇게 했다. 

■ 하루 7식으로 남편을 섬기다

남편은 5년 전에 마음이 급했었나 먼저 먼 여행을 떠났다. 남편도 90세에 먼 길을 떠났으니 우리부부 18살에 만나 70년 넘게 살아왔다. 남편한테 말대꾸 한번 제대로 해 본적이 없다. 여인네의 덕목이라고 아버지에게 배우고 내내 그리 살았다. 남편에게 하루 7식을 만들어주면서 내조를 했다. 말이 7식이지.

굳이 나열해보면 식전에 가볍게 준비, 아침, 샛밥, 점심, 샛밥, 저녁, 주무시기 전에 술 조금 장어 몇 점 구워서 안주로 내 놓는다. 당연하듯이 했고 남편은 감사하게 내내 나의 든든한 우군으로 곁을 주었다가 먼저 여행길에 올랐다. 

나도 간간이 그 여행길에 언제 오를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아직도 바늘귀를 꿸 만큼 눈이 밝아 손으로 설거지용 수세미도 뜨고 손녀들 옷도 재봉틀로 리폼해서 입는 신식 할머니이기는 하다. 지금까지 설거지용 수세미를 떠서 선물한 것이 족히 천장은 될 거 같다. 눈이 밝은 게 마냥 기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우리 며느리한테 손이 많이 가는 시애미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아직도 여자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고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외출할 때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는다. 

직전 만든 된장을 옥천군에 기증.
직전 만든 된장을 옥천군에 기증.

■ 어느 틈에 여기까지 

3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썼던 마스크를 나는 아직도 꼭 쓰고 다닌다. 1929년생이니 살아오면서 온갖 일들을 겪었지만 ‘코로나’라는 무서운 복병은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주간보호센터에 가서도 마스크를 꼭 쓰고 있다. 나를 지키고 친구들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나이 들수록 더 조심스럽다. 

“할머니 고우세요”라는 말을 듣고 살게 해주는 우리 사랑둥이들이 있다. 아직도 손주들한테 용돈 줄 수 있는 할미라 나의 소소한 낙(樂)이기도 하다. 우리 4남매 애영, 완영, 미영, 도영이와 손주들 상일, 상미, 상아, 유진이, 유정이, 은수, 혜련이, 혜정이, 동은이 호중이. 

이름만으로도 울컥하다. 우리 영감님과 내가 심은 뿌리 깊은 나무의 실한 열매들이다.

95년이 한 많은 세월로만 점철되지 않아 감사하고 지금은 내 곁을 지켜주는 우리 며느리가 나에게 가장 든든한 우군이다. 아직 한낮은 햇살이 뜨겁지만 새벽녘이면 한기가 돌아 이불을 끌어와 배위에 얹어야 한다. 계절은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리 곁에 머문다. 여인으로 내내 살아가다 남편 곁으로 가게 된다면 나는 족하고 족하다. 가슴 설레는 날들도 있었고 고단했지만 말없이 손잡아 주는 남편,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존재의 의미가 있었다. 어느 새 여기까지 왔을까 반문하면 누가 나에게 그 해답을 줄 수 있을까. 

허나, 지나온 시간이 쓸쓸하지 않은 건 고마운 아들 며느리 덕분이라고 말한들 흠 잡힐 일이 없다. 오늘은 이 말을 꼭 하고 싶은 날이다. 

“나처럼 복 많은 할매 있으면 나와 보시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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