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 이원초에서 전학 와 김현식과 만나…학년 주름잡던 '대장 김현식'
'구읍 사거리는 현식이네 집…커피부터 통기타까지 신문물 가득했다'
'대학가요제 출전 후 연락 닿은 김현식은 밤무대 휩쓸던 인기 가수'
죽향초 제59회 동문 김홍민씨가 추억하는 김현식

김홍민(63)씨의 어머니 강숙동(92)씨의 지갑 속에서 발견된 초등학교 시절 김현식의 모습. 지난 회 선옥희씨가 제공한 사진처럼 1968년 옥천읍 옥각리로 봄소풍을 떠나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윤선중씨, 금달순 선생님, 김상진, 김현식, 김홍민이다. 

[옥천인물발굴] 1965년 9월부터 1968년 9월까지. 2~5학년까지 약 4년간 죽향초에 다닌 가수 김현식의 자취를 좇기 위해 그간 우리는 죽향초 제59회 동문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윤선중씨와 인터뷰는 김현식을 기억하는 동문들과 연결점을 만든 첫 시작이었고, 선옥희씨와 인터뷰에서는 김현식의 초등학생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사진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과의 인터뷰에서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홍민(63, 서울시 강서구)씨다. 그는 1966년 경 이원초등학교에서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왔다. 서울서 1965년에 전학 온 김현식보다 조금 더 늦게, 당시 죽향초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아버지 김창구(93)씨 따라 구읍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김홍민씨는 당시 김현식과 절친했다. 윤선중씨와 선옥희씨가 그랬던 것처럼 죽향초 밴드부 활동도 같이 했다. 그리고 김현식처럼 성인이 된 후 1979년 개최된 제3회 MBC대학가요제 충북대표로 참여하는 등 음악활동을 펼쳤다. 어쩌면 이같은 예술적 감각들이 어린시절 김현식과 친해진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김홍민씨는 어린시절 김현식의 음악과 관련한 일화를 유일하게 아는 친구이기도 하다.

이번 '옥천 인물 발굴 김현식편'에서는 김홍민씨의 관점에서 1966년부터 김현식이 전학을 간 1968년 9월까지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성인이 된 후 김현식과 다시 만난 시점까지 포함하고 있다. 

 

1979년 열린 제3회 MBC대학가요제 앨범사진. (사진 갈무리: 지니뮤직) 김홍민씨는 청주대 학생들과 '셀러멘더스'라는 팀을 꾸려 충북 대표로 출전했다. 당시 출전곡이었던 '헤어진후에'의 작사, 작곡 모두 김홍민씨가 총괄했다.
김홍민씨의 모습 (사진제공: 김홍민씨)

■커피와 통기타, 신식 문물로 가득찼던 현식이네 집

현식이는 2학년 때 전학을 왔으니, 어찌보면 나보다 죽향초등학교를 더 잘 알았을 거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김현식과 마주했을 때 '대장' 느낌이 강했다. 현식이는 참 활달하고 괴팍했다. 으레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식이도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 현식이와 나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나는 죽향초에 교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왔는데, 그게 현식이 눈에는 거슬렸나 보다. '교감 아들이라고 뻗대지 마라'라며 티격태격 했다. 하지만 성향이 비슷해서 그런지 금방 친해졌다.

당시 우리집은 죽향초 옆에 있는 교장 사택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현식이와 자주 집에서 놀곤 했다. 겨울 밤이면 골목마다 묵 장사들이 '묵 사세요'를 외쳤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묵 한 모를 사주시고 동치미도 한 그릇 내주셨다. 현식이가 혼자 지내다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강했던 어머니였다. 그래서 자주 데리고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나 역시 현식이네 자주 갔다. 내가 기억하는 현식이네 집은 구읍 사거리에 있었다. 집 앞에 큰 대문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울서 산다고 했고, 할아버지가 현식이를 키웠다. 할아버지는 근엄했고, 당시 꽤 부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현식이네 집을 부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보통 집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제일 충격이었던 건 '커피'였다. 지금이야 커피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부잣집에나 있는 귀한 물건 이었다. 현식이네 집에 갈 때마다 커피 한 스푼에 설탕 두 스푼을 넣고 마셨다. 둘다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나 보다.

다른 친구들은 현식이가 노래를 잘하거나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고 하지만 내 기억 속에 현식이는 남달랐다. 현식이네 집에 통기타 한대가 있었는데, 집에 갈 때마다 통기타를 잡고 연주를 했다. 물론 운지법이 정확했던 건 아닐테지만, 흉내를 기가 막히게 냈다. 노래자랑 대회를 나가서 부상으로 냄비 같은 것도 받아왔던 것 같다. 현식이는 늘상 '홍민아, 너는 영화배우가 되고 나는 가수가 돼서 다시 만나는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68년 옥천읍 옥각리로 봄소풍을 떠나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첫째 줄 제일 오른쪽에 자리잡은 사람이 가수 김현식이다.둘째 줄에는 선옥희·김묘향씨가 보인다. 첫째줄 맨 왼쪽은 지난주 인터뷰를 진행한 윤선중씨다. 바로 옆 멋진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은 당시 이들의 담임이었던 금달순 선생님이다. 금달순 선생님 옆에 김현식과 절친했던 김홍민씨도 보인다. (사진제공: 선옥희)

■한남동 하얏트 호텔 밤무대서 노래하던 김현식

현식이가 5학년 2학기에 전학 간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엄마랑 아버지 사업이 잘 돼서 떠나는 것이었나? 여하튼 그랬다. 시간이 흘러 나는 청주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음악에 뜻이 있었던 나는 1979년에 '셀러멘더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제3회 MBC대학가요제에 나갔다. 당시 사회사업과 1학년이었던 가수 권인하도 포함해 6명이 팀을 꾸려 출전했다.

대학교 3~4학년 때인가 친누나가 TV를 보더니 '쟤 현식이 아니야?'하더라. 현식이라는 친구의 존재를 잊고 살다가 TV를 통해 조우한 거다. 그때가 MBC가요제에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라서 친분이 있는 PD를 통해 현식이의 연락처를 구했다. 현식이는 당시 서초구에 있는 구반포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됐다. 

처음에 현식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이 가물가물하다고 말했다. 아쉬운 마음에 '너 이자식,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으면 안되는 게 있잖아! 나 교감 아들'이라고 말하자마자 현식이가 '홍민아!'를 외쳤다.

현식이는 주로 나이트클럽에서 밤무대 가수로 활동했다. 당시 방송 출연은 많이 안했지만, 이미 그는 밤무대에 황제였다. 현식이가 노래하던 한남동 하얏트 나이트클럽에 직접 가서 그의 노래도 들었다. 노래를 할때마다 여대생들이 환호성이 이어졌다. 

특전사 장교 시절 사복을 입고 종종 하얏트 나이트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양주도 마시고 했다. 현식이의 주량은 엄청났다. 건강이 심히 염려됐다. 내가 만난 현식이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밝은 표정은 아니었고 어딘가 모르게 우울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금거북이길에 '내 사랑 내 곁에' 노랫말이 새겨졌다. (사진제공: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

■어머니 지갑 속 잠들어 있던 그 시절 김현식과 김홍민

현식이와 만남을 이어가다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다시 그의 소식을 들은 건 1990년, 현식이가 하늘로 떠났을 때다. 현식이가 죽고 나서 언론사에서 많은 연락이 왔다. 어린시절 현식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냐는 물음들이 이어졌다. 당시 나의 어린시절 사진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께도 연락이 갔는데, 어머니는 현식이와 찍은 사진은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때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 정리를 하다가 지갑 속 사진을 한장 발견했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난 현식이의 어린 시절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 사진은 1968년 옥천읍 옥각리로 봄소풍을 떠나 찍었다. 지난 번 친구 선옥희가 준 사진과 동일한 때, 동일한 장소에 찍은 거다. 

옥천신문에서 잠들어 있던 현식의 역사를 다시 깨우는 것 같아 기쁘다. 사실 조금 늦은감도 있는 것 같다. 죽향초등학교에서 4년간 보냈던 그의 시절은 매우 뜻깊다고 생각한다.

대구의 김광석 거리가 잊지 않느냐. 김광석은 대구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 머물렀음에도 거리를 조성했고, 이제는 큰 관광지로 자리잡았다. 옥천하면 정지용 시인. 이 공식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정지용 시인 뿐 아니라 80~90년대를 주름잡았던 김현식 역시 옥천의 문화 자산으로 기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현식 5집 앨범사진(사진 갈무리: 지니뮤직)


1990년 3월 김현식은 '넋두리'를 타이틀곡으로 한 5집 앨범을 발표한다. 앨범 발매 후 1990년 7월 한 공연에서 김현식은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하는 모습이 포착되는데, 이는 곧 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대마초 유혹을 이기기 위해 술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간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건강 악화가 가속화된 시점에 발표한 김현식의 5집 앨범은 수록곡 '할렐루야'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특징이 있다.

▶김현식 5집 다시보기

1. 향기가 없는 꽃

2. 넋두리(타이틀)

3. 그거리 그벤취

4. 도시의 밤

5. 거울이 되어

6. 재회

7. 사랑의 나눔이 있는곳

8. 밤의 고독속에서

9.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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