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이원면 이명숙

차의 시동이 꺼지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어머니가 내리셨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기사를 대동하고 오셨다. 바로 막내며느리. 세 명의 며느리들이 어머니의 외출에 돌아가면서 운전기사가 되어준다니 어머니는 복도 많으셔라. 건강 검진차 대전 성모병원에 오시는 길에  보자고 하셔서 주차장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거동은 불편하시지만 곱게 단장하신 모습을 보면서 돌아가신 친정 엄마 생각에 울컥! 손을 잡아드리고 꼭 안아드렸더니 어머님은 더 세게 안아주시며 말 대신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며느님은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두 번이라 즐거워요” 라고 하지만 어디 쉬운 일인가 대전에서 와야 하고, 청주에서 온다. 딸도 하기 어려운 일을 며느리가...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
어머니는 억척같이 살아온 87년의 이야기를 한두 시간에 어찌 쏟아낼 수 있냐시며
한숨부터 내쉬셨다.

 ■ 시대가 잉태한 가련한 여인들

옆집에서 나는 울음소리에 새벽부터 다들 혼비백산이었다. 내 기억의 가장 끄트머리인 다섯 살 무렵이었을 거다. 한동네 살던 사촌언니가 일본 놈들에게 끌려갔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을까?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겁에 질렸지만 언니는 위안부로 잡혀갔다. 열다섯 살 소녀들은 위안부로, 까까머리 소년들은 징용으로 끌려가 피어보지도 못한 청춘은 가혹하게 짓 밟혔다. 몹쓸 놈의 인간들. 우리가 일본에 치를 떠는 까닭에는 다 이유가 있다.

‘무조건 싫어’가 아니다. 치욕의 세월이 너무 길었고 가혹한 시간의 깊이가 우리의 정신까지 말살시켰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도 못 부르게 하고 조선 사람들 피고름을 다 짜내야 속이 시원했다. 우리와 무슨 철천지원수가 졌는지...나는 지금도 생각만하면 치가 떨린다. 

간신히 정신을 차릴 무렵 해방이 돼서 동네는 한바탕 잔치를 벌였지만 사촌언니의 행방은 묘연해서 찾을 길이 없었다. 언니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누가 어디서 봤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언니가 무슨 죄가 있나. 시대를 잘 못 만나 가련한 여인이 된 것을.
딸을 그렇게 보내고 큰 어머니는 한동안 넋을 잃고 시름시름 앓았다.

결국 해방을 못 보고 돌아가셨는데 큰 어머니는 딸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망연자실 한 채로  저수지에 빠져서 돌아가셨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것이다. 한동안 우리 집안의 침묵은 계속됐고 시대는 가련한 여인들을 너무도 많이 잉태했다.

시련이 잠잠해질 무렵 우리는 다시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눈물을 또 흘리며 역사 앞에서 넋을 잃어야 했다. 피란길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눈앞에서 보고 겨우 쪽잠을 자면서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엄마 손을 놓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말로만 듣던 생지옥.

■ 박봉의 교사남편이 드리운 그늘 아래 앉은 아홉 식구 

내 인생 학교에서 벌써 8학년이 되었다. 8학년7반이다. 옥천여중을 졸업하고 집에서 살림을 돕고 있을 때 스무 살에 보은 사는 남자, 김영철과 결혼을 했다. 고모가 시댁 동네로 시집을 가서 시어머니와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중신을 서면서 착실하고 인성 좋은 남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다. 남편은 스물다섯 살, 보은에서 중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7남매를 키우려니 숨이 턱까지 찼다.
제대로 먹이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입히지도 못하고 오빠 옷을 막내딸이 물려 입기도 했다.

막내는 오빠 옷도 한 마디 투정 없이 받아 입었다. 기특하고 또 기특하다. 엄마가 해준 것도 없는데 학교 선생님이 됐다. 아이들한테 존경받는 선생님이다. 

아들들은 불어터진 칼국수만 끓여줘도 허겁지겁 먹어대더니 큰 아들은 이사관으로 퇴직을 해서 어느새 칠순을 바라보고 손녀를 보았다. 큰 아들이 걸어온 인생만 67년인데 나는 20년을 더하니 내가 너무 오래산 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잘한 것이 있다면 아들과 딸을 차별해서 키우지 않아 오빠 출세시키느라 여동생이 희생하는 안쓰러운 일은 우리 집에서는 없었다. 

60년 친구, 동서
60년 친구, 동서

시대도 여자들의 헌신을 강요했는데 집에서까지 딸들을 속박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옷 물려 입는 것은 어려운 살림에 지혜 정도로 생각했고 우리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했다. 공부할 기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아들, 딸 차별 없이 주었다.

며느리들도 서로 효부상을 다투기라도 하듯이 어찌나 잘하는지.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굳이 미사여구를 찾을 필요도 없다. 

나는 내 옷 한번 사 입어 본적이 없다. 남편의 늘어진 메리야스는 내 여름 티셔츠였고 맵시 갖추는 옷을 한 번도 입어본적이 없다. 그래도 억울하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그리고  말썽부리지 않는 아이들 덕분에 힘이 났다.

남편도 늘 ‘미안하다’, ‘고맙다’를 입에 달고 살던 양반이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됐다.
세상은 공평해서, 평화로운 가정이었지만 나도 호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속앓이 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
시어머니

■ 억울한 유산, 호된 시집살이 

가슴에 한이 많던 시어머니는 화가 나시면 밥상을 엎어버리기 일쑤였는데 남편도 어머니한테는 꼼짝을 못했다. 아니 어머니의 화를 그저 바라보고 보듬어 주었다.
나도 넓은 가슴을 갖고 싶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숨이 막혔다.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는 시집살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머님도 할머니에게 대물림 받은 억울한 유산이다. 안쓰러운 두 분이다.
우리는 다들 자애롭고 싶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미명 아래 헐뜯고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마음 품이 넉넉하면 남을 원망할 일도 괴롭힐 일도 없다.
상처가 깊어져 마음 품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나도 목 놓아 울었다.
시집살이의 고리가 끊어져 내 삶이 자유로워 질 것이라는 착각을 했지만 마지막에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던 어머니의 숨소리를 기억한다.

“미안하다”
당신의 상처를 풀어낼 존재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던 가여운 여인, 시어머니.

■ 인내 후에 찾아오는 달콤한 날들 

나는 반면교사를 배웠다.

우리 며느리들에게 딸처럼 대한다.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 그저 딸처럼 흉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최선의 것을 찾는 게 중요하지 전부를 원하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우리 며느리들이 딸 같지만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더 고맙고 기특하다.

내가 외출할 때면 서로 번갈아가면서 운전기사가 되어주는 우리 며느리들 너무 착하고 귀한 아이들이다. 

남편은 6년 전에 폐암이라는 원치 않은 친구를 만나서 ‘친구 따라 강남간다’더니 그 친구따라 아주 멀리 멀리 가 버렸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다간 우리 시대의 외로운 가장이었다.

어머니 모시고 7남매 키우고 마누라 눈치 보면서 학교에 충성하고 학생들에게 자상하던 착한 사람 그이.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남편.
남편 도시락까지 아침마다 10개의 도시락을 싸던 그 시절이 벌써 아득하다.
세월은 언제 이렇게 흘러왔는지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 할 수도 없다.
그저 흘러온 그 시간 앞에서 숙연해지고 작아지는 나를 만나는 수밖에.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바깥출입을 잘 못하고 며느리 손을 빌리지 않으면 외출도 어려운 그 때가 왔다. 남은 숙제라면 아름답게 저무는 것이 복인데 과연 아이들한테 험한 꼴 안보이고 이 세상 소풍을 끝낼 수 있을지.

입춘, 경칩이 지났다. 자연은 거짓을 몰라 때가 되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선다. 
목련 꽃잎 봉오리들이 작은 입술을 간질간질 하더니 어느새 꽃봉오리들이 활짝 웃기 시작했다. 머잖아 꽃들이 앞 다투어 어여쁨을 뽐내느라 눈이 부실 텐데 얼마나 더 그 황홀한 그림을 볼 수 있을지.

귀여운 손녀들
귀여운 손녀들

내년 봄날에도 교동 저수지의 벚꽃 길을 며느리가 운전하는 차에 앉아 누릴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그러하지 않은 들 후회가 없다. 친구 따라 먼저 간 남편과 조우하는 기쁨을 또 누리면 된다. 

광활한 우주의 한 점이었던 내가 90년 가까이 소풍을 다녀간 것을 추억해 줄 단 한사람만 있어도 외롭지 않은 인생이다.
오랜만에 우리 7남매 이름 한 번 불러봐야겠다.

건형이, 건우, 미옥이, 건욱이, 건승이, 영옥이, 순옥이
아...때론 소롯길도 걷고 어느 날은 가파른 언덕길도 오르내렸지만 지나고 보니 따뜻하고 고운 소풍이었다. 마치 봄날처럼! 

큰 며느리 편지 

“우리 엄마 너무 좋으셔”
40년 전 애비가 어머니 뵈러 처음 가던 날 약간 떨고 있던 저한테 여러 번 했던 말 이었어요. 
맞아요. 어머니는 정말 너무 좋은 분이었어요.
저를 보자마자 손을 꼭 잡아주시고 어깨를 토닥여 주시던 어머니.
눈물 참느라 혼났어요 어머니. 
친정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저한테 어머니는 친정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엄마’ 였어요.
어머니. 젊은 날에도 너무 고우셨고 지금도 너무 아름다운 어머니.
넉넉한 그 품을 닮아보고 싶었지만 이번 생은 따라 하지 못할 거 같아요.
어머니의 며느리인 것이 자랑스러워요 어머니.

저 은행 다닐 때 열심히 일하라고 승욱이 승주 승헌이 키워주시느라 너무 고생하신 어머니. 
즐겁다고 말씀하셨지만 얼마나 힘드셨어요? 
어머니 사랑과 헌신에 눈곱만큼도 보답 못해서 죄송해요 어머니.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하신 말씀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요.
우리는 누구나 잠시 소풍 다녀가는 거다. 살만큼 살다 가면 당연한 것이지
그리 슬퍼말고 우리의 삶을 잘살자. 어머니의 담대함과 경륜을 감히 따를 수가 없어요.

올 해도 제가 꽃구경 많이 시켜드릴게요. 
내년에도 후년에도 우리 계속 봄 꽃놀이 오래오래 해요 어머니.
앞으로 제 차는 어머니 병원용 보다 나들이용으로 더 자주 쓰고 싶어요.
거동이 불편해지신 어머니 보면 안타깝지만 그래도 미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셔서
그것만으로 너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큰 며느리 정 선아.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