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생 군북면 김순임

절기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있다. 엄동설한에 바깥출입도 못하다가 입춘 지나고 추소리부터 옥천읍내까지 찬찬히 걸어보았다. 이백리에서 하천을 끼고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가니 처음 본 서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자기를 굽는 집인지 그릇들이 여기저기 앉아있고 한 번더 좁은 둘레 길을 따라 들어갔더니 ‘이지당’이라고 옛 조선의 유생들이 공부했던 곳에 발길이 멈추었다. 맑은 하천이 흐르고 뒤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진 서당, 공부하고 사색하기에는 그만인 곳이었다. 여든이 넘어도 동네에 있는 보물인지 문화재인지도 처음 보았으니 우물 안 개구리가 맞기는 하다.

■ 우리를 지탱시키는 뿌리들

여든 네 살이지만 나도 한 때는 갈래머리에 교복 입고 다니던 황금빛 시절이 있었다. 오래전 세월을 더듬어 보면 그 기억의 끝자락에서 요란한 징 소리가 들린다. 

눈망울만 초롱초롱 하던 여섯 살 계집아이 귀에 들리던 꽹과리 소리, 징 소리가 해방을 알리는 소리인줄 그때는 몰랐다. 한참을 지나 교과서에서 보았던 우리의 해방!

손주들과 지난주에 병천 독립기념관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말만 들었던 독립기념관을 직접 가보니 천정을 올려다봐도 끝이 안 보이는 대리석 입구부터 우리의 역사를 하나하나 보존해놓은 것들을 보고 시골할미지만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나도 고생을 많이 한 세대지만 우리 윗세대는 처참한 시절을 겪고 지금의 우리를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잘 물려줘서 고맙고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

독립운동의 전시장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던 이유도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해방의 그날을 맞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거룩한 피를 흘렸는지 알게 되어 역사의 현장을 복원한 박물관이 주는 힘을 알았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들 역사 교과서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위대한 유산들이다.

희미하게 기억되는 마을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내가 태어나 역사의 현장에 처음 서 보았던 날이었다.

■ 전쟁 난리 속의 통곡소리, 막내 여동생을 잃다

그 함성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난리가 났다. 

젊은 아이들이 기막힌 사건들이 발생하면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고 무심히 말하는데 그들이 난리를 겪어보기나 했던가. 난리를 겪어본 이들은 그리 말할 수 없다.
김천으로 피란 가던 길. 

영동 어디쯤에서 비행기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더니 어디선가 쾅 소리가 나고 다시 이어지는 비명소리 또 비행기 소리, 다시 비명소리 지근거리 였을 거다.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으니….

그렇게 찐 고구마 두 개로 3일을 버텼고 무명옷은 한 달 내내 한 번도 갈아입지 못했다.

전쟁 통에 웬 볕단 인가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논두렁에 시체들이 볕단처럼 쌓여있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도 코를 틀어막지 않은 것은 그 냄새쯤은 아무것도 아닌 충격적인 장면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겨우 걸음을 걷는 아이들이 엄마 손을 놓쳐서 울며불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를 찾느라 인파속을 해맸다. 우리 가족도 그들 사이에서 통곡을 하면서 막내 순자를 불러댔다.

“순자야 순자야”

동생 손을 놓친 나는 겁에 질렸고 그 다음에는 동생을 잃어버린 죄책감 때문에 물 한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언제 끝일지 모르는 그 난리가 진짜 난리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저녁 무렵이면 날씨가 추워지면서 깊은 가을을 맞이하고 우리는 다시 옥천으로 돌아왔다.

아홉 식구가 내려갔지만 우리는 막내를 잃어버렸다. 동생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 못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수십 년을 보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막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산가족 찾기에도 신청해 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우리 막내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우리는 남은 여덟식구가 막내를 기다리면서 서로 위로하고 함께 울었지만 우리 막내는 혼자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견뎌내야 했을텐데….

아, 가엾은 막내 피붙이를 잃어버린 삶과 죽음의 현장이 맞붙어있는 곳이 전쟁터이다.
함부로 난리라는 말을 쓰는 요즘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 인생의 바다위에서 만난 운명의 조각들

그 전쟁 통에서 우리는 살아났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나는 여든 네 살이 되었다.
젊은 날에는 내가 여든이 넘도록 살 것이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
목재소를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입에 풀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옥천여중까지 다녔다. 교복을 입었으니 그나마 행운아다. 여중을 졸업하고 살림을 돕다가 남동생이 청주에서 연초제조창에 다닐 때 청주에 가서 남동생의 자취를 도왔다.

밥도 해주고 나는 수예점에서 일을 도우면서 수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르바이트였다. 남동생이 퇴근하기 전 몇 시간 동안 일을 배우고 수예점도 도우면서 5만 원정도 급여를 받았다. 우연히 구판장에 들렀다가 수예점 언니가 곱게 생겼다며 놀러오라고 했던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인생사는 내일 일을 모른다고 하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예측할 수 없어서 설레고 두려운 것이 인생사다.

수예점 언니는 내가 방긋방긋 잘 웃어서 방글이라고 불러주셨는데 손님들도 방글아 방글아 하시며 예뻐해 주셨다. 
어느 날 휴가 나온 군인이 수예점에 왔다. 키가 훤칠하니 멋진 남자였다.
수예점 사장님은 “방글아 내 동생이야”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애써 태연한척 쑥스러운 인사를 하고 그날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슴이 떨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휴가 나온 군인은 다음날도 우리 수예점에 들렀다. 손에는 단팥빵을 한가득 들고 들어섰다. 

수예 솜씨가 좋았던 나의 60년된 보물
수예 솜씨가 좋았던 나의 60년된 보물

■ 동전의 양면을 닮은 아름다운 날들, 악몽 같은 날들

그에게 잘 보이려고 예쁘게 먹느라 물 마시는 것도 잃어버려 목을 캑캑거리며 먹어댔다.
수예점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는데 일부러 나가신 것이다.
그 군인은 나에게 영화배우 누구를 닮았다면서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나도 그에게 마음이 있던 터라 웃으면서 응대했고 우리는 그날부터 동네 산보도 하고 며칠간의 휴가를 꿈처럼 보냈다.

강원도 화천에서 근무하던 남자는 부대로 돌아가고 나는 그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고 보고 싶었다.
주고받은 편지는 수백 통을 넘겼고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내 나이에 연애하고 결혼한 부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수많은 편지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추억자리가 다 사라진 만큼 속상하다. 제대를 하고 결혼을 했다. 결국 수예점 언니와는 시누이 올케가 된 것이다. 시누이와 같이 수예점을 하고 남편은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남편이 박봉이었지만 나도 수예 솜씨가 좋아서 살림에 보탤 만큼의 돈을 벌었고 우리는 5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이 다들 착하고 공부를 잘해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잘 살던 날들이 이어지다 우리는 청천벽력같은 운명을 다시 만나게 됐다. 
남편이 퇴직하고 좀 쉴만하니 갑자기 소화가 안 된다고 활명수를 몇 달을 마시면서 체기를 가라 앉혔다. 큰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동네의원에서 소화제만 내내 타다 먹었다.

결국 숨이 차오르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대전충남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췌장암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모두 오열했다.
서로의 무심함을 원망하면서 나도 건강한 남편이라 방심했고 남편도 스스로 건강을 자신했다. 자식들을 불효자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다들 열심히 살던 죄밖에 없었는데….

우리 큰아들이 남편을 선산에 묻고 오열하던 그날의 쓰라린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결국 누구나 혼자 태어나 혼자 떠나는 길인데 유난을 떨었으면 남편이 조금 더 살지 않았을까 자책감이 든다.

인생사 무심하게 흘려보내자 했던 것이 남편의 명을 재촉했나 싶다.
누군가는 인명제천이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남편을 보낸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다.

이지당
이지당

■ 인생 소풍 길의 끄트머리를 준비하다 

나도 여든이 넘으니 사브작 사브작 기억이 희미해지고 깜박깜박 하는 날들이 계속 쌓여간다. 아직은 혼자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아이들한테 민폐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연명치료거부의사도 밝혀놓았고 장기기증도 다 해놓았다. 그리고 내가 아프면 바로 요양병원으로 보내달라고. 대신 시설이 좋은 곳으로 보내주고 자녀들도 각자의 삶이 있으니 매주 한번만 돌아가면서 한 명씩만 와 달라고 요청도 해두었다.

미리 말을 던져놓으니 아이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하지만 내심 위안이 될 것이다.

병든 애미를 보살피는 일이 자식들 삶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서로의 안위를 지키면서 돌봐주는 것이 가족이다. 무작정 헌신은 한사람은 살고 한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 왜 그 지경까지 이르러야 할까. 다들 같이 살아내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이다.

나도 중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독서를 즐기고 살면서 많은 경험을 얻었다. 세상의 문리를 좀 아는 할미다. 이제는 치매초기라 예전 같지 않지만 지금은 우리가 살던 그 세대와 다르다. 우리가 살던 삶의 모양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할 이유도 없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비혼주의자라고 나를 놀래 킨 우리 손녀딸은 서른일곱 살인데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 다니고 성격 좋고 인물은 누굴 닮았나 너무 예쁘다. 그런 녀석이 결혼을 안 한다니.

왜 결혼 안하느냐 했더니 결혼은 출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해야 하는데 출산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니 갈등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똑같은 환경에서 여자들만 희생하는 거라고 마치 국회의원처럼 연설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을 환경을 만들어줘야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겠단다. 나랏일 하는 분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 때는 북적거리며 같이 살 부비고 사는 게 미덕이었는데 지금 세상은 삭막하지만 자기결정권이 있는 삶이라 무엇이 좋다 나쁘다 편가를 수 없다. 그저 80년 넘은 세월 속에서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서 우리는 그저 현기증을 느끼면서 살 뿐이다.
비록 학문적인 이론은 습득하지 못했지만 80여년의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다 한들 그

시간이 함몰되지 않았다. 우리 자손들에게도 흔적이 남을 것이고 나는 우리 후손들이 정말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 주고 떠날 것이다. 그것만한 유산이 어디 있을까?

사랑의 마음 진실 된 애정의 마음, 우리가 남길 정신의 유산, 위대한 유산이라는 말로 부족함이 없다.

내 사랑 우리 막내 손녀
내 사랑 우리 막내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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