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순

시작은 우연이다.

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큰일도 그러하거니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도 우연에서 비롯된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터가 우리 동네에 있다. 그곳은 물통을 줄 세워 놓고 그늘에서 땀을 식히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물맛이 거기서 거기지 뭐, 날도 더운데 참 유난스럽다. 그냥 생수 배달해서 먹으면 편할텐데…….”하고 관심조차 없어했다. 그러던 초여름 어느날 그 앞을 지나가다 때 마침 내린 소나기로 한층 더 싱그러워진 숲을 올려다보았다. 자꾸 보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곁눈질만 하던 곳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다니던 곳인 양 자연스럽게 발길이 옮겨졌다. 등산로 표시로 달아놓은 붉은 리본이 꽃처럼 고왔다. 조붓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니 함초롬한 맥문동 꽃밭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짙은 보랏빛 꽃을 손에 꽉 움켜쥐면 보라색 물감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 꽃 몇 줄기 뽑으려고 오르다 시작한 등산이 요즘은 가장 가치있는 일이 되었다.

처음 며칠은 삼십 분, 그 다음은 한 시간, 그러다 조금 더 멀리 그렇게 늘려간 거리가 대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진득하지 못해서 작심하고 세운 계획도 며칠 못가서 포기하곤 했는데 이번엔 제법이다. 싫증을 내지 않으니 말이다. 집 가까이에 있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긴 하다. 한여름에도 아름드리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더위가 싹 가신다.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 건너는 날쌘돌이 청솔모, 차랑차랑한 매미소리, 수풀 사이의 다소곳한 풀꽃들 짝사랑하듯 거친 소나무둥치를 안고 오르는 담쟁이의 순애보, 솔향기, 바람소리 어느 것 하나 이 무더위 속에서도 자연은 묵묵히 자신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울 일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고 한다. 나누고 싶지 않은 비밀의 화원이다. 고즈넉한 숲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시간들이야말로 내 영혼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기억 저편의 시간들과 마주하며 토닥토닥 위로를 주고받는다.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긴 터라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기도 하지만 떠밀리듯 단체로 움직이는 여행이나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가다보면 정작 내가 얻고자 했던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 없다.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아낌없이 부어주는 눈부신 햇살과도 눈맞춤을 할 수 없다. 남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 세상살이가 내겐 너무 버겁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높이까지만 오르려 한다. 소박하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은 삶, 안빈낙도를 꿈꾼다. 인생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단옷을 입었는지 누더기를 걸쳤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설자리 앉을자리 가려가며 나를 다스릴 수 있으면 어설프게 갖춰 입은 비단 옷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부족해서 실수의 연속이었던 지난날들에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서 얻어진 교훈도 있었을 테니 나름의 의미는 있다 하겠다. 흘러간 시간의 깊이를 반추하며 또 어디론가 흘러갈 미완의 여정을 준비한다.

대전 둘레길 여러 산중에서 계족산성이 가장 유명하지만 나는 우리 동네 뒷산 갈현성을 자주 간다. 오천년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소외받은 백제의 전설이 깊이 잠들어있는 듯하다. 눈을 감고 귀를 모으며 호연지기를 꿈꾸었을 백제 장수의 함성과 그를 사모하는 아리따운 여인의 애달픈 노랫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깊이를 잴 수 없는 시간에 갇힌 옛 성 허물어진 돌 틈 사이에 다람쥐 한 쌍이 숨바꼭질 한다. 가을에 숨겨놓았던 도토리가 다 떨어졌는지 등산객이 버린 과일껍질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작은 몸짓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는데도 나랑 눈이 마주쳤다. 쪼르르 도망가며 작은 돌탑의 돌멩이를 굴려 한낮의 적요를 깨운다.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가까워진 여름 끝자락, 아직도 늦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그늘이 있기는 하나 한낮에 산을 오르는 것은 고행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습관처럼 되어버린 산행에 제법 재미가 붙었다. 그런 내가 대견하고 눈에 띄게 가벼워진 몸이 고맙다. 어제 오늘 그랬듯이 별일 없으면 내일도 등산화 끈을 당겨 매고 집을 나설 것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가고 오는 계절,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오늘따라 더 높아보이고, 영글어가는 밤송이도 제법 튼실해 보인다. 떡갈나무 잎새도 벌써 누른빛이 감돈다. 녹음 푸르던 숲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그 고운 잎들은 또 소리없이 지고, 여름 철새들 수북한 낙엽을 밟으며 가을 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섭리에 따라 채워지고 비워지는 아름다운 자연, 하얗게 비워진 숲이 동면에 들어도 나목들은 초연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고 다람쥐도 산꿩도 그곳에서 겨울을 날 것이다. 바람소리 황량한 겨울산을 오를 엄두는 안 나지만 함박눈 내리는 날 하얀 산이 손짓하면 그 유혹은 떨치기 어려울 것같다.

우연히 겹치면 연연이라고 한다. 사람과의 인연이든 사물과의 인연이든 살면서 조우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일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다시 맞는 가을에는 내 안의 나를 성찰하며 더 나은 삶의 지평을 열어가야겠다.
우연히 들인 습관 하나가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여름 한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어떤 우연이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 줄지 그 우연도 자못 기대가 된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