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전주 야호학교 교장/양수리)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의 4시간짜리 영화 <윈터 슬립>은 관계의 나비효과를 다룬 영화다. <올드보이>도 마찬가지다. 무심코 내 던진 한마디가 주인공 대수를 20년 동안 독방에 가두고 처절한 복수가 펼쳐진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말 한마디가 세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정욱 감독의 <좋은 사람>은 ‘나는 붕괴 되었다’라고 중얼거리던 <헤어질 결심> 박해일의 붕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영화다. <헤어질 결심>의 붕괴는 내게는 추상적으로 다가 왔다. 스타일리스트 박찬욱 감독과는 <올드 보이> 이후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정욱 감독의 <좋은 사람>은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듣게 되어 알게 된 영화다. 물론 영화 잡지에서 잠깐 평점을 살펴 보고 무심코 지나친 기억은 있다. 부산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제치고 상을 받았다길래 일부러 본 영화다. 씨네 21 평론가들의 평점도 수수한 편이라서 그럭저럭 만든 영화라고 관심 밖으로 치워 둔 영화였다. 별점이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지만 3과 4점 사이의 영화들은 고만고만하게 만든 거라 사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적어도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자기 프레임도 정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로 혹은 소재만 가지고 만용을 부리는 감독들이 있다. 미안하지만 관객수로 보답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좋은 영화지만 관객이 지나치는 영화들도 있다. <좋은 사람>은 후자에 해당 된다. 엔딩 크레딧 전의 마지막 씬은 마음을 오랫동안 먹먹하게 하고 실존 캐릭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안부를 궁금해하게 한다.

좋은 영화는 영화 속 캐릭터를 좀비가 아닌 존재에 가까운 인물로 복원 시키고 더 나아가 삶의 현장에서 대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확장하게 해야 한다. 영화는 관객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생존의 현장인 셈이다. 물론 치열한 생존의 냄새를 지우고 상상의 공간을 가게 하는 판타지 기능도 좋은 영화의 범주에 들긴 한다.

<좋은 사람>은 작은 사건이 점점 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영화다. 동시에 견고했던 개인의 신념과 태도가 서서히 무너지고, 액션과 리액션이 반응할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영화다. 아주 사소한 의심으로 발화된 사건이 소화 된 사건이라 생각한 순간 잔불처럼 일어나는 편견의 붕괴는 곤경에 처했던 인물의 프리퀄을 다시 마주보게 된다. 주인공 정호의 가족은 붕괴되고 있지만 학교 교사의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나름 좋은 교사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도난 사건이 나면서 용의자로 지목된 세익을 추궁하면서 점점 더 실타래가 얽히기 시작한다. 동시에 주인공이 판단하고 있는 진실이 에러가 되고 마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다. 

<좋은 사람>이 확증편향의 씨앗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영화<다우트>는 확증편향이 신념이 되면 얼마나 가혹한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 수녀는 어느 날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한 친구가 결석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학교의 교장이 연관되었다고 생각하고 탐문을 시작한다. 증거는 비어 있지만 알로이시스 수녀의 의심만이 확실한 알리바이면서 교장을 공격하는 수단이 된다.

한번은 어느 술자리에서 후배가 에픽하이 멤버 타블로는 거짓말쟁이라고 주억거렸다. 한참 타블로가 버클리 음대를 다니지 않았다고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로 결론이 난 이후였다. 하지만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모임)는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타블로를 공격했다. 그리고 타블로는 결백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증편향의 서늘함을 다시 경험했다.

영화 <헌트>는 유치원교사로 일하던 주인공이 한 소녀를 추행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결국 누명을 벗어난 이후 떠난 사냥터에서 그는 정체불명의 이웃이 자신을 향해 쏜 총에 망연자실해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메시지가 담긴 단호한 총알이었다.

언론의 잘못된 판단으로 신문 기사에 실린 후 여론 재판의 도마에 올랐다가 마구 난도질 당한 뒤 어떤 이들은 잠적하거나 죽음을 각오하거나 혹은 후유증을 감수하고 살아간다. (타진요 사건 이후 타블로의 아버지는 암으로 형은 직장을 포기한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펜이 진실의 칼이 아니라 망나니의 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과 관계하다보면 무수히 오가는 설왕설래에 일일이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 까닭에 곳곳에서 말이 뭉쳐서 벌어지는 눈사태가 발생한다. 현실에서도 자신의 판단이 진실이라고 고집부리는 아스팔트 부대들이 존재하고 결국 그 편향성은 유튜브 매체를 통해 견고하게 강철대오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 <좋은 사람>은 모든 엔트로피가 정리되었다 싶은 순간에 어퍼컷을 치고 빠지는 영화다. 온갖 혐의의 똥물을 뒤집어 썼다가 빠져 나온 세익이 다시 교실에 들어와 앉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익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친구들은 평온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도난 사건으로 부각 된 세익의 존재감은 다시 지워지기 시작했고 삶은 계속 되고 있었지만 왠지 불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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