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가화리 홍순자, 81세

“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
“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

 

 ■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

충북 오송이 고향인 나는 지금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줄곧 말한다. 고향마을은 산도 멀어서 나무하거나 나물 뜯으러 가려면 20리를 걸어야했다. 남정네들은 큰 숨을 몰아서 산에 올라 지게에 나뭇짐 얹어서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여인네들도 두 말하면 뭐할까, 헌신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기회가 단절되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아왔다. 오송 강외 초등학교를 나와서 청주여중을 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많았지만 형편이 안 되니 중학교에 다닌 것만도 친정어머니 덕분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안가셨지만 총명하셔서 글도 읽고 편지도 쓰셨다. 어머니 덕분에 교복이라도 입어보았다. 나를 공부시켜준 우리 어머니는 내 평생 은인이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나? 내 나이 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없는 살림에 남편의 부재로 어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은 굳이 말로 드러내기도 가슴이 시리다. 당시만 해도 돌림병이나 홍역이 많아서 동네를 한번 휩쓸고 가면 온 식구가 줄줄이 꽃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히기도 했다. 동네에 곡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시골 산자락에 유난히 애기 무덤이 많았던 슬픈 기억이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그 길을 지나려면 뒷목이 쭈뼛거려 오금이 저렸다.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아 두려움으로 꽉 찼다.

어렸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할머니께서는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만 입혀서 부엌 아궁 앞에 세우셨다. 바가지에 굵은 소금을 담아 한줌씩 온 몸에다 뿌려 주시고는 부엌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려 주셨다. 아이고, 쓰리고 아파라.“철모르는 아무개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합니다. 삼신님께서 깨끗이 낫게 해주십시요”주문처럼 말씀하시면 2~3일 후에 언제 낫는 지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미신 같지만 그 시절엔 믿고 살았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학질이나 돌림병에 걸려서 열이 높아 사경을 헤매도 용한 할머니를 모셔 갔다. 마을에 돌림병이 생기면 할머니도 바쁘셨다. 이집 저집 불려 다니시며 돌팔이 의사 역할을 하셨다.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다. 돌잔치, 백일잔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돌림병에서 목숨 건졌다고 잔치를 벌였다. 나도 학질이 걸려서 학교도 두 살 더 먹어서 들어갔다. 결핍투성이었던 유년의 기억은 우리 동년배들은 니나 내나 다들 마찬가지다.

■ 몸은 고단했지만 야무진 큰 애기, 순자

중학교 졸업하고 엄마랑 동생하고 신탄진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철도국에 다녔는데 신탄읍내서 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친척동생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살림도 도왔다. 상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린 마음에도 잘 보이고 싶어 눈치도 빠르고 뭐든 잘했다. 할머니가 예뻐하셔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마음은 그리 고달프지 않았다.

신탄진역은 노리까에(환승)역이라 기차가 한 시간정도 멈췄다가 갔다. 손님들이 내려서 시장보고 끼니도 채우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면 많은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로 얼음을 탕탕 깨고 양잿물로 미리 애빨래를 한다. 양잿물은 짚풀을 떼서 만들었는데 비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려니 손은 마디마디 아렸고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애꿎은 빨래 방망이만 연신 두들겨 댔다.

■ 원기소 만들던 서울제약의 또순이 

외갓집에 기거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직회사에 다녔다가 제약회사 채용 공고를 보았다. 서울 올라 갈 때는 촌티를 안내려고 핑크색 유똥 치마에 저고리 해 입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우선 서울살이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잘 사는 집도 석탄을 떼서 난방을 하느라 얼굴만 뽀얗고 다들 새카맸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자취하고 마침 제약회사 공고가 났다. 당시는 유한양행, 서울제약 (서울 약품 공업사), 삼일제약등 제약회사가 세 곳 이었다. 나는 서울제약(서울 약품 공업사)에 입사를 했다. 

서울제약은 그 유명한 원기소, 비오비타, 러미라를 만드는 회사였다. 나는 포장 라인에서 근무했다. 다들 형광들 불빛아래서 밤이면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서 손등이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졸음을 참아냈다. 가족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 아내, 딸, 언니, 누나들이었다. 그녀들의 헌신이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아서 돈을 벌면서 야간에 고등학교에 다녔다. 편물이 유행할 때라 편물도 짜면서 공부를 했다. 20대 나의 관심은 온통 돈이었다. 돈을 벌어서 집안도 일으키고 엄마도 돕고 싶었다.

1967년에 남편을 만나 아들 셋을 낳고 1973년도에 옥천으로 내려왔다. 가난 속에서 철이 들어서 나는 더 야무지게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우리 영감님의 할머니께서 남편 어릴 때 팔베개를 해주시면서, 

“평득아 너는 크면 마누라 덕에 잘 살거다” 라고 줄곧 남편 귀에 대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말대로 됐는지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와 거친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자녀들도 다들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

큰집은 꼭 챙기라고 할머니가 끼고 가르쳐서 남편이 사촌 시동생한테 쌀 한가마니씩을 나눠줬는데 나중에 시동생 말이 우리 남편이 그 집 마당에 탕! 소리를 내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내려놓을 때 그렇게 고마웠단다. 사촌 동서는 그 이후로 농사짓고 수확하자마자 쌀, 된장, 고추장, 참깨 볶아서 참기름, 들기름 짜서 바리바리 택배를 보낸다.

보은을 한다고 나를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우를 하는 동서에게 나는 고마워서 돈이라도 보내려면 “형님, 돈 주시려면 우리 인연 끊어요.”라며 단박에 거절한다. 나는 동서의 그 진심에 울컥한다. 요즘이 각박한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우리 동서를 보면 마음이 그냥 따뜻해진다. 작은 것에 서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은 결혼할 때 나에게 “당신 밥은 안 굶길게” 라더니 그 약속을 지켰다. 아무것도 없어 빈털터리였던 남편은 고철을 취급했다. 서울 신길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전세금 5만원이 없어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다들 어렵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림이 늘어나는 기쁨을 맛보면서 견고한 세월이 쌓였다. 그 사이 우리 세 아들은 쑥쑥 자랐고 우리 부부의 연륜도 깊어졌다.

■ 우리 부부의 용기와 도전이 낳은 희망의 결실들 

고철 취급할 때 인천 대한제철에 납품을 했다. 당시는 현찰이 아니라 주로 어음을 발행했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내에 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결국 부도가 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꼬물꼬물 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살길이 막막해서 시골에서 다시 도전해보려는 의지로 막내 손만 잡고 중화실업 동네 신대로 와서 은성산업 제사 공장에 다녔다. 그나마 그것도 친척 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은성산업과 중화실업에는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야간근무하고 퇴근하는 아가씨들에게 근방의 청년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했다. 남편이 시골을 재건해보려는 마음으로 그 아가씨들과 청년들을 모아 4H를 조직했다. 토끼를 사육해서 팔게 하고 포프라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서 산림청장님이 상금을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

다들 협력해서 시골 마을을 살려보자는 의지들이 생겨서 나는 동네 주민들의 아이들을 따로 챙겼다. 농번기 때는 동네 아이들을 은행나무 밑에 앉혀놓고 옷도 똑같이 입혀 율동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아이들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어서 탁아소의 전신처럼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청년들은 남편을 지도자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 간간이 머리 희끗희끗한 분들이 남편에게 지도자님! 하면서 반가워하면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회억에 젖기도 한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해서 했던 일이 아니라서 부족했지만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믿음하나로 버티면서 다들 함께 했다. 여든이 넘은 우리에게 그런 불같은 청춘이 있었다니!

나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나이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아서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인가 수십 년 전이다. 정우산업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는데 무료라 친구들과 가서 배우고 복지관에서 또 배웠다. 유난스러운 할미가 아니라 나이 들어도 더 배워서 유익하게 잘 쓰고 싶은 갈망이 여전했다. 인터넷도 배우고 이메일 주소도 만들면서 뭐든 열심히 배웠다. 처음에는 다 어설펐지만 시간이 쌓이고 연륜이 생기면서 일구어 나갔다. 

나이든 우리들이 세월 속에서 쌓은 경륜은 무시할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연륜과 지혜는 살아 있는 인문학 책이다.

■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신식 할머니 

아파트 부녀회장 할 때는 교장선생님들과 학생들 모아놓고 아이들에게 촌수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촌수가 뭔지 모른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는 가엽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키워주는 교육이었다. 나는 복지관에서 동년배 상담을 한다.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고 집으로 배달된 반찬에 대한 의견도 듣는다.

당근마켓 어플을 깔아서 중고 물품들도 올려서 판매를 한다. 어느 날 장야리에서 젊은 새댁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물건을 가져갔다. 뒷모습을 보면서 ‘저 새댁도 나처럼 아끼고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녀를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 환경의 역습을 걱정하는 ‘어른’

나는 3형제를 두었는데 손주가 다섯 명이다. 다들 자기 몫을 하고 잘 살고 있어서 내 노년의 기쁨이며 위안이다. 걱정이라면 환경문제다. 갈수록 쌓이는 환경쓰레기에 이제는 마스크까지 매일 천만장이 넘게 버려지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썩을 것도 아니며 보통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도 걱정이지만 마스크가 쌓여가는 환경도 더 걱정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연과 환경들이 우리 삶을 역습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숙제를 안고 간다. 지혜롭게 해결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더불어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먼저 살아본 우리의 역할이다. 그런 일이라면 앞장설 준비가 됐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궁핍한 시골에서 태어나 고단했지만 내 의지로 삶을 예쁘게 그려왔다.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 위의 무명천에 목단 꽃이 곱게 피어났다. 어여쁜 목단 꽃으로 내 인생의 자수를 마감중인 손끝이 오늘따라 더 야무지고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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