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친구가 다니는 직장 동료들과 몇 번 가벼운 등산을 한 적이 있었다. 청주에서 시골로 출퇴근하는 그녀들은 한 자녀가 있는 여간호사와 아직 혼자인 30대 초반의 아가씨. 산행을 하면서 간호사가 내뱉는 언어는 굉장히 노골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착착 감겨 들어오는 뜨거운 언어다. 산을 내려오면서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

“내 친구들이 나를 천연기념물이라고 그래”
“왜?”
“아직 애인이 없다고”

 

임상수 감독의 도발적인 영화 <바람난 가족>이 가벼운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나는 그다지 새로운 소재가 아니라서 시큰둥했지만 <바람난 가족>을 들여다본 관객들은 몹시 불편했다. 큰 형수가 다니는 공장 아주머니들도 다들 애인 하나씩은 있다고 큰 형수가 주억거린다.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해 할 사람들이 많을 게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암컷과 수컷들의 발정기를 보는 듯한, 냄새는 향기롭지 못하지만 자신들을 보는 것 같아 상당히 찜찜할 영화다. 어린 사람들은 결혼과 가족의 거짓 이데올로기를,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 가지 얼굴을 빤히 무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주변에서 일찍 결혼하고 일찍 자식을 낳는 게 좋다고 많이들 그런다. 산 위에서 만난 그녀와 형수의 얘기를 들어 추측하면 일찍 자식들을 키우면 훨씬 바람 피우기에 적당하다는 생각도 들고 젖먹이를 떼놓고 애인과 뒹굴다가 비극을 맞이하는 영화 <해피엔드> 같은 꼴은 안 당하겠지.

욕망은 음지에서 어두컴컴한 모텔에서 부끄럽게 엉키며 자란다. 욕망을 음지로 내모는 건 가족이다. 그래서 오히려 일부일처제의 양식은 가증스럽게 보인다. 욕망에서 자유로워라는 명제는 아직은 이기적으로 보인다. 모래 위에 지어 놓은 가족이란 집은 위태하다.

4,50대 세대들은 문화가 없다. 인생을 제대로 즐기며 그들을 되짚게 하는 문화가 없다. 컴퓨터로 맞고를 치거나 물 좋은 나이트에 가서 애인을 만들거나 둔감한 미각을 자극할 만한 음식점이나 유람하는 게 고작이다. 물론 그들의 놀 거리가 생겼다고 욕망이 거세당하지는 않겠지만 이 천편일률적인 쏠림은 풍성하기보다는 황량해 보인다. 마음의 빈 곳을 채우려 하지만 오히려 틈은 더 벌어진다. 

여교수 조은숙은 자신의 권력을 통해 욕망을 채우고 소비한다. 기존 영화들이 남성의 욕망을 권력을 통해 소비했다면 이 영화의 방식은 오히려 신선하다. 그리고 교수라는 직함에 반비례하는 이들의 유치찬란한 연애는 훨씬 더 도드라져 보인다. 감독이 의도한 지점이 확연히 보인다.

장면을 쉽게 쉽게 넘기지 않는 끈적함, 소읍의 불온한 공기. 남자들에게 조은숙이란 존재는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안전하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뒷끝이 없으니, 홍상수도 남자들의 끈적한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 적이 있지만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더 거칠게 발가 벗겨 논다.

인생은 주인공 조은숙이 투박하게 끄적거린 시처럼 낯간지럽다. 뽕작 한소절 같은, 혹은 그럼에도 전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소읍의 권력과 성 그리고 명예로 만든 피라미드는 튼튼하고 불쾌하다는 듯 내 뒷자리의 관객은 투덜댄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과 <바람난 가족>은 공교롭게도 두 편 다 문소리가 주인공이다. <박하사탕>의 순이가 도발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전혀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연기가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선정적인 영화를 선택해서 주목을 받고 싶은 신분상승의 여배우라고 평가 받기 십상이었다. 
“남편 말고 애인이 필요해” 포스터 문구가 심상치 않다. 여성이 욕망의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영화의 역사에서 임상수 감독은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시작으로 성적 욕망의 주체인 여성을 서사를 끌고 가는 주인공으로 밀어주곤 했다. 그리고 욕망을 쫓다가 파멸하는 기존 영화에 비해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는 오히려 남편을 단죄한다.  

 

저작권자 © 옥천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