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임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징검다리를 건너려니 옛날 새댁 때 생각이 난다. 내가 결혼하던 해에 이곳에 고속도로가 생겼다. 결혼할 당시 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임시로 마련한 길을 따라 신랑이 택시를 타고 장가를 왔다. 구식결혼을 하고 하룻밤 자고 시집을 갈 때는 역시 십리나 되는 가릅제를 넘어 지탄 간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다. 결혼 후에는 남편 직장을 따라 대천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라 대천에서 옥천은 먼 거리였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뒤인 음력 정월 초이틀, 아침 일찍 대천에서 기차를 타고 천안까지 가서 다시 대전행 기차를 탔다. 대전에서 버스로 옥천에 도착해 또 택시를 탔다. 남편은 어떻게 알았는지 옥천에서 금강유원지 까지 택시를 타면 높은 산을 넘지 않고도 친정을 갈 수 있다고 했다.

신랑을 따라 오랜만에 가는 친정 나들이에 신이 나서하루 종일 아이 둘을 데리고 네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곳이었다.

캄캄한 밤중에 전기불이 휘황찬란하고 높은 건물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조령리 강변에 금강유원지 휴게소가 생겼단다. 어디를 보아도 옛날에 내가 놀던 강변은 아니었다.

어리둥절해서 정신이 나간 듯 아이를 업고 어쩔 줄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누가 옆에서 어깨를 툭 치며 반색을 한다. “누구세요?” 하고 물었더니 나를 벌써 잊었느냐며 서운해 한다. 약간 취기가 있는 젊은 남자였다. 자세히 보았지만 동네 오빠나 동생은 아니고 동창은 더욱 아닌 것 같았다. “누구라고요?” 다시 물었다. “나 H요.” 하는데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어, 웬일이세요?” 하는 나에게 대답 대신 “나도 결혼 했어요.”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인다. “네, 축하해요.” 간단한 인사말을 마치고 남편한테 인사를 시켰다. 동생 담임선생님이라고. 아버지가 학교 일을 보는 관계로 우리 집에 출입이 잦았기 때문에 얼굴 볼 기회며 심심찮게 만날 수가 있었다.

서로 약간의 관심은 있었지만 나는 결혼해서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그 선생님을 밤에 생각지 않은 곳에서 만나고 보니 얼른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처음 간 길이라 낯설기도 하려니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 분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층층 계단을 내려가니 바짓가랑이 걷어붙이고 건너다니던 여울은 간데 없고 시커먼 물이 댐 속에 갇혀 하소연 하듯 나를 바라본다. 가로질러 막아놓은 둑 위로 징검다리가 드문드문 놓여 있고 물이 제법 많이 넘쳐흐르고 있다.

나는 갓난아기를 업고 신랑은 세 살배기 큰 딸 손을 잡고 큰 가방과 유리로 된 대도(1.5L)병 술을 두 병이나 들고 징검다리를 건너려 하니, 그 모양이 좀 힘들어 보였던지 선생님이 술병을 들어준다며 남편에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사람이 술을 잘 먹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술병을 깨뜨릴까 두려워 신랑에게 눈짓을 하며 안 된다고 했다. 신랑이 선생님께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굳이 아기를 업고 가겠다고 한다. 우리는 걱정이 되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럼 그렇게 하라고 했다.

선생님은 아기를 업고 앞서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갔다. 징검다리가 몇 칸 남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억’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아기를 업은 채 선생님이 물에 빠져버린 것이다. 사람이 건너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둑 위의 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이라서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징검다리가 찰람찰람할 정도여서 아기와 그 사람은 온전히 물에 풍덩 빠져버렸다. 그 사람은 아기를 물에 빠트려 놓고는 혼자서 도망가버렸다. 얼른 아기를 꺼내서 가방에 든 옷을 칼바람 부는 강변에서 갈아입히고, 갓난아기 포대기 속에 띠고 온 담요를 두르고 기저귀로 묶어 신랑에게 업혔다.

물에다 아이를 빠트리고 도망을 가더니 걱정이 되었는지 이튿날 아침 일찍 선생님이 찾아왔다. 아무 말이 없었다. 어젯밤에 제법 잘 떠들기에 많이 변했구나, 했더니 역시 술기운에 용기가 생겼던 모양이다. 옛날에도 술을 먹지 않으면 말이 없더니.

아버지께서 “얘야, 술국 끓여서 선생님 아침상 좀 차려라.” 하기에 아침상을 준비해 식구들과 한자리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선생님이 가고 난 뒤 아버지가 혼자 웃으시기에 “아버지 왜 그러세요?”하고 물었더니 “술은 참 좋아 햐.”하며, “은하 애미 좋다고 어지간히 쫓아다니더니.” 하면서 마실로 간다.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다가 대전으로 이사를 왔더니 선생님은 대전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었다고 동생이 말한다.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몇 번의 데이트가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50여 년이 흐른 세월 속에 지금은 어디에선가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 그 사람, 금강유원지 징검다리를 건널 때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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